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누구의 잘못인가(41)
운호는 분명 활불 자신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막아내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활불이 보기에 그것은 벼랑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가깝다.
최소한의 힘으로 최적의 효율을 낸다? 말은 쉽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해낸다는 것은 주사위 도박에 능한 도박사가 연속으로 끊임없이 주사위의 눈을 6으로 만들어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심지어 주사위의 눈이 한순간이라도 삐끗하면 목숨이 날아가는 도박이다.
그것만으로도 보통 사람이라면 견디기 힘든 압박이다.
그리고 지금 활불은 거기에 선택지 하나를 더 했다. 여섯 개의 눈을 가진 주사위를 굴리는 상대에게 최소한 8 이상의 눈이 나오는 것을 강요한 것이다.
-오옴!!
이음절.
단음절의 사자후를 펼치기에는 너무 창졸간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공격과 공격. 활불의 헛웃음 사이에 터져 나온 사자후가 운호를 향했다.
소리는 형태가 없다.
사자후는 이와 같이 형태가 없는 것에 파괴를 더한 천고의 절학이다. 형태가 없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거기서 무사한 것과 그것의 여파를 없애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위험하다!!
파검이 소리쳤다.
운호가 검을 움직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포달랍궁의 삼장로인 단증과의 싸움에서부터 저것이 벌써 몇 번째 사자후였을까. 당시 운호는 화산을 연상케 하는 검으로 단증의 삼음절 사자후를 막아냈었다. 확실히 활불은 대단한 고수였다. 비록 수준은 떨어진다고 하지만 단증이라는 초절정의 고수가 심혈을 기울여 펼쳐야 했던 무공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도 즉각적으로 더 강력하게 사용하다니.
하지만 이미 한번 파훼했었다.
확장된 운호의 오성이 그때를 떠올렸다. 당시에도 그 일 검을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의 일검을 재현할 수 없음은 그저 내공의 부족, 혹은 깨달음의 문제라고 여겼다.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무공이란 본디 그러한 것이니까.
아니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
단순히 언어만이 아니라 심상 자체가 형용할 수 있는 것의 너머에 존재하는 것을 어찌 인간의 작은 두뇌로 새겨둘 수 있겠는가. 운호가 기억하고 있던 형(形)은 열화되고 또 열화된 것이었으니 진정으로 화산을 나타내는 검은 그와 같을 수 없었다.
만약 강아현이 지금 운호의 검을 봤다면 그녀는 그것이 자신이 펼치려던 그 검과 너무 비슷하다는 점에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운호가 펼치는 검이 자신이 이상으로 생각했던 그 검보다 더 거칠고 더 험난하며 더 아름답다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랐을 것이다.
절정의 검사가 이상으로 생각했던 모습에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간 검.
허공에 선과 선이 그려졌다.
그 진한 선들이 모여 어느새 한 송이 꽃봉오리가 떠올랐다.
아니, 이것이 과연 꽃일까? 어쩌면 그것은 꽃이 아닌 험악한 돌산 같기도 했다. 마치 화산(花山)이라 이름 붙었지만, 꽃나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화산처럼.
파괴의 심상을 가득 실은 형체 없는 소리조차 그 화산을 넘어서지 못한다.
모든 것을 받아내는 화산처럼, 운호의 검 역시 모든 것을 받아냈다. 삼단공의 포원공이 용트림 친다. 경지를 넘어섰지만, 그것이 내공 그 자체에 변화를 준 것은 아니었다. 바뀐 것은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이다. 운호는 본래도 절정이라 믿기 힘들 만큼 효율적으로 내공을 활용했다. 그리고 경지를 넘어선 지금은 그것 이상이다. 사량발천근이라는 표현에 딱 걸맞은 내공의 운용.
하지만 사량발천근 역시 천근의 힘을 내기 위해서는 사량의 힘이 필요한 법이다. 빠듯하다. 전신의 내공을 모조리 뽑아내 한 송이 꽃봉오리를 유지했다.
활불은 솔직히 놀랐다.
그가 운호에게 내민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네가 크게 손해를 보든지, 아니면 저들을 포기하든지.
