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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역대급 천재-191화 (191/288)
  • 191화

    누구의 잘못인가(39)

    활불의 굴강한 손아귀 안에서 파검이 몸부림 쳤다.

    “신검? 어린놈이 어울리지 않는 귀물을 들고 있었구나. 조금 아깝긴 하다만······.”

    활불이 자신의 손아귀를 오무렸다. 수천 년을 버텨왔던 정답의 단단한 검신이 그 강력한 힘에 저항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드득

    활불의 손아귀 안에서 정답의 검신이 꺾이고 뒤틀렸다. 검명과 함께 몸부림치던 정답이 잠잠해졌다. 활불이 그 검을 내팽개치고 성큼 대장군가의 생존가들에게 손을 뻗었다.

    그것은 절망이었다.

    강아현이 자신을 향해 움직이는 그 파괴의 화신을 바라봤다.

    운호는 그런 강아현을 바라봤다.

    느리다. 아직도 너무 느리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저 지켜보기만 하고 움직일 수 없었던 그 때.

    그리고 달리고 또 달려보지만 닿을 수 없는 지금.

    오늘도 나는 이토록 무기력한 것인가.

    어째서!!!

    강아현은 생각했었다.

    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검이 품고 있던 드높은 무학의 이치를 과연 누가 막아설 수 있을 것인가.

    저 검은 무적이겠구나.

    운호가 던진 그 검은 그 정도로 대단한 이치를 품고 있었다. 어쩌면 운호가 지금 이 순간 절정의 한계를 넘어 그 다음 경지로 도약한 것이 아닐까 의심할 만큼 말이다.

    지금까지 그녀가 봤던 고수 가운데 가장 놀라운 이는 운호였다. 물론 운호보다 강력한 고수들은 많았다. 당장 사문에 청무진인만 하더라도 감히 운호가 비교할 수조차 없을 고수다. 하지만 나이를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세상에 그 누가 고작 약관의 나이에 저러한 경지를 논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진정으로 무학의 이치에 다가가는 길은 무학의 근본적인 이해에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그 생각은 고작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산산이 부서졌다.

    인간의 이치를 넘어, 천리(天理)에 닿았다고 여겼던 검이 저 단순한 동작에 사로잡혀 파괴되다니!!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버려지는 그 검의 모습에 강아현이 받은 충격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어쩌면 그녀가 지금까지 품어왔던 무학에 대한 생각 자체를 뒤흔들 만큼 말이다.

    -쾅!!

    사선으로 가로지른 활불의 발길질이 동창의 창위 두 사람을 하나로 만들었다. 하나는 상체가 갈려 나갔고, 하나는 하체가 갈려 나갔다.

    아무리 상명하복의 기치를 신조로 삼는 동창이라지만 이런 압도적인 파괴 앞에서 부나방처럼 목숨을 내던질 인간은 흔치 않았다. 동창의 창위들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엉거주춤 물러났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그 압도적인 폭력의 재해 앞에서 강아현이 일어났다.

    옥녀진결의 진기가 그녀의 몸을 가득 채웠다.

    과거 증무진인 목운평은 운호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실전에서 깨달음 따위를 펼치려고 하다가 뒤진 놈이 한둘인 줄 아냐고. 그런 것을 사람들이 회자하는 것은 그렇게 살아 남은 놈이 워낙에 드물어 진귀한 일이기에 회자하는 것이라고.

    아쉽게도 강아현은 목운평을 만난 적도 없었고, 당연히 그런 잔소리를 들은 적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술(術)인가, 력(力)인가.

    선심후수인가, 검술일성인가.

    오랜 시간 선심후수야말로 정도(正道)라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었던 화산파에 내려오는 그 케케묵은 논쟁은 최근 백운호라는 젊은 고수의 출현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강아현은 거기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

    어쩌면 술의 극한에 도달한 것 같았던 그 공격이 저토록 허무하게 사그라드는 것을 본 순간, 강아현은 그 케케묵은 논쟁 자체가 어쩌면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펑

    기해혈에 들끓던 기운이 한차례 폭발했다.

    거대한 힘의 소용돌이다. 하지만 저기 걸어오는 파괴의 화신에 비하자면 보름달, 아니 태양 앞의 반딧불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한 번 더

    -퍼벙

    또 한 번 진기의 폭발이 이뤄졌다.

