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누구의 잘못인가(40)
그것은 실로 기이한 경험이었다.
한 순간 시야가 놀라울 정도로 크게 확장됐다. 마치 드높은 천상의 어딘가에서 인세를 내려다 보는 것 같은 감각. 아니, 감각이 아니다. 이 순간 운호는 진정으로 감각이라는 것을 초월했다.
색향성미촉(色香聲味觸)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오욕과 칠정.
한순간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찮아졌고 그 모든 것에 의미가 사라졌다.
초월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이천년 전. 고타마 싯다르타는 보드가야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지독한 고행을 했었다.
죽은 자의 옷을 주워입고, 몸에 남은 것은 오직 뼈와 거죽밖에 없었으며 정수리에는 부스럼이 생기고 머리는 흡사 깨진 조롱박과 같았다. 누군가가 이야기하기를 당시 그의 몸은 마치 낡은 수레가 허물어지는 것과 같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붓다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정신이 육체를 초월했으나 그 너머를 바라볼 수는 없었다. 그가 그것을 이룩한 것은 팽팽한 줄은 끊어지고, 느슨한 줄은 소리가 나지 않는 이치를 깨달은 이후였다.
지금의 운호는 보드가야에서의 고타마 싯다르타와 같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를 더 팽팽하게 당겼으며 거기서 한 번 더 팽팽하게 당겼다. 그것은 보통의 사람이라면 아마 진즉에 실성했을 법한 극도의 심리적 압박이었다.
하지만 운호의 정신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마치 고타마 싯다르타가 보드가야에서 끝없는 고행으로 마침내 육체의 욕망을 초월했던 것처럼, 운호 역시 한계에 갇힌 육체와 경계를 넘지 못하는 기운을 초월했다.
그렇게 확장된 정신이 세상을 내려다봤다.
참으로 하찮았다. 팔백 년의 은원. 땅에서 나는 한 톨의 곡식에 울고 웃고 살고 죽는 인간군상들. 대체 무엇을 이루겠다고 저토록 하찮은 형태로 이 땅에 붙어있는지 알 수 없는 비인외도의 괴물과 모든 것을 잃어버렸기에 그저 분노에 몸을 맡긴 인간과 그렇게 몸을 맡길 분노조차 잃어버린 인간.
참으로 부질없다.
그에 반해 저 뻥 뚫린 하늘은 어떠한가.
더러운 욕망과 인세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된 천상의 세계에서 영원히 안락함을 누리는 것은 모든 인간의 소망 아니었나?
천상의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의 가장 위대한 지혜들이 들려왔다.
그것은 오랜 시간 이어져 왔던 신들의 노랫소리였으며 먼저 떠난 이들의 손짓이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파검 좌부원이 있었다. 저렇게 더럽게 구겨져 바닥을 구르는 하찮은 백(魄)이 아닌 진정한 그의 영혼이다.
천중일검 증무진인 목운평 역시 있었다. 백여 년을 버텨 닳을 대로 닳아버린 백(魄)이 아닌 생전의 영롱하게 반짝이던 목운평이었다.
남궁혜가 있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그녀는 더 아름다웠다.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바세계의 미련을 떨쳐버리고 이곳으로 오라고. 이곳에서 영원을 함께 하자고.
운호가 슬프게 웃었다.
-주르륵
웃는 얼굴 위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참으로 좋았다.
열흘 남짓한 만남이었다. 그리고 삼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운호의 두뇌는 터무니없이 좋았지만, 사람의 두뇌라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기 마련이다. 최근 운호는 종종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남궁혜의 얼굴이 진짜 남궁혜의 얼굴이 맞는지 헷갈리곤 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초월을 앞뒀을 때.
마라 파피야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보리도를 포기하고 그저 불을 섬기며 제사를 지내겠다 약속 한다면 나는 너에게 지상의 모든 것을 주겠노라.”
그것은 고타마 싯다르타가 가장 먼저 내던져버렸던, 그렇기에 그가 가보지 못했던 최초의 갈림길, 즉 후회였다.
마라 파피야스에게 고타마 싯다르타는 말했다.