하지만 운호는 자신의 기량으로 세 번째를 선택했다.
활불은 인정해야했다. 저 아이의 기량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그래, 좋다. 대단하구나. 허나 네 놈이 엄마 뱃속에서부터 영약을 빨아먹고 컸다고 해도 이 이상은 무리다.’
하지만 무공에는 세월의 힘이 더해져야만 하는 부분도 존재하는 법이다.
활불이 운호를 향하여 그 거대한 주먹을 내리쳤다.
힘든 상황.
그러나 운호가 이런 선택을 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박진문의 몸이 활불의 그림자를 파고들었다.
운호에게 향하던 음속폭음의 주먹이 박진문에게 향했다.
박진문이 노련하게 그 공격을 받아 넘겼다. 전력으로 달려오느라 만전의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것은 상대 역시 마찬가지다.
-쾅!!쾅!!!!쾅!!!!
세 번의 주먹질.
박진문의 몸이 그림자에서 튕겨나갔다.
충분했다.
기해혈의 크기 자체는 어쩔 수 없다. 진기의 총량 역시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신기에 다다른 운용능력이 그것을 갈음했다.
고작 한 번의 깊은 호흡에 포원공의 진기가 충만하게 차올랐다. 종자명이 활불에게 달려들었다. 본래도 하얀 피부가 더 창백하다. 살점이 패이고, 거죽이 덜렁인다. 하지만 그 기세는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천살성의 기운이 가득한 붉은 장검.
활불이 손바닥을 쫙 펼쳐 그것을 밀어냈다. 황금빛의 서기는 여전히 그의 몸을 완벽히 보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명백하게 줄어들었다.
십일척에 달하던 그 거대한 키는 그대로다. 하지만 사백근은 족히 나갈 것 같던 두툼한 몸이 명백히 줄었다. 특히 그 공간을 초월했던 한 걸음. 그 걸음 전후로 몸의 크기가 확연히 달랐다.
운호가 검을 쥐었다. 그리고 한 번을 더 호흡했다. 본래라면 지금 치고 들어와야 하는 박자였다. 어째서? 혹시 조금 전의 그 일검이 그만큼 더 힘이 들었던 것인가?
하지만 활불은 방심하지 않았다. 저 어린 놈은 위험하다.
운호가 초월하기 전에도 이 셋의 합공은 까다로웠다. 하물며 지금이라면? 특히 내공을 가닥가닥 끊어놓는 그 터무니 없는 일검이 대체 얼마나 강화됐을 것인가.
운호는 한 박자를 늦췄지만, 박진문은 자신의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의 양손이 대지를 딛고 선 활불의 양쪽 발목을 움켜쥐었다.
-치지직
마치 철판에 고기를 굽는 것 같은 소리가 터져나왔다. 어마어마한 열기다. 하지만 손에 느껴지는 그 화끈함보다 이전에는 양손으로 움켜 쥐어도 한 번에 잡히지 않던 굵은 발목이 손아귀에 힘을 줄 수 있는 두께로 변해 있다는 사실이 먼저 들어왔다.
박진문이 자신의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그리하여 활불이 자신의 발목을 움켜쥔 박진문의 양손을 떨쳐내기 위하여 힘을 더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호흡과 호흡의 사이.
일촌광음(一寸光陰)
화려한 꽃봉오리의 이파리 하나가 깨져 나왔다.
운호는 광음검을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증무진인 목운평이 자신의 백(魄)을 불태워 그것을 보여주었고, 운호는 자신에게 남았던 힘을 긁어모아 그것을 재현함으로써 마교의 대제사장에게 아주 약간의 틈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파검이 대제사장에게 이십 년의 상처를 만들어내는데 크게 일조했었다.
과거 증무진인 목운평은 몽원경에서 운호에게 검술을 가르칠 때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일러주는 친절한 스승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먼 길을 제시하였고 운호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 모든 것들을 헤쳐나갔다.
하지만 광음검만큼은 달랐다.