    힘은 결국 무게와 속도다. 더 무겁든지, 아니면 더 빠르든지.

    하지만 그렇게 한 차례 더 크기를 키웠음에도 아득했다. 대체 무슨 마음으로 저 파괴의 화신 앞의 자신이 태양 앞에 반딧불 정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여전히 그 아득한 힘의 격차는 태양과 반딧불만큼 거대하다.

    강아현이 그녀 자신에게 물었다.

    청무진인이 위대한 무인인 것은 선심후수가 정도이기 때문인가?

    백운호가 저토록 놀라운 성취를 보이는 것은 검술일성이 올바른 길이기 때문인가?

    그리고 스스로에게 답했다.

    아니다.

    모두 틀렸다.

    청무진인이 위대한 무인인 것은 그가 청무진인이기 때문이고, 백운호가 저토록 놀라운 성취를 보이는 것은 그것이 백운호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길이란 정해진 길이 아니다. 청무진인에게는 청무진인의 정도가 있고, 백운호에게는 백운호의 정도가 있다.

    그러니 강아현에게는 강아현의 정도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녀는 검술에 집착했다.

    백운호에게 처음 접근했던 것도 그러했고 이후 백운호와 함께 무공을 연마했던 것 역시 그러했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검술이라는 것에 대한 그녀의 열망은 더 커졌다. 어쩌면 그것은 백운호라는 무인이 보여준 찬란한 빛때문이었다.

    과거의 누군가가 경계했던 검종의 폐혜는 검술일성의 천재가 등장했을 때, 그 화려한 빛에 현혹되어 스스로를 망가트리는 수많은 범재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강아현은 백운호라는 천재가 만들어낸 가장 큰 피해자인지도 몰랐다.

    그러던 그녀가 마침내 검술 그 자체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누군가가 생각할 땐 별것 아닌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때론 그 별것 아닌 깨달음이 인간을 바꿔놓는다. 강아현이 그러했다.

    그녀를 가로막고 있던 사고의 지평선이 한순간 크게 확장됐다.

    -쾅!!!

    기해혈에서 시작된 또 한 번의 폭발.

    하지만 그것은 앞선 폭발들과는 또 달랐다.

    힘은 결국 무게와 속도다.

    옥녀진결은 기해혈의 진기를 폭발시킴으로 그 속도를 배가하는 격발형의 무공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단기간이지만 일류의 무사가 절정에 준하는 힘을 낼 수 있게 만들어준다.

    강아현의 진기가 변했다.

    분명 그녀는 절정에 준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뿐, 절정까지 너무나도 먼 길이 남아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십 년을 예상하지 않았던가.

    돈오와 점오. 돈수와 점수.

    깨달음과 수행에 관한 영원한 그 화두.

    분명 단기간의 깨달음으로 도약하기에 강아현의 수련은 아직 부족했다.

    하지만 시기가 좋았다.

    절정에 준하는 힘을 낼 수 있는 옥녀진결의 이단공.

    거기에 한순간의 깨달음이 더해졌다.

    절정이란 완성된 무인이다.

    강아현이 완성된 무인인가를 묻는다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깨달음으로 단단해진 그 진기가 삼단공의 옥녀진결을 만났다. 그리고 그것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절정의 경지에 부족한가를 묻는다면?

    강아현이 검을 쥐고 일어섰다.

    활불이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왼손을 뻗었다.

    단순한 동작.

    지극히 효율만을 생각하는 최단 거리의 일수. 하지만 산을 허물 힘과 소리를 뚫는 속도가 더해지니 그것 자체로 천고의 절학이다.

    그 앞에서 강아현이 검을 휘둘렀다.

    -챙챙챙챙챙챙챙

    일곱 번.

    자운검의 검식에 따라 순식간에 휘두른 일곱 초식이 그 일수를 막아냈다. 물론 그 댓가는 만만치 않았다.

    그녀의 코와 입에서 울컥 핏물이 솟구쳤다.

    하지만 한 호흡.

    그녀가 활불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박진문이 망설였다.

    여기서 튀어 나가야 할까? 아니, 아니다. 아직이다. 조금 더. 종자명의 기세에 몸을 맡겨야 한다.

    활불이 오른 주먹을 옆구리로 가져다 댔다.

    반의 반호흡.

    앞서 막힌 그 일수는 그저 손을 내뻗은 것에 불과했다. 상대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세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태양 앞의 반딧불이 보름달 앞의 반딧불이 됐을 뿐이다.

