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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역대급 천재-195화 (195/288)
  • 195화

    탄생(1)

    거대한 돌산.

    그리고 그 앞으로 펼쳐진 광활한 황야.

    활불이 당황했다.

    그는 영원을 살아가는 존재다. 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물론 이번 생의 마지막 순간, 비록 몇 가지 오류는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백사십 년쯤 전이었던가? 제국이 망국의 길에 접어들던 그 시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망국의 혼란을 이용하여 장족의 땅을 되찾으려던 독립투사. 핍박 받던 민족을 위하여 분노하던 한족의 어린아이. 그 긴 사연을 어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그저 한족의 어린아이는 자라나 그의 대적자가 되었고 그는 활불의 영원을 끊어버리기 위한 기틀을 만들어냈다.

    천살(天殺)의 무공.

    활불 역시 그것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그것은 애당초 전제부터가 잘못된 무공이기 때문이다. 활불은 영원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본 이들은 그것을 환생이라고 생각했다. 활불이 의도한 대로다.

    나를 나로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활불은 그것을 ‘경험’이라고 규정했다.

    가장 고차원적인 영(靈)은 감히 인간의 힘으로 건드릴 수 없다. 영에 가까운 가벼운 혼(魂)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백(魄)과 가까이에 섞여버린 무거운 혼. 그리고 본래 지상에 남아 녹아내리는 백이라면 어떨까?

    결국 활불의 환생은 진정한 의미의 환생이 아니었다.

    그의 영은 저 먼 곳으로 떠났다. 남은 것은 쌓여있는 생전의 경험들. 그것이 이제 막 태어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아이의 몸에 스며든다.

    아무것도 없는 순백의 아이에게 수백 년의 기억이 쌓인다면 그것은 이제 막 태어난 아이인가, 아니면 수백 년을 살아온 활불인가.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활불은 스스로를 같은 사람이라 자칭했지만, 엄밀하게 말했을 때 그들은 그저 하나의 기억을 공유하는 각기 다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영균이 고안하고, 영보가 창안하여, 종자명이 완성한 천살의 무공은 인간의 혼(魂)을 불사른다. 하지만 활불의 환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겁게 쌓인 그의 백(魄)이다. 물론 혼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한다. 그 무거운 백을 나르는 역할이다. 손상된 혼은 저 먼 곳의 아이에게는 그의 백을 나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백이 무사한 이상 이 순환에는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광경은 그가 지금까지 네 번의 전생을 거치는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무엇보다 이 몸.

    오백 년 동안 축적된 그의 경험 속에서 가장 강력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답은 뻔하다. 칠십 년 전. 금강공과 유가밀공을 완성하여 가장 완벽한 육체를 이룩했던 그 순간이다.

    그리고 지금 활불의 몸이 그러했다.

    이번 생의 몸이 그것을 완성했다는 뜻이 아니다. 정말 말 그대로 그때의 육체다. 이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

    이 의문 투성이. 알 수 없는 사태에 혼란으로 가득차 있던 활불에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히지만 그 목소리 역시 의문으로 가득차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활불이 고개를 돌렸다.

    “너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이의 얼굴이거늘

    활불의 몸이 크게 나아갔다.

    심즉동(心卽動)

    마음이 이는 대로 곧 몸이 간다. 예비 된 자세 따위는 필요 없었다. 전성기의 움직임에 거의 근접한 동작이었다.

    -쾅!!!

    산을 뿌리 채 뽑아낼 것 같은 일격.

    죽기 직전, 금강공과 유가밀공의 충돌 사이에서 간신히 뽑아낸 어설픈 바즈라파니와는 질적으로 다른 몸이다. 가장 유연하며 가장 강건하다.

    하지만 상대는 마치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그 공격을 받아냈다.

    익숙한 모양이었다.

