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탄생(13)
“여기 앉거라. 차는 내가 미리 준비해두었다.”
“감사합니다.”
“암, 당연히 감사해야지. 무림맹주가 직접 준비한 차라니. 천하에 이런 호사가 또 어딨겠느냐.”
과연 이것이 남궁세가의 품격이라는 것일까? 남궁철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재수가 없다.
운호는 대장군이 직접 내주는 차도 마셔봤는데 무림맹주 따위가 뭐 대수라고요. 라는 말이 목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참아냈다.
“낯이 익은 얼굴이라 기억을 돌려봤다. 금방 기억이 나더구나. 무한······. 그 자리에 너도 있었지.”
“······. 네. 그렇습니다.”
“고작 이십 대에 경지에 오르다니. 참으로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괴물도 세상에 존재하는 판국이니. 참으로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 것인지.”
참으로 묘한 화법이었다.
혹시 남궁세가는 어릴 적부터 밉게 말하는 법을 가르치기라도 하는 것일까?
‘이거 지금 제 무공 칭찬하는 거 맞죠?’
-저 녀석 입에서 나온 말 치고는 최고의 칭찬이지.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에게 칭찬하는 걸 수도 있다.
남궁벽이 실로 우아하게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정말이지 겉모습만 보면 거의 신선이다.
“물론 당시에 너는 수준이 한참 낮았으니 그것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겠지. 하지만 난 분명히 느꼈다. 그 터무니 없이 거대한 심상을 말이다. 그것은 참으로······.”
하늘에 닿는 용화수.
남궁벽이 우화등선한 파검조차 어떻게 처리할 수 없었던 그 거대한 나무를 말했다. 그가 말을 이어갔다.
“그들은 거기서 그렇게 허망하게 목숨을 던지면 안 됐다. 멍청한 인간들 몇몇은 나를 욕하지. 거기서 다른 천무십칠성처럼 목숨을 던져 그를 저지했어야 한다고. 하지만 천만에!! 애당초 거기서 다들 그렇게 헛되이 목숨을 버리면 안 되는 일이었다. 전쟁의 기본은 나의 강한 면으로 상대방의 약한 면을 치는 일이다. 우리는 저들에 비해 압도적인 숫자를 가지고 있어. 헌데 그런 식으로 굳이 각개격파를 자처한다? 만약 천무십칠성이 온전히 다 모였다고 가정해 보아라. 그 싸움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무림의 고수만 해도 그렇다. 하물며 수준이 조금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황실의 고수들까지 더해졌다면? 결과는 명약확관하다.”
-이 놈이 개소리를 아주 길게 늘어놓는구나.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나는 냉정하게 판단을 한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번 전투에서 패배하더라도 전쟁에서 이기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했다. 싸움에서 위태롭지 않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를 아는 것이다. 무한에서 우리가 그런 위기에 처했던 것은 결국 지피(知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를 아는 우두머리가 필요했다.”
“그게 맹주님이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욕심이 있어 굳이 이런 맹주라는 귀찮은 자리까지 앉았겠느냐. 이미 대 남궁세가의 가주 자리까지 아들에게 내어준 내가 말이다. 안 그렇더냐?”
-내어······줘?
그 어처구니없는 뻔뻔함에 파검이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다가올 전쟁을 위하여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준비하고 있건만 여전히 저들은 적이 얼마나 강대하며 간사한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무림을 하나로 모은다는 것이 이토록 힘들 줄이야······. 하기사······. 나도 뭐라 할 말은 없긴 하구나. 당장 내 집안 관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윽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검왕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그 얼굴과 눈빛만 보고 있자면 오직 중원의 미래만을 생각하는 무림 맹주의 무거운 짐이 생생하게 눈에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떠냐. 물론 당시에는 미미하여 그것의 위험을 나만큼 느끼지 못했겠지만 그래도 그날을 함께 경험한 사람으로서 나를 도와줄 생각은 없느냐?”
“······.”