    소리보다 빠른 속도.

    인간이 만들어낸 물건 가운데 오직 채찍의 끄트머리만이 도달한 그 속도를 활불의 오른손이 뛰어넘었다.

    거대한 주먹이 공기를 꿰뚫었다.

    -쿠과과과광!!

    음속폭음(音速爆音)

    공기를 꿰뚫는 폭음이 사람의 손에서 터져 나왔다.

    삼공에서 흐르는 피가 호흡을 제약했다.

    하지만 경맥을 흐르는 기운의 흐름은 여전히 도도했다. 깨달음의 심상이 넘쳐 흘렀다.

    진정 중요한 것이 마음인지, 혹은 기술인지는 이제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강아현이 자신의 검을 펼쳤다.

    그것은 납매검도 자운검도 아니었다. 그 사이의 어딘가. 기종과 검종도 아닌 그 사이의 어딘가.

    약관.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서 자신의 길을 선택한.

    그것은 절정의 경지에 오른 옥녀봉 화산 검사의 검이었다.

    꽃이 피었다.

    피로 얼룩진 붉은 꽃.

    앞선 활불의 한 걸음이 수백장의 공간을 한걸음에 압축한 것 같았다면, 강아현이 펼쳐낸 그 한 송이 꽃은 팔을 뻗어 닿을 거리를 아주 미세하게 늘려, 팔이 닿지 못할 거리로 만든 것 같았다.

    공간 그 자체를 파괴하는 음속폭음의 권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그 대신 한 명의 화산 검사가 크게 뒤로 튕겨나갔다.

    그녀가 만들어낸 붉은 꽃과 같은 핏물을 흩뿌리면서.

    운호가 달렸다.

    강아현이 목격한 모든 것을 운호도 함께 목격했다.

    파검이 보여준 일검은 아름다웠다.

    그것은 저 무창부에서 스스로를 천하제일인이라 칭하던 노인이 보여주었던 일검을 닮아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 노인은 파검이었고, 저 검에 깃든 백 또한 파검이었으니.

    하지만 운호는 알 수 있었다.

    저 검과 그 검은 닮았으나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어느 것이 더 낫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그 일검으로 알 수 있었다. 정답 안에 갇힌 파검의 백은 생전 파검의 기억을 모두 갖고 있는데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지난 몇 년 동안 백운호 자신과 함께 걸었던 그 모든 길이 지금의 파검을 만들어냈음을.

    그리고 그 아름다운 일검이 사그라들었다.

    지난 삼 년.

    운호와 함께 걸었던 파검이 우그러진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최악의 기억이 떠올랐다.

    동시에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강구하기 위하여 뇌가 타올랐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한계를 벗어났지만, 그 육체는 여전히 한계에 갇혀 있었으며 기운은 경계에 닿지 못했다.

    이어지는 강아현의 일검 역시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약 팔 개월 전.

    운호는 포달랍궁의 삼장로인 텐진과의 싸움에서 그가 펼쳐내는 삼음절의 사자후를 정면에서 받아낸 적이 있었다.

    지금 강아현이 펼쳐낸 일검은

    한계를 벗어난 마음과

    한계에 갇힌 육체.

    경계를 넘지 못하는 기운이 어우러진 한 송이의 불완전한 꽃.

    하지만 그럼에도 화산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부끄럽지 않았던 그 꽃을 닮아 있었다. 물론 강아현의 그것은 운호의 것에 비하자면 부족했다.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마음과 한계를 경험하지 못한 육체, 경계에 닿지 못한 기운이다. 다만 그럼에도 당시 운호가 펼쳐낸 일검에 버금가는 놀라운 힘을 발휘한 것은 운호와 달리 그 세 가지의 기운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무력했다.

    그와 함께 오랜 시간을 수학했던 동료.

    아니, 어쩌면 그가 동경했던 아름다운 여자아이. 동시에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던 여인.

    강아현이 피를 흩뿌리며 저 멀리 튕겨 나갔다.

    벗어나는 것은 오직 정신.

    한계를 초월한 정신이 불가항력의 상황 속에서 가열되고 또 가열되고 또 가열됐다. 그리고 마침내

    –쾅!!!!

    한계를 초월했으나 모든 곳이 막혀 길을 찾지 못하던 그의 정신이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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