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역대급 천재-210화 (210/288)

210화

탄생(16)

“사과라고?”

“뭐야? 지금 벽 형님이 미안하다고 한 거야?”

“이제 나도 죽을 때가 다 돼서 그런가? 왜 헛소리가 들리는 거지?”

원로 고수들의 극적 반응에 왕효와 장당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봐도 그냥 귀찮으니까 옜다 해준다. 하는 식의 성의 없는 사과였는데 왜 고작 저런 말에 저렇게 크게 놀라는 것일까?

“너 기억나지? 우리 어릴 적에 벽 형님이 실수로 내가 아끼던 벼루 박살 내고 나한테 붓글씨 연습할 시간에 검을 한 번 더 휘두르라는 의미에서 일부러 박살 낸 거라고 아득바득 우겼던 거.”

“그건 양반이지. 칠 년 전인가? 우리 모임에 다섯 시진이나 늦게 나와서는 모임을 아침부터 하는 미친놈들이 대체 어딨느냐고 호통을 쳤었잖아.”

“아, 맞다. 그랬지. 그래서 내가 그 모임 시간 벽 형님이 정했던 거라고 이야기했다가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한 소리 들었었잖아.”

“그러니까, 너도 멍청했어. 한 육십 년 그런 모습을 봤으면 포기할 때도 됐는데 그걸 뭐 아득바득 나서서는······.”

연달아 튀어나오는 노인들의 이야기에 왕효와 장당이 혀를 내둘렀다.

검왕 남궁벽은, 그리고 저 원로 고수들은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던 것일까.

“놀랍구만. 내가 죽기 전에 벽 형님이 사과하는 모습을 다 볼 줄이야.”

“벽 형님도 나이를 먹은 게지.”

“나이는 무슨, 그냥 매 앞에는 장사가 없어서 그런 거 아닌가? 백부님도 그러니까 벽 형님이 경지에 오르기 전에 오냐 오냐만 하지 마시고 좀 쥐어팼어야······.”

저 성의 없는 사과에 놀란 것은 원로원의 고수들만이 아니었다.

사실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 크게 놀랐던 것은 다름 아닌 남궁세가의 가주이자 검왕 남궁벽의 아들인 남궁강이었다.

‘아버지가 사과를?’

그는 가문의 재산 삼분지 일을 날려 먹었을 때도 사과를 한 적이 없었다. 그저 지도자는 때론 과감한 판단을 내려야 하고 그것은 성공할 때도 실패할 때도 있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았을 뿐이다. 당시 의도야 어쨌든 결과가 실패했다면 책임을 지셔야 하는 것 아니냐는 그의 반발은 물론 완벽하게 무시됐었다.

운호는 알지 못했다.

그가 행한 이 일이 남궁세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를. 남궁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것은 분명 미소였다. 동시에 그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마음속에 아주 오랜 시간 맺혀있던 거대한 응어리 하나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

늦은 밤.

흐릿한 산봉우리.

그 아래 거인과 운호가 사투를 벌였다.

거인은 인세에서 가장 완벽한 육체를 만들어낸 인간이었다. 그것은 진정한 바즈라파니. 금강역사의 화신이었다.

시작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 달랐던 점은 운호의 몸이 매우 크게 야위었다는 점. 그리고 그의 검이 훨씬 더 표홀하였다는 점 정도였다.

하지만 그 조금의 다름이 점점 커다란 변화를 불러왔다.

활불의 공격에는 오묘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누구보다 빠르고 누구보다 강한 공격은 그 자체로 초월의 영역을 논할 자격이 있었으니까.

소리보다 빠른 발차기가 음속폭음의 굉음을 만들어냈다.

운호의 검이 움직였다. 아니 어쩌면 운호의 몸이 움직인 걸지도 모르겠다.

-탁

두둥실 떠오른 몸이 그 발차기의 여력을 허공으로 완벽하게 흘려보냈다. 공기가 폭발하는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활불은 이 이후를 알고 있었다.

몇 번의 공방이 이어지고, 결국 운호가 꺼낼 수 있는 패는 예의 그 검술 뿐이다.

