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역대급 천재-205화 (205/288)

205

탄생(11)

무림맹주 검왕 남궁벽.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린다. 좋게 보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물론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추종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을 가지고 있다지만, 남궁벽만큼 그것이 극명하게 갈리는 이도 드물다.

하지만 아무리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한 가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무공이다.

검왕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그는 천무십칠성. 아니, 무한에서의 사건 이후 이제는 열한 명밖에 남지 않은 강호를 대표하는 고수들 가운데 하나다.

아주 가볍게.

약간의 따끔한 가르침.

물론 그 가르침의 대상이 손자라는 점은 참으로 유감이다. 하지만 저 못돼먹은 불효자식 놈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는 손자에게 약간의 가르침을 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다시 생각해보면 손자놈에게도 딱히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이제 막 경지가 올랐으니 자만하기 딱 쉬운 시기 아니던가. 하늘 위의 하늘. 무공의 세계에는 끝이 없음을 미리 체감하게 하는 것도 아주 좋은 가르침이 되겠지.

치켜들었던 검을 내리 긋는다.

눈에 빤히 보이는 그 단순한 동작에 드높은 무학의 이치가 섞여 들어갔다. 고작 그 한번의 칼질에 담긴 의미가 인간의 뇌가 한번에 처리 가능한 정보의 양을 아득히 넘어섰다.

불가해(不可解)

이해를 벗어난 압도적인 정보량의 홍수 속에서 그들의 뇌가 선택한 것은 외면이었다. 분명 검왕의 검은 그저 그어 내려왔을 뿐이지만, 그들의 감각에서 검왕의 검은 마치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갑자기 코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남궁철은 달랐다.

그의 코에서 –주르륵 한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눈의 흰자위에 시뻘건 핏줄이 섰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남궁벽이 내리긋는 장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쾅!!!

“막아?”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대견함? 그래, 내 핏줄이 저만한 성취를 보이는데 대견한 마음이 안 들 수는 없다. 하지만 그보다 남궁벽의 마음에 더 크게 다가온 것은 부끄러움. 그리고 분노였다.

지난 무한에서의 일은 무림의 정말 많은 이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무려 여덟이나 되는 초절정 고수와 수백의 절정 고수가 모조리 한 사람에게 당했다.

물론 엄밀히 따져보면 천급에 다다른 마인들이 다수 있었다지만, 워낙에 대제사장의 위용이 대단했던 탓에 완벽하게 묻혔다.

보통이라면 내가 있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라고 외칠 자존심 강한 고수들 역시 이번 일에 대해서는 감히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날 처참하게 당했던 무신 모용경이 누구인가. 권신 청무진인과 함께 천하제일인으로 꼽히던 초절정의 고수 아니던가. 게다가 거기에서 한술 더 뜨는 것이 파검 좌부원의 경우 우화등선까지 보여줬음에도 결국 마교의 대제사장을 처치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남궁벽에게는 바로 그 점이 더 큰 문제로 다가왔다.

파검 좌부원의 우화등선.

파검과 검왕의 이야기는 중원의 무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

검왕 남궁벽은 평소 그것을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해왔다. 어디 길거리의 거렁뱅이 놈과 자신을 비교한다고? 그저 녀석이 운이 좋아 두 번 비겼다는 이유만으로? 내 언젠가는 기필코 수준의 차이를 똑똑히 알려주고 말겠다.

헌데 그렇게 검왕이 한 수 아래로 깔아보던 녀석이 뜬금없이 우화등선을 해버렸다. 심지어 우화등선을 하기 전 보여줬던 무공 역시 감히 그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그렇기에 검왕 남궁벽이 당시 느꼈던 그 굴욕감은 보통의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그리고 그날의 혈사 이후로 벌써 4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지금 남궁벽이 보여준 일 검은 바로 그날의 싸움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낸 절초였다. 물론 지금 이 일 검이 전력을 다한 것인가 하면 그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저 망할 자식놈과 이제 막 경지에 오른 손자에게 내리는 따끔한 교훈이었지 손자가 크게 다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감히 그런 어른의 마음도 모르고 주제넘게 공격을 막아낸다고?

