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역대급 천재-196화 (196/288)

196화

탄생(2)

운호가 아현이에게 달려가던 날. 대장군부의 실질적 일인자인 좌장군 영무결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영웅이었다. 좋은 의미에서도 그리고 나쁜 의미에서도.

형제여수족 처자여의복(兄弟如手足 妻子如衣服)

처자식이란 의복과 같은 것이다. 자식은 또 낳으면 그만이다. 측실만 많이 두면 자식 따위 열이고 스물이고 얼마든지 낳을 수 있다.

한 고조 유방 이후, 시대의 영웅이란 이와 같은 비정함을 가져야 했다.

또한, 여기서 수족과 같은 형제란 실질적인 형제라기보다는 ‘인재’를 의미한다. 영무결에게 운호는 그러한 인재였다. 종자명은 또 어떠한가. 또한 그만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운호를 따라간 두 명의 절정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인재들이다.

하지만 그 반대에도 불구하고 운호는 길을 나설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직 좌장군 영무결이 대장군부의 ‘실질적’ 일인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운호가 대장군부로 달려간 이후 정말 짧은 시간 동안 녜룽 분지에서는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귀환하는 대장군부의 병력이 제법 눈에 띄게 줄어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병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뀌어 있었다.

우선 대장군부의 실질적 일인자인 좌장군 영무결은 이제 더이상 실질적 일인자가 아니었다. 흰색 머리끈으로 이마를 질끈 묶은 그의 얼굴에는 보기 드문 상실감이 진하게 떠올라있었다. 또한, 그의 앞을 호종하는 병사가 들고 있는 깃발 역시 좌장군을 상징하는 깃발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 명확했다.

대장군 영보의 사망.

그는 마지막 순간 운호의 편을 들어 주었다.

종자명에게 천살의 무공을 완성케 하고, 그것을 초월하는 길로써 살해가 아닌 활인을 제시한 것만 보더라도 그의 성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마인이었지만 그 이전에 인간이었고 그렇기에 마지막 순간 역시 인간다웠다.

그의 아버지 영균은 항거할 수 없을 만큼 강대했던 저 4대의 활불과 생사를 결했다. 하지만 영보는 달랐다. 5대째 활불은 그보다 많이 어렸고, 그의 아들은 스스로를 ‘천마’라 칭할만큼 재능이 넘쳤다. 어쩌면 그가 인간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환경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대장군 영보의 인생에서 생의 대적자라고 할만한 상대는 포달랍궁의 대장로인 니마 주걸이었다. 영보가 대장군부를 재건하고 자신의 아들인 영무결을 ‘천마’로 키워냈던 것처럼 니마 주걸 역시 포달랍궁을 건사했으며 5대째의 활불을 지금의 모습으로 키워냈다.

인생의 마지막에서 두 노인, 아니 두 남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웠다.

운호는 그 싸움을 보지 못했다. 그저 듣기로는 참으로 장엄한 싸움이었다고 했다. 싸움에 장엄함이라니. 참으로 실소가 나오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생의 마지막에서 유일하게 남은 생명을, 평생 경쟁해온 숙적과 함께 불태웠다면 어쩌면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거기서 마교가 등장했다.”

영무결의 장남.

이번 싸움에서 오른팔과 눈을 잃어버린 영초벽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말을 듣던 운호 역시 마찬가지로 인상을 찌푸렸다.

마교라니······.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물론 저 남쪽 십만대산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마교 역시 포달랍궁과 마찬가지로 중원을 숙적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적의 적이라고 하여 모두 아군이 될 수는 없다. 포달랍궁은 불과 백년 전만 하더라도 중원을 차지했던 원제국의 중심 세력 중 하나였다. 국사였던 활불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기득권 세력이었다는 뜻이다.

