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탄생(4)
남경으로 향하는 길.
운호는 아현에게 화산파로 떠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아버지와 떨어져 목숨의 위기까지 경험해가며 남았던 그녀다. 그토록 또렷한 마음이다. 그렇기에 여기서 그녀에게 화산파로 떠나라는 말은 그녀에 대한 배려가 아닌 모욕이라는 점. 운호 역시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갑갑했다.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이다. 몸과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또한 운호의 나이는 이제 스물한 살. 사내로써 가장 왕성할 나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럴 때마다 편마가 떨쳐낸 기운의 여파. 그래, 고작 그 기운의 작은 여파에 피곤죽이 되어 사라졌던 연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참 운호와 검을 나누던 아현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운호야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는데?”
“옛날?”
“네가 종화랑 싸워 이기고 종화가 씩씩 거리면서 네 숙소로 매일 찾아왔던 때 말이야.”
“아······.”
고작 오륙 년 전 일이었지만 이제는 너무 아득히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래, 그때 참 좋았지.”
“그러고 보니 운호 넌 종화에 관련된 소식 뭐 들은 거 없어? 연락 따로 온 거라든지.”
운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때 이후로 한 번도······.”
무한 혈사 당시 종남파는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애당초 무한에서 무림맹의 회합이 열렸던 것 자체가 사문의 큰 어른이었던 태을검선의 사망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종남은 자신들의 주력이라고 할만한 고수들을 대거 참석시켰었다. 물론 그런 싸움을 예상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이 여기에 그만큼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일종의 표시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최악의 한 수가 돼버렸다. 절정의 무인은 한 개 현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인재들이었지만 그 싸움에서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 채 스러졌다.
결과적으로 종남은 현재 봉문을 선택했다.
물론 공식적으로 그들이 봉문을 선언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산문을 나오는 제자들이 사라졌고 외부에 어떠한 의견도 투사하지 않았다. 심지어 무림맹에도 제자를 파견하지 않을 정도였다.
“정 궁금하면 가는 길에 잠시 들러볼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녀는 종화의 마음을 모두 알 수는 없었다. 강아현은 그 자리에도 없었고, 종화와 같은 입장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면 분명 당시 종화는 운호에게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열일곱 처녀가 자신의 사랑조차 접어버릴 결심이란 대체 얼마나 단단한 것일까?
아현이 고개를 저었다.
“두 분이 뭘 그리 속닥이고 있소.”
“어허, 당아. 청춘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는 데 끼어드는 건 좋은 버릇이 아니라고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왕효가 장당을 나무랐다.
아니, 사실 이건 나무랐다기보다는 나무람을 가장한 놀림에 더 가까웠다. 입가를 씰룩거리는 꼴이 누가 봐도 확실한 놀림이다.
운호가 곤란한 표정으로 물었다.
“두 분 정말 따라오실 생각이십니까? 그냥 지금에라도 돌아가시는 것이······. 대장군께서도 모두 없던 일로. 아니, 오히려 활불을 제거한 공로를 인정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공로는 무슨. 지금에야 그렇겠지. 하지만 이제 끈 떨어진 연 신세인데 올라봐야 얼마나 오르겠소. 어차피 거기서 공자를 따라가겠다 선택했을 때 우리 인생은 결정된 거요.”
“당이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미 몇 차례나 말씀을 드렸지만, 애당초 저희의 목적은 군문에 있지 않았습니다.”
운호가 녜룽고원에서 대장군부를 구원하기 위하여 달려갈 때, 그들은 결단을 내렸다. 운호를 따라가기로.
매우 과감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운호에 대한 정을 떠나 그들 나름의 합리적인 판단이 존재했는데, 당시 그들은 이런 대화를 나눴었다.
“형님 이게 정말 맞는 거요?”
“열일곱에 절정이다. 게다가 지금 보여준 무위를 좀 보거라. 백 년 전 태조 황제도 처음에는 탁발승이었다. 그에 비하자면 백 장군의 위세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지. 게다가 무공 역시 태조 황제의 역사적인 성취와 비교해도 그리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태조 황제는 황위에 오르고 자기를 따르던 공신들과 그 친인척을 모조리 죽였잖소.”
“크흠, 그거야 물론 그랬다지만 백 장군은 태조 황제가 아니니까. 어쨌거나 될성부른 떡잎은 초창기에 투자를 해야 하는 법이다. 어차피 우린 여기에서 계속 굴러 봐야 지금보다 높은 자리에 앉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당시 그들이 그렇게 과감한 도박수를 던질 때 운호의 성취는 ‘고작’ 절정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무려 초절정. 어떻게 생각하면 그들이 던진 도박이 매우 놀라운 배율로 돌아온 셈이다. 헌데 청해 대장군부를 그만뒀다고 거기서 멀어진다?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말은 편히 하셔도 좋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상관과 부하가 아니니까요.”
“그러면 그럴······.”
-꾸욱
왕효가 장당의 옆구리를 꾸욱 눌렀다.
“아닙니다. 한 번 수하는 ‘영원한’ 수하 아니겠습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 이전처럼 편히 대하시지요. 그나저나 얼마 전에 알려주셨던 그 부분 있잖습니까 그게 좀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어서······.”
게다가 사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운호와 함께 하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큰 이득이기도 했다. 운호는 이전부터 무공을 지도하는데 아낌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것이 독문 무공을 가르쳐준다거나 새로운 무공을 전수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초절정의 고수에게 무공에 막히는 부분을 지도받을 기회가 어디 흔하다던가?
그렇다고 그들이 단순히 운호에게 도움만을 받았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대문파의 장로들이 괜히 제자들을 끌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잡일들이 필요한데 그들은 직접 나서서 그런 일들을 처리했다. 또한, 그들의 동행은 강아현에게 더할나위 없이 큰 도움이 됐다. 이제 막 절정의 경지에 오른 그녀에게 그들은 매우 좋은 비무 상대였다.