저 뒤에 우뚝 솟은 흐릿한 산봉우리를 닮은, 어쩌면 꽃봉오리와도 비슷한 그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

활불 자신의 육체가 자연의 섭리 너머에 존재하는 것처럼, 운호의 그 검술 역시 지상의 법칙 밖에 존재했다.

하지만 활불과 운호의 차이는 명확했다.

육체 그 자체로 초월하여 지상에 선 자와 인간의 육체에 갖혀 그 의념으로 초월을 구현하는 자. 그 내구성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이 전자쪽이 압도적이다.

활불이 크게 진각을 밟았다.

대지가 꿀렁인다. 그리고 그 사이로 포탄과 같은 주먹이 날아들었다. 마치 곡예와 같은 동작으로 운호가 그 주먹을 흘려냈다. 하지만 그 흘려냄에도 어디까지나 한계는 존재했다. 연이어 이어지는 공격들 사이로 운호가 최선과 최선과 최선의 수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이어진 최선의 종국에 위치한 것은 활불의 노림수. 운호 역시 수십 합 전에 그것을 읽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활불의 터무니없는 공격들 사이에서 그의 노림수를 이렇게까지 유예했다는 것 자체가 운호의 초절함을 반증한다.

짧게 올려친 무릎이 운호의 두 발을 허공으로 띄웠다.

물론 운호와 같은 경지에 이른 고수라면 천상제나 허공답보와 같은 고절한 수법. 혹은 어검비행과 같은 수법으로 허공에서도 몸을 운신할 수 있다.

-옴!!!

그렇기에 단음절의 외침이 주변의 대기를 폭발시킨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뻗어오는 섬전과 같은 주먹.

마침내 운호의 검이 이치 너머를 그려냈다.

그의 마음속에 새겨진 거대한 봉우리. 모든 것을 받아 넘기는 화산의 기세가 펼쳐진다.

-쿠과과과광!!

그 위로 압도적인 파괴의 향연이 펼쳐졌다.

활불 자신도 알고 있었다. 저 거대한 봉우리는 쉽게 깨지지 않는다. 대자연이 만들어낸 거대한 산을 어찌 인간의 힘으로 뽑아낼 수 있을까.

하지만!!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고작 고대의 무장이 보여줬던 것을 역사 이래 가장 완벽한 육체의 완성자가 어찌 재현하지 못할까.

운호가 쥔 검이 출렁였다. 화산의 검을 닮은 그것이 비명을 내지른다.

그리고 그 사이로 운호가 오늘의 일을 반추했다.

주변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검왕 남궁벽은 참으로 졸렬한 자였다.

하지만 그가 보여줬던 검은 그렇지 않았다. 무한에 근접한 가능의 검. 그것은 어찌하여 무한의 가능에 근접하였는가?

그것은 남궁벽이라는 인간이 평생 연마해온 모든 초식의 집합이었으며, 그가 상상해온 모든 가능성의 구현이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그의 검이 그저 무한에 근접했을 뿐, 무한의 가능성에 도달하지 못했던 것은 그 상상의 지평이 거기까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운호가 생각했다.

나는 어떠한가.

납매(臘梅)는 지독하게 합리적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가장 엄정한 형을 띄고 있으며 수천, 수만의 가능성에서 가장 효율적인 길을 고집한다.

매농(賣弄)은 자유로워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추구하는 것은 사실 효율이며, 자유는 효율을 비효율로 꾸미는 속임수적인 장치에 불과하다.

자운(紫雲)은 엄밀하다.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이 지독한 기교의 검술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의 생략과 도약을 허락한다.

광음은 초월(超越)이다.

그저 느리고, 쓸모없는 초식으로 가득한 이 검술은 오직 단 일 검으로 가기 위한 어설픈 징검 다리다.

난풍(亂風)은 난폭한 포용이다.

화산은 날카롭고 직선적이며 뾰족함으로 가득한 돌 덩어리다. 하지만 그 광활한 산맥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무형(無形)은 어떠한가.

운호는 여전히 무형검의 비급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형태가 없음은 무엇인가? 세상에 대체 어떤 검식이 형태가 없을 수 있는가?

하지만 저 남궁벽의 반고검을 보고 어렴풋하게 생각하게 됐다.

만약 세상의 모든 검식을 다 내포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모든 유형을 동시에 다 갖출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진정으로 무형(無形)이라는 표현에 어울리는 검식이 아닐까?