당시 마교는 지금 제국을 노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중원을 노렸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포달랍궁의 라마승들과 남쪽의 마인들은 신물이 날 정도로 싸움을 이어갔었다. 마교의 마인들 시선에서 장족과 한족은 크게 차이 없는 적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라마승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장 최근만 하더라도 운호를 잡기 위해 북으로 올라온 마인들이 장족의 마을을 약탈하고 수백의 사람들을 재미 삼아 죽이지 않았던가.

헌데 그런 그들이 손을 잡다니.

“도륜이라고 했던가? 활불을 가장한 놈이었는데 엄청난 괴물이었다. 절정고수의 창칼조차 거죽을 뚫지 못했지.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모두 그 녀석에게 속으셨지.”

-도륜이라면?

생전 파검의 마지막 기억은 무한에서의 그 일이었다. 쉽게 잊기 힘든 기억이다. 그리고 그 기억의 한 모퉁이. 분명 도륜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파검의 절기인 천하(天下)를 한쪽 팔로 막아냈던 거인이었다. 물론 그 댓가로 그의 한쪽팔을 썽둥 썰어내기는 했지만 당시 그 거인이 보여줬던 경지와 마교의 기이한 사술들이라면 잘린 팔을 복구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운호가 물었다.

“그뿐이었습니까? 고작 초절정 하나였다면······.”

“셋이었다.”

영초벽이 답했다.

그 역시 지금 운호가 하는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당시 대장군부의 전력은 고작 초절정 하나가 합류한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처리할만한 역량이 있었다. 심지어 활불이 빠진 자리 아니던가. 도륜이 대단한 고수였다고는 하지만 감히 활불에 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셋이라면······.

무려 세 명이나 되는 초절정의 마인.

운호가 황급하게 다시 물었다.

“혹시 채찍을 쓰는 자도 있었습니까?”

“편마를 묻는 것인가?”

편마라는 말에 마음이 끓어올랐다.

영초벽의 안색이 잠시 파리해졌다. 운호가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그는 이미 마음이 움직이는 것만으로 주변 환경에 영향을 주는 경지에 이르렀다. 운호가 순식간에 끓어오르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 죄송합니다.”

“아니네, 아니야. 자네 사정을 몰랐다면 또 모를까. 충분히 이해하네.”

영초벽의 눈이 빛났다.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목격하니 또 느낌이 다르다. 이제 얼마 후면 스물하나라고 했던가? 어쨌거나 아직 약관밖에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약관에 절정이라고 해도 깜짝 놀랄만한 일이거늘. 고작 약관에 초절정이라니.

탐난다.

“확실히······. 편마라면 모습을 보였었다네. 그자 역시 대단했지.”

-으드득

“어찌 됐습니까? 혹시 대장군께서?”

“아쉽지만······.”

영초벽이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그 도륜이라는 자와 한 자루 검을 쓰던 마인이 아버지를 상대했었다네. 그리고 그 편마라는 작자는 뭔가를 찾아다녔던 모양이야. 그 모습이 할아버지께 발각됐고 편마를 상대하려는 할아버지를 포달랍궁의 대장로인 니마 주걸이 막아섰지.”

-설마?

파검의 물음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었다. 이건 운호 자신을 찾아다닌 것이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운호를 향해 ‘아미타의 화신’이라고 불렀었다. 또한, 몽원경의 존재 목적이 마인이라는 점. 그리고 증무 진인 목운평이 백오십여 년 전 대제사장과 무언가 일이 있었다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그건 거의 확실한 사실이다.

“할아버지와 그자의 싸움이 벌어졌고 그 꼴을 본 아버지는 함정 따윈 없다 확신하고 도륜과 그 검마를 몰아쳤다네.”

-확실히 영무결이라면 그 정도는······.

도륜은 초절정의 고수였지만 무신 모용경에게 형편없이 밀렸었다. 심지어 파검이 평가하기로 영무결은 우화등선의 깨달음을 얻기 전 자신에 버금가는 고수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싸움에 편마가 합류했지. 하지만 아버지는 3:1의 싸움에서도 쉽게 밀리지 않으셨다네. 하지만······.”