마지막 순간, 증무진인 목운평은 자신의 광음검을 보여주었다. 운호로서는 그것을 완벽한 광음검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 그런 힘으로 무려 마교의 대제사장에게 일격을 날렸던 검술이었다. 마교의 대제사장이 보여줬던 힘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운호의 그런 생각은 크게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후 운호의 광음검은 오직 증무진인 목운평의 그것을 닮는데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벽을 넘어선 곳에서 느낀 감상은 또 달랐다.
아, 나는 지금까지 광음검을 제대로 알지 못했구나.
증무진인은 앞선 납매와 매농, 자운이 기초를 잡아주기 위한 검술이라면 광음검을 상승의 무리이자 도에 닿을 가능성을 지닌 검술이라 평가했다.
대체 상승의 무리가 무엇인가. 누군가는 그것을 마음이라 이야기했고, 누군가는 의념이라 이야기했다.
초월자의 길에 한 걸음을 내딛은 운호의 생각이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의 마음은 이미 시간과 시간 사이를 꿰뚫었으니 그의 검이 존재하는 곳은 마땅히 그의 마음이 닿는 곳이어야 했다.
그렇기에 그것은 단순한 쾌검(快劍)을 넘어선 경지에 있었다.
물론 활불은 천상과 연결됐던 운호의 움직임조차 감지하고 읽어냈었다. 그의 감각은 자신의 호흡과 호흡 사이를 꿰뚫고 들어오는 운호의 검을 감지해냈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못했다. 지금은 그의 양다리를 움켜쥔 박진문을 떨쳐내기 위하여 힘을 더하던 순간이었다.
그렇기에 그저 그의 몸을 감싼 그 황금빛의 강기를 믿었다. 또한, 그의 굴강한 몸을 믿었다. 지금 그는 바즈라파니 그 자체였으니까.
운호의 저 일검이 인간을 초월한 이치 밖의 검이라면, 활불 자신의 몸을 감싼 금색의 별빛 역시 인세의 이치를 초월한 무학이었으며, 지금 움직이는 이 단단한 몸뚱이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서걱
밤하늘의 별빛을 긁어모은 운호의 검이 활불의 황금빛 호신강기를 ‘베고’ 바즈라파니를 자처하는 저 거대한 몸뚱이에 선명한 자상을 만들었다.
정답은 오래된 검이다.
비록 그 시대에는 신검이라 불릴 만큼 대단한 검이었을지 모르겠으나, 당대를 기준으로 봤을 때 그 재질도, 형상도 투박하기 짝이 없다.
정답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의 상처는 예리하기 짝이 없었다. 신검 정답 두께에 십 분지 일도 되지 않는 예리한 자상.
비록 상상하지 못했던 상처였지만, 활불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환생을 거듭하며 물경 오백 년을 살아온 괴물이다. 물론 그 긴 경험 가운데도 이와 같은 특이한 경험은 없었다. 약관의 아라한이라니.
하지만 세상은 본래 불합리하며, 하늘은 항상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머릿속에 간직하고 살아왔다. 그저 침착하게 한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저 아이는 흡사 화약 병기와 같다. 강력하지만 다시 쏘기 위해서는 그만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박진문은 아니었다.
활불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박진문의 열 손가락에서 검은 기운이 폭발했다.
강호인은 항상 삼푼의 힘을 숨겨야 한다는 격언이 있다. 박진문은 강호인이 아니다. 그보다 더 더럽고 치열한 황궁. 그 그림자 속을 암약해야하는 내관이다.
이토록 몰리던 상황에서도 밑천을 털지 않던 그가 자신의 밑천을 탈탈 털어냈다.
아물어가던 상처가 벌어졌다.
핏물은 흐르지 않는다. 어마어마한 열기가 흘러나오는 핏물조차 기화시켜버리는 탓이다.
누더기.
그것은 사람을 칭하는 표현으로는 참으로 어색한 표현이다. 하지만 지금 종자명에게는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검붉은 빛의 누더기가 높게 뛰어올라 크게 내리쳤다.
-쾅!!!!
전진에 전진에 전진. 오직 전진만을 하던 천살성이 이번에는 밀려나지 않았다.
활불의 두 발이 땅에 깊숙하게 박혔다.
그리고 마침내 운호의 검이 거인의 심장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