    산봉우리? 아니, 어쩌면 꽃봉오리? 뭐라 콕 찝어 말하기 힘든 거대한 심상이 그 공격을 받아냈다. 그것은 단순히 공격을 흘려내는 것이 아니었다. 어딘가로 흘려 보내버린다기보다는 그 검식 내에서 모든 경력을 다 소화해버리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현생의 활불은 그것을 뚫지 못했었다.

    그 이유는 물론 두 명의 초절정 고수가 그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활불 자신이 그만한 출력의 공격을 연달아 펼칠만한 역량이 부족했다는 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의 활불에게는 주변을 하얗게 물들이는 수증기도, 끓어오르는 어마어마한 열기도 없었다. 물론 그것들은 범인들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심지어 일정 경지에 오른 고수조차 행동을 방해할 만큼 지독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그저 부작용이자 낭비다.

    그리고 전생의 활불은 그 낭비되던 모든 힘을 오직 일수, 일권에 담을 수 있었다. 그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완성된 바즈라파니의 위력이다.

    -쾅!!!

    한 번의 주먹질에 이음절의 사자후에 필적하는 힘이 담겼다.

    어린놈이 펼쳐내는 검식이 흔들렸다.

    그리고 또 한 번.

    이번에는 번개처럼 뽑혀 나간 오른발이 공간을 분쇄했다. 그 위력은 이음절의 사자후 이상. 어쩌면 일음절의 사자후에 버금가는 힘이었다. 수십 장의 성벽을 허물만큼 막대한 위력이 오직 그 발길질에 실린 것이다.

    -콰과과과광!!!

    검이 휘청였다.

    정교하게 그려지던 산봉우리가 무너진다. 그리고 그 무너진 검식의 틈. 활불의 오른손 수도가 그 틈을 정확하게 찔렀다.

    -푸욱!!

    익숙한 감각이 손끝에 느껴졌다. 연약한 늑골을 바수고 들어간 손 끝이 물컹한 내장을 파헤쳤다. 어린 놈의 얼굴에 고통이 그득하다. 하지만 아직이다. 마지막 순간 활불 자신이 느꼈던 혼이 타오르는 고통은 고작 이 정도가 아니었다.

    몸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척추를 움켜쥐었다.

    “커헉······.”

    움켜쥔 손에 힘을 더했다. 검사는 절대 손에서 검을 놓지 않는다 떠드는 놈들은 많이 봤다. 하지만 그런 놈들 치고 척추를 바스라트리는 과정에서 손에 힘이 풀리지 않는 놈 따위는 없었다.

    “크크크.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하지만 놀랍게도 이 어린놈은 그 막대한 고통의 과정에서 검을 휘둘러 자신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역시 초월에 발을 내디딘 고수이기 때문일까?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마음으로 가능케 한다.

    그러나 딱 그뿐이다.

    저 하늘의 별빛을 긁어모아도 간신히 표피나 상하게 할만큼 완성된 육체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며 탄력적이고 또 유연하다. 천하에 어떤 금속이 있어 감히 완성된 바즈라파니에 비할 수 있을까.

    어깨를 강타한 검이 힘없이 옆으로 미끄러졌다.

    척추를 움켜쥔 손에 힘을 더했다.

    -뿌드득

    하체에 힘이 풀리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하지만 쓰러지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복부를 꿰뚫은 손을 빼내어 머리를 움켜쥔다.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이 정도면 무조건 절명에 이를만큼 심각한 상처다. 하지만 이 어린놈 역시 초절정의 고수다. 외공으로 초월에 발을 디딘 이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그 질긴 생명력은 보통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다.

    “각오해라. 이제 시작이니까.”

    어린 놈.

    운호가 그 말에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그렇지. 이제 시작이지.”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어?”

    운호였다.

    조금 전까지 척추를 분질러 트리고, 진정한 고통을 주겠노라 다짐하던 그 어린 놈이 지금 저기에서 멀쩡한 모습으로 검을 쥐고 서 있었다.

    이것이 대체 무슨 일인가.

