212화
탄생(18)
남궁 세가에서 운호의 일과는 똑같았다. 아침에 일어나 수련을 끝내고 잠시 남궁혜의 무덤에 들렀다.
지켜본 사람의 말에 따르자면 그저 가만히 일각 정도 무덤을 바라볼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수련을 이어간다. 끼니때마다 식사는 벽곡단 한 알뿐. 검을 휘두르다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 자리에 앉아 명상을 한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검을 휘두른다. 그것도 하루 종일.
거의 편집증적인 수련이었다.
“근데 백 공자님은 청해에서도 저런 식으로 수련을 했었습니까?”
장당과 술을 마시던 남궁세가의 무사 하나가 물었다.
“응? 어디 보자, 그러니까 장군님이 청해에 계실 때는 워낙에 업무가 많아서. 그래도 남는 시간은 거의 수련에 몰두하셨던 것 같은데? 안 그렇습니까 형님?”
“글쎄, 그래도 거기서는 종 장군님이나 아가씨들 때문에 종종 숨돌릴 틈 정도는 있으셨던 것 같긴 한데······. 그러고 보니 자네도 이전에 백 장군님과 함께 생활한 적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땐 어땠었나?”
“한구부에서 잠시 함께 한 적이 있었죠. 그때도 확실히 연배에 비해 고절한 무공을 지니기는 했었습니다만······. 그래도 지금처럼 비인간적이지는 않았던걸로 기억합니다. 수련도 지금처럼 터무니없는 수준까지는 아니었고요. 저희 아가씨와도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셨었는데······.”
***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연무장.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운호의 주변만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고요했다.
그리고 남궁철은 그 모습을 보며 초월을 느꼈다.
절대 방해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지상에 태어난 인간이 그 굴레를 극복하고 한 걸음 나아가려 하고 있다.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될 일 아니겠는가.
-커험!!
하지만
마치 보리수 아래 붓다를 강제로 일으키는 마음으로.
십 년 면벽을 천명한 고승을 강제로 돌려 일으키는 느낍으로.
오랜 시간 공들여 쌓은 탑을 박살내는 심정으로.
남궁철이 자신의 본능을 거부하며 헛기침으로 운호를 일으켰다.
“아, 형님 오셨습니까?”
“그래, 이 무정한 놈아. 같은 집에 있으면서도 통 이 형님을 보러 오지 않기에 내가 직접 이렇게 찾아왔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그나저나 대체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길래 너만한 고수가 다른 사람이 접근하는 것도 느끼지 못했던 게냐.”
“아, 최근에 약간의 깨달음이 있어서 그것에 좀 집중하다보니······.”
“어이쿠, 깨달음이라고? 도대체 얼마나 강해지려고 거기서 또 깨달음까지!! 이래서야 이 우형은 이제 감히 따라갈 수도 없겠구나.”
“아닙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저희가 싸워야 할 적이······.”
마교의 대제사장.
그 압도적인 무공이 운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경지가 깊어지고, 무공이 높아질수록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고 느껴지기는커녕, 그가 보여준 위용이 얼마나 터무니없던 것인지만 실감하게 된다.
그는 대체 어떻게 인세에서 그만한 무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일까?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다만, 분명 경지를 넘어서는 순간 더 이상 지상에 있을 수 없게 됐음을 느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기에 그 대제사장이 보여준 무위는 그 경지의 너머인 것 같았거늘······.
초절정 고수가 보여주는 초월적인 무위도 결국 하늘의 법칙을 잠시 빌려오는 것에 불과하다. 지상에 얽매인 것은 지상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을 완전히 벗어난 인간은 결국 더 높은 차원으로 떠나게 된다. 마지막 순간의 파검 좌부원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마교의 대제사장은 그것을 무언가 특별한 방법으로 회피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대체 무엇일까?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남궁철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운호야, 넌 혼자가 아니지 않더냐.”
“······?”
“물론 대제사장이 막강한 적수인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초절정 고수들이 모인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상대였다고 본다. 생각해보거라. 만약 그 자리에 천무십칠성이 다 있었더라면? 아니면 황실의 고수들이나 구대문파에서 은거하고 있는 전대의 고수가 몇 명만 더 참석 했더라면? 난 결과가 크게 달라졌을 거라고 본다.”
그랬을까?
운호가 당시를 돌아봤다. 초절정 고수들과 대제사장의 격차는 마치 절정 고수와 초절정 고수의 격차를 보는 것 같았다. 그나마 파검과 무신의 경지는 반수 정도 더 높았기에, 그리고 대제사장이 거의 천 명에 가까운 고수들. 심지어 그 가운데는 절정만 삼백여명에 달하는 대인원을 묶어두면서 싸웠기에 그나마 싸움이라는 것이 성립됐었다.
보통 초절정의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스무 명의 절정 고수가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합이 아주 잘 맞는 절정 고수 스무 명. 심지어 초절정 고수가 정면으로 맞붙는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다. 만약 초절정 고수가 마음 먹고 도주를 하려고 한다면 그것을 막을 확률은 5할 미만이다.
이와 같은 계산으로 본다면 적어도 스무 명.
그래, 초절정 고수가 무려 스무 명이나 필요하다. 심지어 거기서 끝이 아니다. 마교라고 하여 또 다른 초절정의 고수가 없겠는가.
결국, 당시 파검과 같은 고수가 적어도 하나는 필요하다.
권신 청무진인이라면 당시의 무신에 비길만하다. 아니, 그간에 시간이 있었으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또한, 굴불신마 영무결이라면? 그래, 그라면 우화등선의 깨달음을 얻기 전 파검에 비길만할 것이다. 문제는 서평왕의 자리에 앉은 그가 과연 나설까? 하는 부분이다.