“그래, 망설여지겠지. 고작 약관을 조금 넘긴 나이에 초절정이라니. 스스로의 미래가 얼마나 창창하게 느껴지겠느냐. 헌데 무림맹에 와서 봉사하라니 갑갑하겠지. 하지만 잘 생각해보아라. 내 나이도 벌써 일흔이 넘었다. 이런 내가 맹주를 한다면 대체 얼마나 하겠느냐. 기껏해야 앞으로 마교와의 싸움 정도나 준비할 수 있을까. 물론 네가 화산파로 돌아간다고 해도 중한 역할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넌 삼대 제자다. 화산의 장문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대 제자들이 물러날 시기는 되야 가능하다는 말이지. 하지만 무림맹이라면?”
남궁벽이 최선을 다하여 운호의 욕망을 자극했다.
그는 생각했다. 아직 어린놈에게 이만한 제안이면 혹할 수밖에 없다고. 본래 어린 놈들의 공명심이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던가. 심지어 이 녀석은 사고무친의 고아에 특별한 뒷배경도 없는 놈이다. 차기 무림 맹주를 언질만 해줘도 덥썩 무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리고 그런 남궁벽에게 운호가 물었다.
“네. 그날 참 많은 사람이 죽었지요.”
“그래, 거기서 죽어선 안 될 사람들이었다. 무신 모용 노사부터 공조 대사, 벽산 진인, 팽가놈. 그리고 화산의 두 선배까지. 뭐, 좌가 놈도 거기 말고 다른 곳이 더 죽기 좋은 곳이었을 게다.”
“그리고 그 외에도 참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래, 절정 고수가 대체 몇이나 죽었더냐. 쯧. 60년 전에 활불이 청해대장군부의 절정 고수들을 싹 쓸어버리고 거기가 제대로 기능하기까지 걸렸던 시간을 생각해보면 중원도 우리 세대가 다 물러난 이후가 참으로 암담하기 짝이 없을뻔했다. 결국 초절정 고수로 올라설 수 있는 토양 자체가 파괴된 셈이니까. 그나마 너와 같은 아이가 나타났으니 참으로 다행이라고 봐야겠지.”
“맹주님의 손녀도 그날 참변을 당했었죠.”
잠깐의 침묵.
남궁벽은 갑자기 이 녀석이 여기서 내 손녀 이야기를 대체 왜 꺼내는건가 고민했다. 그리고 곧바로 생각해냈다.
아 그리고 보니 이 아이 내 손녀와 뭔가 연분이 있었다고 그랬나? 강이 그 녀석이 외인이 아니라고 싸도는 것도 뭐 그런 인연까지 다 계산해서 그러는 것인가? 쯧, 어리석기는. 젊은 시절이야 계집 때문에 잠깐 혈기를 부릴 수 있지만 결국 사내는 꿈과 야망으로 움직이는 것이거늘.
“아, 그랬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저 집안에 얌전히 있었으면 그런 일도 없었을 것을. 아, 그러고 보니 이제 약관도 지났으면 슬슬 일가를 이룰 나이도 된 것 같은데, 사내가 일가를 이루려면 그래도 번듯한 뭔가가 있어야지. 무림맹의 대주 자리 정도면 충분히 번듯할 것 같은데. 안 그런가?”
이건 단순히 말을 못 하는 것일까.
아니면 상대방의 감정 따위는 헤아리지 않는, 아니 어쩌면 헤아릴 필요가 없었던 사람이기 때문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운호가 이 노인을 대접해줄 이유 따윈 없다는 점이었다. 본인 스스로가 남궁혜의 할아버지이기보다 그저 무림맹의 맹주라는 명찰에만 목을 매고 있거늘 굳이 대접해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쉽게도 아직 일가를 이루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요. 게다가 무림맹의 대주 자리 정도는 딱히 번듯하지도 않군요. 맹주 정도 된다면 몰라도요.”
“뭐, 뭐라고? 자네 지금 뭐라고 한 건가?”