청해에서 남경.
중원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근 삼 개월에 걸친 긴 여정이 그렇게 이어졌다.
***
-응애!!!!
안휘성 합비현 인근의 거대한 장원.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초조한 표정으로 마당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던 주먹코의 사내가 황급히 방문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차마 방문을 열지는 못하고 망설이는 찰나,
-덜컥
방문이 열리고 백발에 주름 가득한 노파가 군데군데 핏물이 묻은 옷을 입은 채 얼굴을 내밀었다.
“어떻게 됐는가? 산모는? 아이는?”
“흘흘흘, 모두 건강하십니다. 도련님이 소가주님을 아주 쏙 빼닮았습니다.”
산파가 흐뭇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십사 년 전.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서 똑같은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두뼘도 채 되지 않던 시뻘건 꼬물이가 저렇게 훌륭하게 장성하여 제 아비와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겠는가.
“고맙네. 고마워. 내 그러면 지금!!”
“아직은 안 됩니다. 정리가 끝날 때까지는 외부의 출입을 삼가는 것이 법도입니다.”
“끄응······.”
어쩌면 저런 모습까지 제 아비를 쏙 빼닮았을꼬.
“잠깐 얼굴 보는 것도 안 되겠나?”
“네, 안 됩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가주님도 지금 소식을 기다리고 계실터이니 한 번 찾아뵙는 것도 좋을성 싶습니다. 물론 가노들을 시키셔도 괜찮지만요.”
“아니네. 이런 좋은 소식을 남이 전하게 둘 수는 없지. 내가 직접 찾아뵙도록 하겠네.”
주먹코의 사내.
남궁철이 고개를 저었다.
최근 그의 아버지인 남궁강은 할아버지의 폭주 덕분에 매일 매일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이런 반가운 소식을 듣는다면 잠시라도 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소가주님!!”
“어, 운학아. 어쩐 일이냐. 설마 아버지가 보내신 거냐?”
이제 막 일류에 접어들었을까?
젊은 무사 하나가 남궁철에게 다가왔다. 창궁대의 무사라고 하기에는 그 무위가 매우 부족했지만, 지난 무한에서의 사건 이후 빈 자리들이 워낙에 많아졌다. 게다가 이런 현상은 남궁 세가만의 일은 아니었다. 백 명이 넘는 절정 고수가 죽거나 크게 다쳤다. 일류는 그의 몇 배가 변을 당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네? 가주님이요? 아뇨. 아닙니다. 그 일전에 소가주님께서 제게 따로 명하셨던 일 때문에······.”
“내가 명했던 일?”
남궁철이 잠시 이마를 찌푸렸다. 그는 최근 부인의 임신으로 다른 것에 도무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의동생분······.”
“아, 운호. 그래. 기억났다. 설마?”
“네, 지금 안휘성의 경계를 넘어오셨다고 합니다.”
좋은 소식은 연달아 온다고 했던가?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과 함께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의동생이 안휘에 들어왔다는 소식이라니. 남궁철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대접에 소홀함은 없겠지?”
“네, 미리 마중나갔던 비연대의 대원들이 잘 모시고 오고 있다고 합니다. 가주님께서도 특별히 지시하신 부분이니까요.”
“그래, 아차차.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지금 아버지는 집무실에 계시더냐.”
“네.”
“그러면 어서 거기로 가자. 운학아. 내가 아빠가 됐다.”
“네? 축하드립니다.”
***
“와, 형님. 남궁 세가가 안휘성의 실질적 주인이라고 하더니. 과연 듣던 것 그대로요.”
“그러게나 말이다.”
장당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연신 감탄을 이어갔다.
왕효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안휘성의 경계에 나와 있던 여덟 명의 무사들 가운데 일류의 고수가 넷이고 나머지 넷도 거의 거기에 근접했다는 것 정도는 사실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고작 마중을 위해 나온 무사들이라는 점. 그리고 머무는 곳마다 그 고장에서 가장 거대한 객잔을 통째로 빌려둔다는 것 자체가 남궁세가의 영향력과 부유함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확실히 우리가 선택을 잘 하기는 한 것 같소. 남궁세가라면 현재 무림맹의 맹주 자리까지 차지한 가문이잖소. 그런 가문 소가주의 의형제라니. 게다가 성을 지나간다는 소식만으로 이렇게 미리 마중까지 보내고 융숭한 대접을 해주다니.”
“현명한거지.”
“현명이요?”
“그래, 고작 스물한 살에 초절정이다. 천하제일인은 따놓은 당상이지. 사실 지금까지 성들을 지나치는 동안 다른 문파에서 이런 대접을 안한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물론 그들이 눈치 채기도 전에 우리가 지나오긴 했지만······. 뭐 그렇게 따지자면 남궁세가의 정보력 하나만큼은 대단하다고 칭찬할만하구나. 확실히 중원의 사대 상단 가운데 하나인 한상을 실질적으로 지배한다고 하더니······.”
“아니, 형님은 청해성에서 나랑 같이 짬밥 먹었는데 그런 중원의 정보들은 어떻게 이렇게 잘 꿰고 있는 거요?”
“그건 네 놈이 이상한 거다. 언젠가 중원에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이 정도 정보는 미리미리 습득을 해뒀어야지.”
“끄응, 에이. 모르겠소. 나는 복잡한 건 그냥 형님한테 다 맡길 테니 알아서 해주시구려.”
같은 시간.
-쾅!!!
운호가 활불의 주먹을 여덟 번 연속으로 막아냈다.
삼 개월. 아흔한 번의 죽음 끝에 얻어낸 성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