운호의 검이 움직였다.

납매를 담기는 쉬웠다. 운호는 그 검술에 담긴 모든 형태를 분해하여 재정립할 수 있을 만큼 높은 숙련도를 자랑했으니까.

매농을 담아내는 것 역시 어렵지 않았다. 효율이야 말로 운호의 장점 아니었던가. 자운은 조금 어려웠다. 하지만 해낼 수 있었다. 비록 생략된 형태라고는 하지만 화산파에 내려오는 자운검에 관한 연구는 방대했고 운호는 그 모든 것을 이미 흡수한 이후였다.

광음은 쉽지 않았다.

차라리 이전이었다면 자신있게 광음을 다 담아냈노라 이야기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의 운호는 증무진인이 보여줬던 그 일검이 광음의 모든 것이라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지금의 운호는 달랐다. 증무진인이 보여줬던 그 일검은 광음의 모든 것이 아닌, 당시 운호의 몸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최선’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이 일검에 담긴 광음은 온전치 못했다.

그렇다면 난풍은 어떠한가.

운호는 감히 난풍을 무형에 욱여넣겠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완벽하게 펼쳐내지도 못하는 무공을 어찌 감히 해체할 수 있단 말이던가.

그렇기에 운호가 내민 이 일검은 아쉽게도 운호가 남궁강에게 사용했던 수준에. 아니, 남궁강이 운호에게 사용했던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활불은 인지하지 못했다.

그가 인식한 것은 그저 흔들리던 산봉우리가 허물어지는 대신, 그 팔을 뻗었다는 것까지였다.

저 먼 곳 그저 홀로 우뚝 서 있던 산봉우리 역시 길게 팔을 뻗었다. 어쩌면 그것은 앙다물려 있던 꽃봉오리의 꽃잎 가운데 하나가 사뿐히 내려앉은 것일수도 있었다.

-꺄갸갸갸갹

활불의 피부 위로 운호의 검이 미끌어졌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금강석보다 단단한 가장 완전한 자신의 육체에 기다란 흠집이 새겨진 이후였다.

초췌한 얼굴의 운호가 숨을 헐떡였다.

분노였을까? 아니면 당황이었을까? 활불이 크게 소리쳤다.

“감히!!!”

음속폭음의 굉음을 동반한 일권이 운호의 상반신을 폭발하듯 날려버렸다.

팔을 뻗은 산 봉우리의 형상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팔을 뻗은 산봉우리는 더이상 산봉우리라고 할 수 없었다. 아직은 미약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산맥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현실의 운호가 눈을 떴다.

“커헉······.”

***

이른 아침.

검왕 남궁벽은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굳이 그를 찾지 않았다. 그저 올 때와 마찬가지로 훌쩍 떠났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한 번의 사과를 했다고는 하지만, 지금까지의 남궁벽은 그런 사람이었고 남궁세가 사람들은 그런 남궁벽에게 익숙해져있었다.

가주인 남궁강은 곧바로 남경으로 떠났다.

만련공방의 주인이 얼마를 요구하건 지금 기분으로는 다 내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하 사대 상단으로 묶이기는 했지만, 그 수익금의 대부분을 황실에 상납하여 황실이 사치를 하는데 활용되는 다른 상단들과 달리 한상은 가장 큰 주주인 남궁세가가 수익금 대부분을 재투자에 사용해왔다. 그리고 그 세월이 물경 이십 년이 넘어간다. 사람들은 몰랐다. 남궁세가가 대체 얼마나 큰 부자인지를. 그것을 아는 이는 한상의 상단주를 비롯한 몇몇 핵심 관계자. 그리고 오직 남궁강뿐이었다.

“십만 냥이라고요?”

“네, 아시다시피 이 업계도 워낙에 기술 경쟁이 치열해서. 공방을 일 년이나 멈추고 거기에 전념시킨다는 건 그만한 비용은 들어가야 가능한 일이지요. 장인들 월급이며, 기존에 투자된 자금이며. 게다가 결과물이라고는 양산 가능한 물건도 아니고, 그냥 검 한 자루 아닙니까. 어휴, 그것도 남궁 가주님과 저희의 관계를 생각해서 원가로 해드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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