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탄생(3)
거친 삼베 옷으로도 그의 기상은 가릴 수 없었다.
이제는 실질적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도 없이 명실상부한 대장군부의 일인자가 된 굴불신마 영무결이 운호에게 물었다.
“마음을 돌릴 의향은?”
운호가 고개를 저었다.
굴불신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원망하지는 않으십니까?”
“원망? 설마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일이 운호 너 때문이라는 이야기인가?”
“그것뿐만이 아니더라도······.”
“기껏해야 절정 넷이다. 그깟 게 무슨 상관이라고. 게다가······.”
영무결은 차마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 못했다. 자식된 도리로서 어찌 그곳이 아버지의 긴 여정을 마무리하기에 가장 어울리는 장소였다는 말을 뱉을 수 있을까.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도 말이다.
운호를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이다. 그를 따라간 종자명을 원망하는 마음 역시 있었다. 그는 처자식을 의복과 같이 여기는 영웅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를 길러낸 스승이었으며 평생을 보고 자란 정신적 지주였다. 그런 이의 죽음 앞에서 어찌 담담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지난 며칠의 시간 속에서 그런 마음은 이미 다 정리됐다.
지금 영무결이 바라보는 것은 청해 대장군부, 아니 서평왕부의 미래였다.
“이곳에 남는다면 넌 나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라면 어쩌면 그 이상을 바라볼 수도 있을지도······.”
역심.
동창의 창위들이 들었다면 당장에 들고 일어날 만한 발언이 영무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말에 운호가 담담히 답했다.
“대장군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태조 황제인 목종께서도 마찬가지로 참으로 자신의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목종보다는 태조 쪽이 더 끌린다고. 그리고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거기에 도전해보고 싶으시다고요.”
영무결이 한 방 크게 맞았다는 표정으로 운호를 바라봤다.
“······. 그랬군. 그랬어······.”
물론 영보는 최초의 서평왕이 아닌 마지막 청해대장군으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마지막까지 거기에 도전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대장군부를 키웠고 영무결이라는 초인을 키워냈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후계에게 자신의 꿈을 맡기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무언가 커다란 고비를 하나 넘겼다고 생각했다. 목표를 이뤘다고 착각했지. 돌이켜보면 그것은 결국 나의 과업이 아닌 아버지의 과업이었는데 말이다.”
천마(天魔)
영무결은 스스로를 감히 천마라 칭한다. 제 6천을 지배하는 절대자가 고작 서평왕 정도로 만족해서는 꼴이 우습지 않겠는가. 굴불신마의 기세가 변했다. 물론 이전에도 좌중을 압도하는 절대자의 기도를 풍겼지만 지금은 거기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갔다.
“그래, 자신의 일은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법이지.”
영무결이 운호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건?”
“만련공방에 가볼 예정이라고 들었다. 공 어르신께 드리는 소개장이다. 워낙에 두문불출하는 분이라 이런 것 없이는 얼굴을 뵙기도 힘들 거다.”
과거 대장군 영보는 지나가는 말로 신검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매우 놀라운 이야기들이었다. 전설로 전해지는 간장검이나 막야검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이 시대 황실의 수호검이라는 황룡검에 관한 이야기까지.
현재 파검 좌부원이 머물고 있는 이 정답은 실로 기이한 검이었다.
대체 어떻게 몽원경에 머물던 파검이 이 검에 머물게 됐는지. 만약 그렇다면 지금 몽원경에 있는 활불 역시 갑자기 어딘가로 옮겨질 수도 있는 것인지.
당시 영보는 신검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로 ‘공 늙은이’라는 사람을 꼽았다.
남경에서 만련공방을 운영하는 장인으로, 영보가 확실히 콕 찝어 말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야기의 맥락으로 짐작하건데 이 정답과 흡사한 신검의 제작자다.
“감사합니다.”
운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는 무슨. 네가 여기서 해준 일들에 비하자면······.”
영무결이 말을 삼켰다. 훗날 뭔가로 보답하겠느니 하는 말은 뱉지 않았다. 이제 그는 수백만의 목숨을 책임져야 하는 군왕이 될 것이다. 책임져야 하는 것이 있는 사람이기에 그런 말을 쉽게 뱉을 수 없었다.
“그러면 언제 떠날 생각이더냐.”
“종 형님이 정신을 차리면 인사를 드리고 떠날까 합니다.”
그날의 싸움이 있었던지도 벌써 달포를 훌쩍 넘어 한 달에 가까워졌지만 종자명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혼절한 채로 보냈고 가끔 깨어나는 시간에도 그 의식이 명료하지 않았다.
아무리 인간을 초월했다고 해도 너무 심각한 상처들이었다. 활불의 그 강맹한 공격을 대부분 정면에서 받아낸 댓가였다. 운호 덕분에 목숨을 건지기는 했지만, 영구적인 후유증은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래······.”
영무결의 얼굴이 복잡했다.
그 복잡함이 종자명이라는 무인의 재능을 아끼는 군주의 마음인지, 아니면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온 종자명이라는 인간에 대한 안타까움인지는 영무결 본인도 알 수 없었다.
“그러면 이만 물러나보겠습니다.”
운호가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점점 멀어져가는 운호를 멍하니 바라보던 영무결이 자신도 모르게 홀로 읊조렸다.
“고맙다.”
처자란 본래 의복과도 같다. 닳거나 헤어지면 새로 사면 그만이다.
그래, 그럴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이 말은 그저 활불이라는 후환을 제거해준 고마움일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
“아현아.”
“아가씨.”
“함께 떠난다며?”