사실 굴불신마 영무결만이 아니다. 당장 무림맹주인 검왕 남궁벽만 하더라도 제대로 싸울지 알 수 없다. 다른 초절정 고수들은 또 어떨까? 현음명 최염? 혹참가포 조충? 은검귀수 박진문? 곤륜의 흑백쌍도? 모두 확언할 수 없다.
결국, 운호 자신뿐이다.
하늘은 어찌하여 이 몽원경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허락했으며, 끝없는 기연을 그에게 안겨주었는가. 또한, 몽원경의 목적은 어찌하여 마인이며 고작 약관을 조금 넘긴 나이에 초절정에 오른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대제사장과 그 사이에 씻을 수 없는 그 원한.
이 모든 것이 가르치는 방향은 명확했다.
하늘이 정해준 그자의 대적자는 운호 자신이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운호 자신의 운명에서 그 종국에 선 것은 저 마교의 대제사장이다.
-덥썩!!
남궁철이 운호의 양손을 잡았다.
“운호야, 아니다.”
“네?”
“강호에 모래알보다 많은 것이 기인이사들이다. 활불, 살리답. 그리고 대제사장까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괴물들이 호시탐탐 중원을 노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원은 제국의 땅이다. 어찌하여 그렇겠느냐. 세상에 누가 장조부님이 그런 천외천의 무공을 보여주리라 생각했겠느냐. 이 중원에 살아가는 사람의 숫자는 수억에 달한다. 네가 그렇게 모든 것을 짊어지려고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운호야!! 혜아도 그것을 바랄 것이다. 그 아이는 참으로 착한 아이였다.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자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버리고 무언가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가 되기를 바랐을 리 만무하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자신이 해주지 못한, 그리고 해보지 못한 수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신을 따라오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 아이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전혀 닮은 얼굴이 아니었다.
남궁철은 잘생긴 사내였지만 저 큼지막한 주먹코와 부리부리한 눈은 남궁혜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남궁혜가 떠올랐다. 그 짧은 시간.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던 소년의 마음을 온전히 가져갔던 그녀는 지금 남궁철의 이야기처럼 착한 사람이었다.
-주르륵
운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감정의 격동일까? 아니, 그럴 리 없었다. 그의 정신은 이미 인간의 경계를 넘어 초월을 향해 가고 있었다. 수십 년을 수행한 고승도 지금 운호와 같은 정신 세계에는 도달하지 못했으리라. 다만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서 그저 눈물이 흘렀다.
운호가 옷소매를 들어 자신의 눈가를 훔쳤다.
“형님께서는 이 동생에 대한 걱정이 너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지나치기는!! 이 녀석아, 나는 오히려 이것도 부족한 것 같구나. 하여간 무공만 높았지 참으로 손이 많이 가는 동생이로구나.”
“반대로 손은 하나도 안 가는 형님은 무공이 낮아 참으로 걱정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검왕의 손자이자 마지막 천하제일인의 후계자이신데 말이죠.”
“아니 그건 워낙에 내가 할 일도 많았고. 그리고 비교 대상이 너라서 그렇지 솔직히 나 정도면 그래도 안휘성 역사, 아니 무림사를 통틀어 보기 드문 성취를 거둔 기재다. 석년의 할아버지도 이만큼은 아니었다고 소문이 자자하거늘.”
“그야 검왕께서는 검왕과 같은 할아버지도, 파검 대협과 같은 장조부님도 없으셨으니까요.”
-어흠, 남궁철이 짐짓 헛기침을 하며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녀석. 농을 하는 걸 보니 이 형의 조언이 도움이 된 모양이로구나. 자자, 그러면 이러지 말고 얼른 우리 백이나 보러 가자꾸나. 그 녀석이 아주 하루 다르게 쑥쑥 크고 있어요. 너도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하하하하하.”
남궁철의 웃음 소리가 담장을 넘어서 울려 퍼졌다. 밖에서 서성이던 강아현이 그 호탕한 웃음에 안도하며 돌아섰다. 그리고 운호는 그런 아현을 잡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더 흘러갔고 남경으로 떠났던 남궁철이 돌아왔다.
***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다. 일은 잘 풀렸으니까.”
“감사합니다.”
굳이 자신이 내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운호 역시 때론 예의를 차리려고 하는 말이 비례가 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상대는 황제를 제외한다면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다.
“다만 네가 해줘야 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해야 할 일이요?”
“우선 당장에 할 일은 보광현으로 가는 일이다. 공 노인 말이 검을 만드는 데 네가 당분간은 보광현에서 함께 해야 한다고 하더구나. 네가 검을 쓰는 형태와 몸과 손의 크기 비율 등을 좀 자세히 봐둘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네. 당장 해야 할 일이 보광현으로 떠나는 일이라면 또 다른 일은?”
“아, 그건 그렇게 어렵진 않은 일이다. 그냥 지금처럼 열심히 무공을 연마해서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 정도? 뭐, 그게 어렵다면 적당히 우리 아버지 정도만 이름이 나도 괜찮긴 하다만, 그래도 이왕이면 천하제일인 쪽이 더 좋겠구나.”
천하제일인.
남궁강이 그것을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했다. 사실 그가 생각할 때 운호가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와 동시대를 살아갈 남궁철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고작 약관에 초절정의 고수에 오른 운호다. 그걸 따라잡으라는 것은 욕심을 넘어 아들에게 너무 가혹한 요구다.
여기서 그가 재밌게 본 부분은 운호 역시 그의 말에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는 점이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그거면 됐다.”
하늘과 땅을 잇던 거대한 용화수를 떠올리며 운호가 정답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