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탄생(5)
활불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진작에 이 현상을 ‘이해’했다.
이 세계는 현재 저 백운호라는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자신에게 연속적으로 느껴지는 이 시간의 흐름은 사실은 상당한 결락이 존재하리라.
저 아이의 이해할 수 없는 적응과 무위의 상승 역시 그 때문일 것이고.
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필요성을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막아?”
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대체 어찌한단 말인가.
-쿠과과과광!!!
초음속의 발길질이 산악을 두들겼다.
분명 녀석이 펼치는 검식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광활함을 보여준다. 아마 저것이 녀석의 심상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의념이겠지.
하지만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라고 했다. 그의 권각이 그와 같다.
산조차 뿌리 뽑는다.
검형이 만들어낸 거대한 산악이 흔들리고 우그러지며 결국 무너져내렸다. 그 무너짐 사이로 날카로운 검극이 목젖을 노리고 들어왔지만
-쾅!!!
이전의 그 어설픈 바즈라파니라면 모를까.
완성된 그의 육체가 이런 어설픈 공격에 무너질리 만무하다. 목젖에 부딪힌 운호의 검이 크게 휘어졌다.
거기서 활불이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마치 길거리의 차력사들이나 보여줄법한 황당한 광경이 초절정 고수들간의 싸움에서 재현됐다.
-쨍그랑
화산의 검을 닮은 그 검이 깨어졌다.
그리고
-콰앙!!!
활불의 주먹이 운호의 머리통을 바스러트렸다.
그리고 저 멀리 펼쳐진 산악은 여전히 웅장했다.
***
-우웩······.
헛구역질이 튀어나왔다.
끔찍한 감각이었다. 지금까지 몽원경에서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죽어봤지만, 머리가 바스러지고 눈알이 튀어나오는 경험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전까지 운호가 몽원경에서 상대했던 사람들인 증무진인과 파검은 검사였다. 몸이 베이는 고통과 박살이 나는 고통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싫은지를 고르는 것은 좀 웃긴 일이었지만, 그래도 굳이 고르자면 차라리 몸을 베이는 쪽이 더 나았다.
또한, 그들은 운호에게 검술을 ‘지도’한다는 명목으로 검을 나눴었다. 하지만 활불은 정말 철천지원수라는 말에 어울리는 기세로 달려들었으며, 될 수 있는 한 최대치의 고통을 주려고 노력했다.
파검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참으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몽원경에서 운호가 어떤 일을 경험하는 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매일 아침 저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대 좋은 꼴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인간이 무언가를 초월한다는 것은 가능하다.
실제로 저 먼 옛날의 불타, 그리고 가까이는 자기 자신까지도 인간을 초월하였으니까. 하지만 초월한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말은 저렇게 인세에 존재하는 이상 완전한 초월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운호는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기공이라는 방식이 완성되기 이전. 수많은 고행자들이 스스로를 고통으로 밀어 넣어 육체를 초월하고 정신적 탈각에 이르던 방식과 흡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운호가 매일 아침 보여주는 반응을 보자면 그가 경험하는 고통은 절대 현실의 그것에 뒤처지지 않는다.
즉 운호는 매일매일 꿈에서 한번씩 고통스러운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후우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는 이상 초월할 수 없다. 스스로를 초월자라 자청하던 활불 역시 마지막 순간 고통 앞에 정신을 놓아버렸다.
운호는 매일매일 그런 고통을 경험한다. 그럼에도 저 아이는 그저 한 번의 심호흡으로 자신을 가다듬고 다시 살아간다.
고작 스물한 살.
파검은 그것이 너무나도 슬펐다.
이른 아침의 가벼운 수련.
그리고 남들이 모두 식사를 할 때 단환 하나를 섭취한 뒤 그 수련을 이어갔다. 밤 사이 있었던 격전이 그의 머릿속에서 산산이 분해됐다.
수백, 수천의 경우가 반복된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극복하는 기교들이 머릿속에서 펼쳐진다. 하지만 상대 역시 쉽지 않다.
운호는 자신과 상대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종종 활불은 그 객관을 뛰어넘는 번뜩임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현실에서 운호가 상대했던 활불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천재성이었다.
몽원경에서 활불을 상대하고 나서야 운호는 어째서 활불이 저 마교의 대제사장과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하는 괴물로 평가받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게 본신의 실력이 모두 발휘되는 상태도 아닐 확률이 높지······.’
지금까지 몽원경에 거주했던 이들은 언제나 힘의 제약을 받아왔다.
그것은 그 세계에 적용되는 일종의 법칙이었고, 운호가 생각하기에 활불이라고 그것에서 크게 벗어났을 것 같지는 않았다.
증무 진인 같은 경우 딱 운호와 같은 수준.
파검 좌부원 같은 경우 혼원단을 섭취 이전에는 비슷. 그리고 그 이후로는 어느 정도 제약이 풀렸었다.
“백의 크기인가?”
-응? 백의 크기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그게 그러니까······.”
운호가 대답을 하려는 찰나.
내문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를 안내하는 남궁세가의 무사였다.
“백 공자님. 여기 계셨군요. 출발할 준비 끝났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오늘은 조금 서두르시면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장원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금방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열여섯 마리의 준마.
과연 천하 사대 상단인 한상의 실질적인 소유주라고 하더니, 그 자금력이 범상치 않다. 열여섯 마리의 말 모두 최근 며칠 강행군으로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털에 반지르르하게 흐르는 윤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최소 금자로 수십 냥 이상은 줘야 하는 명마들이라는 뜻이다.
말에 올라타 길을 재촉했다.