아들에게 가주 자리를 뺏기던 때가 떠올랐다.

물론 좋은 말로 물려줬다고 하고 있긴 하지만, 그건 명백한 찬탈이었다. 멍청한 가문의 장로들부터 지금은 죽은 아내까지. 뭐? 이대로라면 가문을 말아먹겠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무가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무력. 오직 무력이다. 기껏해야 돈놀이 좀 할 줄 안다고 훌륭한 가주라고?

지금 앞에 선 손자놈을 봐라.

저만한 무공의 재능을 갖췄음에도 어린 시절 쓸데없는 학문 따위를 익힌다고 허송 세월을 보내버렸다. 만약 그때 검왕 자신의 말처럼 오직 무공에만 몰두했더라면? 화산의 애송이 대신 이름을 날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

그 마음이 검에 담겼다.

남궁철이 크게 호흡했다.

파검 좌부원은 우화등선 하기 직전 그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전달했다.

그것은 특정한 검술이 아니었다. 그가 전수받은 것은 천하제일을 갈구하던 무인의 평생이자 그가 걸어온 인생이었으며 그리하여 도달한 그의 철학이었다.

그렇기에 남궁철은 그것을 온전히 베껴낼 수 없었다.

저잣거리에서 태어나 삼류의 무공을 익히고 북방에서 목숨을 걸고 나뒹굴던 파검의 삶을 남궁철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가장 귀한 곳에서 태어났으며 처음부터 최고의 지원을 받았고 심지어 이등으로 밀려날 것 같은 상황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기 싫은 우연이 그를 일등으로 만들었으니까.

자신을 바라보던 그 아이의 눈동자를 기억한다.

남궁철은 그날로 학문을 그만뒀다.

안수. 그리고 해원?

그것은 자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독한 조롱이었으며 스스로에 대한 멸칭이었다. 그렇기에 남궁철은 파검의 삶을 동경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낸 그의 삶은 얼마나 거대한 가치가 있었는가.

그렇기에 남궁철은 그것을 온전히 베껴내지 않았다.

제왕은 그저 군림할 뿐이다.

제왕이 군림하는 것은 그가 제왕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다. 마치 지금 저 앞에서 검을 내리치는 그의 할아버지처럼.

제왕의 후예는 그것이 지독하게 싫었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익힌 무공 가운데는 저 파검의 파랑과 흡사한 무공이 존재했다. 제왕에 밀려 이제는 방계들이나 익히는 창천이 바로 그것이다.

남궁벽이 검을 내밀었다.

그것은 파검 좌부원이 젊은 시절 북방에서 펼쳐냈던 파랑검과 비슷하지만 달랐으며 남궁세가에 전해지는 창천검과도 비슷하지만 같지 않았다.

남궁벽이 내려친 검이 수십 차례 중첩된 남궁철의 검격을 바스러트렸다. 남궁철이 크게 다섯 걸음 뒤로 물러났다. 검을 쥔 손의 호구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이것이 남궁벽이 원하던 따끔한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던 것을 이뤘음에도 검왕 남궁벽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남궁세가 무공의 완성자였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저 검술은 창천이 아니다.

그는 파검 좌부원의 대적자였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저 검술은 젊은 시절 파검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어마어마한 모욕감이 느껴졌다.

파검이 남긴 문파가 망하고, 그 후손이 남궁 세가에 들어올 때는 만족스러웠다. 그는 그것을 파검의 완벽한 굴복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완전한 굴복이라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침탈이었으며 정복이라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지배했다.

감히!!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 하늘 찬란한 별빛이 검에 내려 앉았다.

초절정의 상징. 그에게 검왕이라는 이름을 내려준 제왕의 기운이었다.

“이 노오오오옴!!”