니마 주걸과 대장군 영보의 싸움이 양패구상으로 끝났고, 한 걸음 늦게 곤륜의 후발대가 그 싸움에 합류했다.

편마를 비롯한 마인들은 제법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퇴각에 성공했으며 포달랍궁의 잔당들은 대부분 소탕됐다.

“피해가 조금 크기는 했지만······. 어쨌든 우리의 승리였지.”

조금 큰 피해라는 대목에서 영초벽이 자조적인 미소를 띄우며 자신의 오른손을 슬쩍 들어보였다. 어차피 초절정의 경지는 포기하고 있던 사람이긴 했지만, 이래서야 절정의 무위를 제대로 유지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그나마 그가 이렇게라도 웃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가족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확실히 영웅의 그릇은 아니군.

‘그딴 게 영웅이라면 그냥 영웅 안 하고 말겠습니다.’

박진문을 따르지 않았던 대장군부의 식솔 대부분은 죽었다. 특히 남자들의 경우는 모두 씨가 말랐다. 그나마 살아남았던 것은 몇몇 아름다운 여인들 뿐이었는데 그들 역시 그리 좋은 꼴은 보지 못했다.

물론 대장군부의 심처에서 보호받으며 살아왔던 고귀한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이 시대. 전쟁에서 약탈당한 쪽 여인의 삶이란 응당 그러한 것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쩔 생각인가.”

운호가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고민이라 판단한 영초벽이 은근하게 권했다.

“마지막 항명 때문에 아버지가 걱정이라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네. 물론 자네가 있었으면 조금 더 나은 결과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고작 그래봐야 절정의 고수 넷이었어. 그 넓은 전장에 절정의 고수 넷이 뭐 얼마나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겠나. 결과적으로 보면 덕분에 활불을 제거했고, 대장군부의 식솔도 상당수 살릴 수 있었으니 큰 이득이었지.”

“······.”

“무엇보다 아버지는 인재를 사랑한다네. 대장군부가 이만한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초절정의 고수를 벌할 리 만무하지 않겠나. 게다가······. 아버지의 나이도 이제 곧 환갑이야. 그리고 후계자라고 할만한 후손은······.”

영초벽이 말을 삼켰다.

하지만 뒤에 이어질 말은 너무나도 뻔했다.

달콤한 제안이었다.

포달랍궁을 이 정도로 박살 냈다. 그들의 터전은 이미 곤륜에서 한차례 짓밟았고 추수를 끝내고 나면 대대적으로 장족의 마을들을 소탕할 계획까지 이미 세워진 이후다.

앞으로 길어야 2, 3년.

청해 대장군부는 아마 서평왕부로 승격할 것이고 현 대장군 영무결은 초대 서평왕이 될 것이 분명했다.

“뭐, 내 딸을 두고 주변에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것 정도는 나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내가 살아봐서 잘 알고 있어. 반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야. 다행스럽게도 내 딸은 그 내면을 이 부족한 아비가 아니라 제 어미를 닮았지. 아주 단단하기 그지없다네. 무엇보다 나를 보게. 여인의 껍데기가 탐이 난다면 그저 측실을 들이면 그만이야.”

-흠, 또 이런 부분은 참으로 영웅의 기상이로구만.

‘그러면 평생 다른 여자는 꿈도 못 꾸셨던 어르신은 영웅 발 뒤꿈치도 못 따라가신 거군요.’

-어험, 나는 그저 나의 부인에게 만족했을 뿐······.

운호가 파검의 긴 변명을 무시한 채 영초벽에게 답했다.

“네, 현매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여기서 고개를 끄덕인다면 운호는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서평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마교를 멸절시키기에 더 좋은 방법일 수도 있었다. 개인의 힘이 단체의 힘을 넘어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굴불신마 영무결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싸움은 한층 더 쉬워질 것이다.

하지만 운호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예지에 가까운 그의 직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그가 이룩하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서는 이곳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저 먼 중원.

운명이 운호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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