    활불은 크게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보통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내뱉었다.

    “사······, 사술이냐?”

    내뱉고도 부끄러운 말이었다.

    자신의 이해를 벗어난 모든 것을 그저 사술이라 칭하는 것은 수백 년의 생에서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를 깨달아 스스로를 부처라 칭하는 자신에게는 실로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운호가 그것을 꼬집었다.

    “스스로를 부처라고 칭하더니 지금 그 꼴을 보아하니 부처는커녕 그 손아귀에 갇힌 돌원숭이만도 못하구나.”

    활불이 또 한 번 크게 분노했다.

    감히 저 어린 놈이 자신을 놀려?

    이후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면 저 어린 놈이 처음부터 자신의 공격을 그 이상한 수법으로 받아내지 않았다는 점 정도다.

    하지만 그래봐야 한두 번 정도 몸을 더 쓰는 것뿐이다. 결국 그의 손아귀가 녀석의 목숨줄을 움켜쥐었다.

    “네가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용없다. 고통 앞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니 궁금한 점은 찬찬히 알아가면 그만이지.”

    “글쎄. 네가 스스로 말하지 않았더냐. 이제 시작이라고.”

    피투성이가 된 운호가 또 한 번 그를 비웃었다.

    그리고

    “또?”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악몽이 시작됐다.

    ***

    “크윽······.”

    운호가 자신의 배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괜찮으냐?

    벽에 걸려있던 파검이 운호에게 물었다.

    “네, 뭐. 좀 아프긴 하지만 견딜만 합니다.”

    파검의 때는 좀 이상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었다.

    애초에 파검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그런 것을 깊숙하게 생각할만한 상태가 아니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그가 상대해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을 느낀 적은 너무 강대했다.

    무엇보다 애당초 몽원경이라는 것 자체가 그의 이해를 벗어난 무언가였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증무진인이 그에게 큰 도움을 줄 때도, 그리고 그가 사라진 자리를 파검이 대신할 때도 그것은 그가 이해 가능한 범위 밖의 일이었으며, 그에게 딱히 해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초월을 향하여 한 걸음을 내디딘 지금.

    운호는 이 몽원경이라는 거대한 무언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증무진인 목운평은 이렇게 말했다.

    마인이야말로 몽원경의 진정한 목적이라고. 실제로 그는 인세에 간섭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하려고 애썼지만, 오직 마인들을 상대하는 순간만큼은 예외로 했다.

    파검은 딱히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현세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저 정답이라는 검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지금의 활불.

    대화를 나눠볼 상황이 아니었다. 나눌 수 있는 것은 그저 격렬한 싸움뿐이었다. 분명 영원을 살아간다던 괴물이 대체 어째서 몽원경에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그리고 그 풍경.

    목운평이 있을 때의 몽원경은 정말 전설 속의 도원향이 이렇지 않을까 싶은 풍경이었다. 그리고 좌부원이 있을 때의 몽원경은 파도가 몰아치는 남해를 닮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저 황량함뿐인 황무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배경은 명확하게 달라져 있었다. 희미하게 보이던 저 산맥이 훨씬 또렷해졌다. 또한 그 산맥의 모습 역시 묘하게 익숙했다.

    화산?

    물론 조금은 달랐다. 하지만 대충 본다면 화산이라고 착각할만큼 닮아 있다. 저것은 갑자기 나타난 활불의 영향일까? 아니면 운호 자신이 경지에 발을 디뎠기 때문일까. 아무런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운호는 그것이 스스로 경지에 발을 디뎠기 때문이라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운호야, 일어 났어?”

    “어? 어. 잠시만.”

    그리고 또 한 가지 강력한 확신이 들었다.

    이제 이 세상에 영원을 살아간다는 활불이라는 괴물이 더 이상 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그리고 어쩌면 이 현상이 저 대제사장이라는 괴물을 상대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될 것 같다는 확신.

    운호가 등에 파검을 메고 문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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