누군가가 말릴 틈도 없었다.

당연하다. 검왕 남궁벽은 남궁 세가의 유일한 초절정 고수다. 감히 누가 있어 분노한 초절정 고수를 막아설 수 있단 말인가.

-쾅!!!

압도적인 위력.

하지만 그 압도적인 위력을 품은 검은 원하던 곳까지 뻗어나갈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저 하늘의 별빛을 품은 검이 그 앞을 가로막았으니까.

“일찍 돌아왔구나.”

“형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운호였다.

그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무한에서 한 번 본 것이 전부이기는 했지만, 이 노인이 검왕 남궁벽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저 특징적인 주먹코는 몇 세대를 내려오건 변함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검에 실린 위력은 진심이었다. 아마 운호가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남궁철은 사망, 혹은 그에 준하는 부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손자를 죽이려는 할아버지가 있다? 그래, 물론 세상에는 자신의 혈육을 의복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당장 서쪽의 영무결만 하더라도 그런 인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다. 물론 거대한 권력 앞에서는 종종 그런 일들이 벌어졌지만, 그것 역시 권력이라는 명확한 목적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무림맹주이자 남궁 세가의 태상 가주인 남궁벽이 소가주 남궁철을 죽여서 얻을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외인은 가문의 일에 상관하지 말라!!”

남궁벽이 크게 소리쳤다.

아니, 단순히 소리만 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검 역시 운호를 향해 몰아쳤다.

설마 노망인가?

-저놈 평소 하던 짓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지.

파검이 강력하게 동의했다.

운호의 검이 남궁벽의 공격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막아냈다.

운호는 분명 초절정의 고수였다.

물론 그 수준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남궁벽 자신과 동등한 높이에 선 고수라는 뜻이다. 하지만 남궁벽은 그것을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이 어린 놈이 감히?”

그가 보기에 운호는 기껏해야 손자 뻘 되는 애새끼다.

어찌 자신과 똑같은 수준의 고수임을 인정할 수 있을까. 그의 얼굴이 한층 더 붉게 달아올랐다.

분노는 사람을 조급하게 만든다. 그것은 초절정 고수인 남궁벽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궁벽의 검은 엄정했다.

-쯧, 개발에 편자라더니.

저것이야말로 수많은 인간적인 결점에도 불구하고 파검이 남궁벽이라는 무인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남궁벽은 젊은 시절의 파검에게 최초로 넘어설 수 없는 아득함을 느끼게 만들었던 인물이었으며 그가 아득바득 그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운호의 검이 남궁벽의 검을 차단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남궁벽의 재능은 엄청났다. 단언컨대 초식으로 한정 짓는다면 파검은 그보다 뛰어난 재능을 딱 하나밖에 알지 못할 정도다.

바로 백운호다.

남궁벽의 검이 부릴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가 그의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검의 움직임, 무게 중심, 속도, 발의 위치. 손의 회전력.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변수들까지. 그 모든 것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그려진다.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기 이전에도 운호의 오성은 그것을 그려냈었다. 하지만 한 번에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리고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다르다.

검왕 남궁벽의 장점은 엄정한 초식에 있었다.

하지만 백운호 앞에서 그 장점은 더 이상 장점이 아니었다.

십수 합.

남궁벽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소리쳤다.

“무례한 놈!!! 어찌 화산의 제자가 남궁 세가의 일에 끼어든단 말이더냐!!”

파검이 그 외침에 실소했다.

졸렬하기는.

무공으로 해결이 안 되니 그제야 소리를 치는구나. 하지만 잘못 선택했다. 어디 네깟 놈이 구공으로 이 아이의 상대가 될까.

파검의 기대대로 운호가 입을 열려는 찰나.

“그 아이는 외인이 아닙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 군데 군데 묻은 검은 먹물의 흔적.

제대로 의관조차 정제하지 못한 채 달려온 남궁강이 여과하지 못한 분노의 감정을 담아 남궁벽을 향해 쏘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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