“금의위의 교위. 대장군부의 오천인장. 모두 제가 경지에 오르기 전에 거쳐 간 자리들입니다. 심지어 영무결 대장군, 아니 이제 곧 서평왕이 되실 테니 전하라고 불러야겠군요. 그분께서도 자신의 여식, 혹은 손녀와 결혼하여 서평왕부를 이을 생각이 없는지를 여쭈셨었습니다. 헌데 그런 저에게 무림맹 맹주라면 몰라도 고작 무림맹의 대주라니요. 급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운호의 말에 남궁벽이 크게 당황했다.
금의위 교위나 오천인장이라면 또 모르겠으나 군왕이라니. 그것도 어디 시골의 왕부가 아니라 평왕위(平王位)라면 천하에서 황제 바로 다음 가는 자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
남궁벽의 그 당황하는 모습에 파검이 신을 냈다. 저 뻔뻔한 놈이 당황이라니. 참으로 보기 드문 광경이다. 저 녀석은 자신이 패배해놓고도 아무렇지 않게 무승부라고 우기는 뻔뻔한 녀석이다. 심지어 본인은 진지하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이 더 화가 난다.
남궁벽의 당황으로 흔들리던 눈동자가 진정됐다.
과연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할까? 파검이 흥미진진한 마음으로 그의 입을 주목했다.
“어린 친구가 증거가 없다고 너무 막 질러대는군. 뭐 대장군부의 오천인장? 그래 좋네. 그럴 수 있지. 어차피 중앙관제도 아니고 서쪽의 척박한 땅이니 고작 절정만 되도 그런 걸 줄 수 있겠지. 하지만 차기 서평왕이라니. 하하하. 뭐 청해 대장군부가 평왕부로 승격하는 것부터 비약이라지만 그럴 수 있다고 치자고. 하지만 굴불신마 영무결이라면 자식들 많기로 소문난 양반 아니던가. 그의 여식이나 손녀 가운데 하나와 혼인했다고 후계자 자리를 약속받는다라. 그냥 가볍게 던진 농담을 너무 진지하게 받는 경향이 있나보군. 그에게 아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알고 하는 이야기인가? 하하하.”
짐짓 호탕하게 웃던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래, 좋네. 좋아. 자네의 포부가 그토록 큰 것은 내 잘 알겠네. 대주 자리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말이겠지. 총사 자리를 주겠네. 물론 현재 편제상으로는 그런 자리가 없긴 하지만 화산파의 제자에 초절정의 고수라면 없는 자리를 만들어라도 줘야지. 위치는 총군사와 동급. 나의 직속으로 대주들보다 한 위계 높은 자리일세. 어떤가.”
과연 파검의 설명 그대로다. 정신세계가 범상치 않다. 말만 섞어도 화가 난다.
그러나 상대는 무림맹의 맹주이며 강호의 명숙이다. 무엇보다 이 인간은 무려 초절정의 고수다. 그가 상대해야 하는 마교. 특히 대제사장은 고양이의 손 하나라도 빌려야 할 만큼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한다.
“아무래도 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군요. 너무 완곡한 거절이라서 그랬나 봅니다.”
-응?
“모두가 목숨을 거는 자리에서 홀로 도망친 배신자. 그것을 지피지기라는 말로 억지로 포장하려는 비겁자. 타인을 재는 기준과 스스로를 재는 기준이 다른 인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오직 스스로의 안위와 명예. 무엇보다 무림인에게 가장 중요한 무력까지 저보다 약한 그런 사람의 아래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 따위는 조금도 없습니다. 전 제 윗사람이 존경할만한 사람인게 좋아서요. 게다가 심지어 직전 직장의 상급자는 인간적으로라면 몰라도, 무인으로서는 존경할만한 대상이었거든요.”
지금 이 녀석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도를 넘어선 폭언에 한순간 남궁벽의 머리가 운호의 말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잠깐의 정적.
.
.
.
-콰과과과과과과과광!!!!
오랜 세월. 역대 남궁 세가 가주들의 흔적이 오롯하게 남아있던 고풍스러운 집무실이 단박에 터져나갔다.
“이 노오오오오오옴!!”
붉게 달아오른 얼굴.
한 손에는 금빛으로 일렁이는 제왕의 검.
남궁벽이 운호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