지상의 것은 내가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그에게 손짓하는 그녀에게 운호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저 지상에 있노라고.
영원과 같은 고민의 시간.
그야말로 억겁의 고민 끝에 나온 대답이었다.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의 길이었는지, 혹은 고타마 싯다르타가 거부했던 마라 파피야스의 유혹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늘에서 울려 퍼지던 천상의 소리가 사그라들었다.
여전히 세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운호는 알 수 있었다.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유리된 세계를 운호가 걸었다. 여전히 세상은 하찮았으며 그의 전신을 가득 채운 깨달음과 전능감은 초월을 말했다.
천천히 걸어간 운호가 우그러진 정답을 쥐었다.
누가 어떻게 만들어낸 검이었을까? 그 안에 펼쳐진 무한한 공간은 정말로 신(神)이 거하기에 충분할 만큼 드넓었다. 비록 지금은 틀어지고 망가졌지만, 이만한 공간이라면 약간을 잘라낸다고 해도 인간의 백(魄)이 거하기에는 충분히 광활할 것이다.
우그러진 검이 마치 시간을 되돌리는 것처럼 돌아왔다.
파검의 시간이 돌아왔고, 운호의 시간은 흐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이다. 여전히 세계는 느렸고 운호는 다른 세계를 걷고 있었다.
저기 강아현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터져 나오는 핏물이 점점이 허공을 부유했다. 운호가 그 길을 걸었다. 허공의 공기가 마치 장벽처럼 단단히 그를 막아섰지만 상관없었다. 운호의 몸이 활불의 곁을 지나갔다.
활불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됐다.
그의 시선이 미미하게 운호를 따라왔다. 그리고 그 시선을 따라 음속폭음의 권이 움직였다. 하지만 소리를 초월한 그 주먹은 너무나도 느렸다.
운호의 오른손이 강아현의 등을 사뿐히 받아냈다.
세상의 모든 가벼운 것은 위를 향하고, 무거운 것은 아래로 향한다. 인간의 영혼백육 역시 이와 같다. 하나로 단단히 뭉쳐야 할 그것들이 층별로 분리되려 하고 있었다.
운호의 손이 그녀의 백회로 쑥 들어갔다. 신화 속의 여와는 진흙을 인간으로 빗어냈다고 했다. 설사 완전히 초월한다고 해도 과연 그것을 흉내낼 수 있을까? 하지만 그저 분리되기 시작한 층을 다시 하나로 만드는 것은 이 불완전한 초월로도 충분하리라.
아현의 백회를 파고든 운호의 손이 그녀의 영혼백육을 휘저었다. 마치 층층이 분해되기 시작한 찻물을 다시 합치는 것처럼. 결속이 풀리기 시작하던 강아현의 영혼백육이 하나로 단단히 합쳐진다.
시간의 흐름이 점점 빨라졌다.
세계와 유리됐던 운호의 정신이 다시 이 세계에 들러 붙는다. 모든 것을 알 것 같던 초월감이 사라지고,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들려오던 세상의 위대한 지혜가 입을 다문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그것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운호는 그 모든 것을 굳이 잡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지상에 있노라고.
지상의 것은 지상의 힘으로.
파검이 –우우웅 검명을 뿜어냈다.
-이게 무슨!?
그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마지막 순간 모든 깨달음을 더한 일검을 펼쳐냈음에도 활불에게 허무하게 파훼당하고 그의 손에 몸부림치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남쪽 마교의 대제사장과 자웅을 결하다 등선한 것이 생전의 마지막이었다면, 서쪽 포달랍궁의 활불과 자웅을 결하다 죽는 것은 파검 좌부원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최후 정도는 되겠다. 뭐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지금 자신을 쥐고 있는 이 사내가 정녕 운호가 맞단 말인가? 설마 자신이 년 단위로 정신을 잃기라도 했던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 지금 이 상황, 그리고 저 앞에 선 거인의 모습은 정신을 잃기 전과 연속성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설마 운호가?
초절정?
아니, 아무리 운호라고 해도 고작 스무 살에?
활불이 운호를 향해 크게 도약했다.