영현이 부러운 눈빛으로 강아현을 바라봤다.
그녀 역시 함께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영현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가치는 결국, 이 대장군부의 강력한 후계라는 데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 사건을 통해 더욱 더 강력해졌다.
대장군부의 수많은 혈육이 죽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경쟁하던 이들 가운데 목숨을 잃은 이들도 다수였지만, 그보다는 그들의 자식들이 모조리 죽어 나갔다는 점이 더 치명적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강아현을 훑었다.
그녀 역시 화산파라는 문파 내부에 가장 강력한 집단의 직계라고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배경을 떠나 그녀 자체로 빛이 났다.
단순히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절정.
옆에 백운호라는 터무니 없는 존재가 있기에 조금 가려졌지만 고작 스물한 살의 나이에 절정이다. 역사를 통틀어 그런 경우가 몇이나 됐던가. 당장 태조 황제만 하더라도 절정에 올랐던 것은 스물여덟이었으며 그녀의 할아버지인 영무결 역시 스물아홉에 절정을 밟았다.
물론 절정의 경지에 조금 이르게 오르는 것이 초절정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십대 초반에 절정에 오른 이들 가운데 젊은 나이에 비명에 간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열 중 예닐곱은 초절정의 경지를 밟았다.
“미안해요.”
“미안?”
영현이 자신의 허리에 척 손을 얹었다.
“설마 지금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단순히 강아현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 운호는 강박에 사로잡혀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저주나 다름 없었다. 마치 그녀의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가 서평왕부라는 이름에 사로잡혀있던 것처럼 운호 역시 그날의 참사에 사로잡혀있다.
복수.
마교의 멸망.
그 모든 것이 끝나기 전에는 그의 마음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스며드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리라.
“어려울 거야.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복수를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여기에 남아서 나와 결혼하고 왕위를 계승하는 거잖아. 개인의 힘은 한계가 있으니까.”
아무리 초절정 고수라고 해도 화산파의 일개 제자라는 신분보다는 서평왕부의 후계자. 혹은 서평왕이라는 신분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것은 조금만 생각을 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운호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심지어 영현이 직접 그것을 운호에게 이야기했음에도 그러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 끝까지 합리적인 대답을 하지 못했어.”
그저 운명이니, 예감이니 하는 추상적이며 모호한 이야기뿐이었다.
복수라는 거대한 목표에 매진하기 위하여 사랑을 거부하는 것인가.
더 이상의 사랑을 거부하기 위하여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설정한 것인가.
영현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풀 수 없는 매듭은 그 끝을 찾아 헤매는 것보다 칼로 끊어내는 것이 더 빠르고 편하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정답은 결국 마교의 멸망이다.
그것은 누가봐도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여자아이의 허무맹랑한 목표였다. 그것은 천하의 그 어떤 제국도 지금까지 해내지 못했던 일이다. 심지어 그 이유가 고작 남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니.
그렇기에 영현은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운호가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
이제 마흔을 목전에 둔 나이였음에도 주름 하나 보이지 않는 하얀 얼굴이 참으로 매끈했다.
“서안탐마동(西安探魔童).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다만 참으로 풍운을 몰고 다니는 아이로구나.”
천하를 통틀어 유일하게 그 유치한 이름으로 운호를 부르는 남자.
바로 스스로를 칠대세가의 지낭이라 칭하는 제갈첨이었다.
그는 지난 서안에서의 사건으로 오른 팔을 잃었다. 무인이 한쪽 팔, 그것도 무기를 쥐던 팔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실로 치명적인 일이었다. 양팔이 모두 멀쩡해도 절정에 오르는 것은 힘든 일 아니던가. 하지만 제갈첨은 그보다 다른 부분에서 더 큰 유감을 느끼고 있었다.
“끄응, 이건 아무래도 영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서신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지난 몇 년 왼손으로 글을 쓰는 것을 부지런히 연습했지만, 오른손으로 글을 쓸 때의 그 웅혼한 필체는 재현이 쉽지 않았다. 지금도 내리긋는 획에 힘이 영 부족하지 않은가.
“남경이라······.”
과연 무슨 일일까?
물론 짐작 가는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남경이라면 이번에 그와 함께 싸웠다는 은검귀조와 인연이 깊은 도시였다. 벌써 오십 년이 다 돼가는 이야기지만 지금도 남경의 유력자들은 은검귀조 박진문이라면 이를 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심지어 그가 초절정에 오른 것이 남경의 귀족들이 고용한 암살자들과 끝없는 실전을 겪은 결과라는 소문도 있을 정도다.
“우리가 남경 쪽에 투자한 게 뭐가 있더라······.”
그가 지나간 곳에는 언제나 뭔가 커다란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인간은 본래 과거로부터 배운다.
우연도 몇 번을 거듭하면 더 이상 우연이 아니다.
무림맹 부군사.
자칭하기를 칠대세가의 지낭.
제갈첨이 매의 눈으로 운호를 주시했다.
“형님!! 형님!!!”
“왜? 또 무슨 일이냐.”
“그러니까 맹주께서 공동을 방문하시겠다고······.”
“뭐? 공동을? 갑자기 거긴 또 왜?”
“이번에 노아회전(鲁雅會戰)으로 공동의 사람들이 많이 상했으니 그것을 위무하고 마교와의 싸움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독려하시겠다고······.”
“미치겠네. 장인어른은? 아무 말씀 없으시고?”
“그게, 차라리 공동에 외유를 다녀오게 두시는 게 다른 소란 안 벌이고 좋을 수 있다고······.”
무림맹주 검왕 남궁벽의 소식에 제갈첨이 뒷목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