이만한 무리가 관도를 통해 빠르게 이동하는데, 특별히 그들을 알릴만한 증표를 앞세운 것도 아닌데, 아무도 정체를 묻거나 제지하지 않는다. 남궁 세가의 위세다. 안휘성에서는 그야말로 왕가가 부럽지 않다.
“조금 기대되는데? 남궁 공자가 애 아빠라니 말이야.”
강아현의 이야기에 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한에서 남궁철이 보여줬던 그 모습들은 참으로 재밌었다. 저것이 좋은 집안에서 사랑받고 자란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구나. 하고 감탄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리고 동시에 가슴 한 구석이 찌르르하게 아려왔다.
남경으로 가는 길.
안휘성이 그 길목이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남궁세가를 들렀다 가고 싶지는 않았다. 남궁철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나고 자란 곳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저 멀리 길게 펼쳐진 담벼락이 눈에 들어왔다. 길이는 길었지만, 그 높이는 높지 않았다. 그저 경계를 나눈다는 의미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자신감이다.
감히 안휘성에 누가 있어 남궁 세가의 벽을 넘을 수 있겠냐는 자신감.
그리고 그 벽 너머에서 누군가가 빠르게 뛰어올랐다.
“소가주님!! 체통을!!”
“체통은 무슨!! 의동생이 찾아왔는데 버선발로 나가보는 것이 형님 된 의리지.”
헤어지기 전과 비교하여 외형적으로 크게 달라진 것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만만함이 가득한 잘생긴 얼굴. 그리고 큼지막한 주먹코.
버선발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그래도 의관은 모두 정제된 상태였지만 그래도 그 행동에는 다급함이 가득했다. 대문 대신 담벼락을 넘어 달려나올 정도로 말이다.
“운호야!!”
“형님.”
달리는 말을 잔등을 치고 날아올랐다.
“대체 이게 얼마 만이냐. 연락도 잘 안 되고. 걱정이 되려던 참이었는데······.”
“죄송합니다. 워낙에 많은 일들이 있었던 터라.”
“아니다. 아니야. 나도 소식은 들었다. 지금 온 강호가 모두 네 소문으로 떠들썩한데 그걸 못 들을 수는 없지. 그래, 경지에 올랐다면서. 크, 하여간 내가 의동생 하나는 잘 뒀다니까. 처음 봤을 때부터 될성부른 떡잎이다 싶었다.”
운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첫 만남은 썩 유쾌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미 이 양반의 머릿속에서는 그 유쾌하지 않았던 첫 만남조차도 자체적으로 보정이 된 것 같았다. 운호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운호보다 조금 늦게, 강아현과 두 절정 고수가 도착했다.
“남궁 공자, 오래간만이네요.”
“강 소저? 맙소사!!”
남궁철의 두 눈이 커졌다.
이제라도 기억이 난 것일까? 그들의 첫 만남은 강아현에게 찝적대려는 남궁철의 시도로 시작됐었다는 것을?
“성취가 있었군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헌데 남궁 공자도······.”
강아현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남궁철은 본래 그 느껴지는 기도가 절정에 육박했지만, 절정이 아닌 모호한 상태였다.
남궁세가 가전 무공의 특징이 그러하다.
“네, 약간의 성취가 있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호함이 더 커졌다.
분명 직감적으로는 절정의 경지인 것 같지만, 느껴지는 기도는 오히려 조금 줄어들었다. 헌데 그게 또 반박귀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대체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자자,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죠. 운호 너는 여전히 그 벽곡단만 섭취한다지? 내가 그럴 줄 알고 물이라도 아주 좋은 놈을 준비해뒀으니 가서 냉차라도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밀린 이야기도 많고, 아 맞다. 내 안사람도 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더라.”
-그래, 나도 얼른 오래간만에 안사람 얼굴이나 좀 보고 싶구나. 평생 나만 보고 살아오던 사람인데, 내가 죽었다고 시름시름 앓아누운 것은 아닌지······.
물론 아니었다.
장원 안으로 들어간 그들을 기다린 것은 좌부원의 부인인 공 대부인이었다. 남궁철은 안사람과 아기를 데리고 오겠노라 안채로 달려갔고 그 사이 공 대부인이 운호에게 말을 걸어왔다.
“백 공자. 그때의 일은 참으로 고마웠네. 덕분에 이렇게 살아 증손주 얼굴도 보게 됐구만.”
“아닙니다. 좌노사께서 중원에 베푼 은혜에 비하자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은혜는 무슨!! 그 영감, 그냥 강한 상대가 있으니 신나서 싸운거겠지. 겸사겸사 투자도 이상한 곳에 해버렸으니 그것 좀 어떻게 메워보려고. 가끔은 나한테 잔소리 듣는 게 무서워서 저기 높은 곳으로 도망간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니까.”
-끄응······.
당시에는 워낙에 급박한 상황이고 경황이 없어 제대로 대화도 나누지 못했지만, 이렇게 마주한 파검의 안사람. 공 대부인은 참으로 호탕한 여장부였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이목구비의 흔적으로 보자면 젊었을 적에 파검이 그 미모에 반해 졸졸 쫓아다녔다는 이야기가 충분히 납득이 된다.
“지금은 그러면 이 장원에 머무시는 겁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 양반의 채권이 모조리 휴지조각에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몇 달 전에 잠깐, 광서대장군부에서 마교의 세력 하나를 소탕했을 때, 채권 가격이 올랐던 적이 있거든. 그때 채권을 일부 정리한 돈으로 근처에 작은 장원 하나를 구매했다네. 뭐 다 늙은 할망구 하나에 과부 하나. 그리고 제자 몇 명이 머물기에는 충분한 장원이지.”
“다행입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남궁철이 품에 작은 포대기 하나를 안은 채,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