그것은 음속폭음의 일권.
소리보다 빠른 주먹이 운호에게 향했다. 시간은 충분했다. 그 일권을 앞두고 운호가 침착하게 품에 안고 있던 강아현을 사뿐히 내려놓았다.
조금 전에 있었던 시간들이 환상처럼 느껴졌다. 무언가 거대한 이치가 스쳐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그 편린뿐이다.
이왕이면 그 모든 것들을 수습할 시간이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지만 괜찮다. 무기력하게 죽어가던 강아현이 살았고, 고철이 되어 나뒹굴던 파검이 돌아왔다.
또한, 그 이치의 편린 만으로도 충분했다.
저 무한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지켜보기만 하던 백운호는 없었다. 한계를 넘어선 어딘가에서 운호가 세 걸음을 걸었다.
-콰아아아아앙!!!
검과 주먹의 충돌.
폭음은 그 충돌 이후에 찾아왔다. 그야말로 소리보다 빠른 공방. 어마어마한 충격음과 파동이 장내를 휩쓸었다. 하지만 운호의 등 뒤편. 강아현을 비롯한 대장군부의 생존자들이 위치한 그곳은 너무나도 고요했다.
납매검(臘梅劍).
가장 이치에 합당한 그 검법이 이치를 넘어서는 순간이다.
영현과 백가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든 것을 지켜봤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분명
짙은 수증기에 휘감긴 거인이 나타나고 누워있던 강아현이 놀라운 신위로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눈 깜빡 할 사이에 피를 흘리며 튕겨 나는 것까지는 선명하다. 하지만 그 직후 갑자기 운호가 나타났고, 또 갑자기 정신을 잃은 강아현이 그녀들의 품에 들어와 안겼으며, 운호의 검 앞에서 저 짙은 연기가 튕겨 나갔고 십 척을 넘어가는 대머리의 근육질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운호의 검이 활불의 공격을 받아냈다.
소리보다 빠른 공격들. 어마어마한 위력이다. 물론 사람이 만든 물건 가운데 채찍 역시 소리를 넘어선 속도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무게가 다르다. 활불의 몸무게는 사백 근 이상. 심지어 순간순간 타격의 시점에 내공을 활용하여 그 무게를 열 배 가깝게 늘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검과 몸의 격돌에서 소음은 터져 나오지 않는다. 소음은 오직 소리를 넘어선 활불의 공격이 공기의 층을 파괴하는 순간뿐이다. 심지어 운호의 검이 움직이는 속도는 활불이 몸을 움직이는 것의 절반 남짓에 불과했다.
납매검이 추구하는 궁극의 합리성은 무엇인가.
효율이다.
소리를 넘어서는 속도로 검을 휘두르는 것?
해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운호는 지금의 자신에게 그것이 불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는 이해할 수 없는 까마득한 전능감은 없었다. 그러나 저 하늘의 별빛을 검에 두르고 휘두르는 검이라면 능히 그것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그러나 필요 없었다.
소리의 속도를 넘어선 공격을 막아서기 위하여 꼭 소리의 속도를 넘어설 필요가 있을까? 슬쩍슬쩍 가져다 대는 검이 활불의 공격을 막아냈다.
물론 단순히 그것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명현류 반야검 운호식(明賢類 般若劍 運好式)
약식 도피안검(略式 到彼岸劍)
납매검의 검리에 따라 움직이는 일검, 일검에 명현신니의 가르침이 섞였다.
충돌의 순간 활불의 진기 흐름이 순간순간 끊어진다. 물론 힘의 크기는 여전히 압도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운호에게는 일상이었다. 그의 싸움은 자신보다 더 힘이 강한 상대, 내력이 엄청난 상대, 경지가 높은 상대의 연속이었다.
활불이 하늘이 내린 이 불합리함에 광소했다.
그리고 그 광소 사이로 전설적인 파괴의 음공이 섞여들었다. 어디 이것도 한 번 막아보라. 물론 피하는 것은 쉽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네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네 뒤의 계집들은 모조리 죽어 나자빠질 것이다.
박진문이 종자명의 그림자를 박차고 뛰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