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누구의 잘못인가(38)
그리고 그 팽팽한 싸움 속.
먼저 수를 바꾼 것은 활불 쪽이었다. 그는 이 세 명의 고수를 상대하며 마치 늪에 한 걸음씩 빠져드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파악했다.
그것은 운호를 상대하는 고수들이라면 대부분 느꼈던 감각이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지만, 그 원하는 것이 상대방의 생각 대로인 것 같다는 감각.
오감을 넘어 육감까지 확장된 그의 감각이 그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는 점을 인지했다.
물론 활불 자신의 동작이 단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단순함은 복잡함을 단박에 파괴하는 초월자의 단순함이다. 그것을 읽어내고 몇 수, 아니 몇십 수를 예측한다고? 심지어 정신이 나간 채 무턱대고 달려드는 벽안검마와 저 음흉한 늙은 고자의 수까지 다 머릿속에 넣은 채로?
자신과도, 저 남쪽의 마라나 북쪽의 머저리와도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괴물이다. 다행이라면 아직 다 크지 않은 어린놈이라는 점 정도였다.
활불이 크게 호흡했다. 지금까지 그저 단순하게 손발을 휘젓던 것과는 사뭇 다른 동작. 박진문이 가장 먼저 그것을 감지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한 걸음.
순식간에 이백여 장을 이동했던 그 터무니 없던 수법이다.
절정의 고수가 완성된 존재라면 초절정의 고수는 인간을 초월하기 시작한 경지다. 물론 진정한 의미의 초월자는 인세에 존재할 수 없기에 그것 역시 반쪽에 가깝지만, 반쪽이라고 해도 이제 막 싹이 트기 시작한 반쪽과 꽃이 피기 직전의 반쪽은 다른 법이다. 활불은 굳이 따지자면 꽃이 트기 직전에 강제로 스스로를 멈춰둔 반쪽이라고 봐야했다.
그리고 이 한 걸음이야말로 활불이 가진 그 초월자의 편린이었다.
박진문의 몸이 활불의 그림자에 녹아들었다.
이전과는 달랐다.
마치 불타는 것 같은 열기. 뜨거워진 공기층이 그의 피부를 시뻘겋게 익혀나갔다. 그 사이로 그의 손바닥이 활불의 양다리를 움켜쥐었다. 마치 용암을 맨 손으로 잡은 느낌이 이러할까? 몸에서 훅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수증기가 초절정 고수, 그것도 한 쌍의 손으로 귀수(鬼手)라는 별호로 불리는 초절정 고수의 양손을 완전히 익혀버렸다.
그리고 그사이 종자명의 붉은 검이 활불의 허벅지에 긴 자상을 만들어냈다.
지금까지 공방을 이어간 가운데 가장 큰 성과였다.
활불의 시선이 생존자들에게 향했다.
이들이 대체 왜 여기까지 달려왔을까? 그리고 벽안검마는 대체 왜 저런 꼴로 지독하게 자신에게 달려드는 것일까?
간단한 이유다.
단 한 걸음에 이백 장.
전설상의 축지가 그러할까. 운호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터질 것 같이 부하된 그의 두뇌에 가능성이 스쳤다.
여기서 굳이 공방에 손해를 보면서까지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활불이라는 인간이 운호의 머릿속에서 해체됐다.
수백년의 세월 동안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행동 양식.
그리고 지금 그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
상대는 미치광이다.
저 녜룽 분지에서 일발 역전을 노리는 대신, 죄 없는 어린아이들과 여인네들. 그리고 후방을 지원하는 풀뿌리 문파들을 학살하는 것을 택했다.
그렇다면 지금 그의 선택은 너무나도 뻔하다.
운호의 검이 활불을 노렸다.
하지만 늦다.
“ㅇ ㅏ ㄴ . . . .”
운호의 입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가 의미를 갖추기도 전.
그 목소리보다 빠른, 아니, 감히 소리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마치 공간과 공간을 잘라 붙인 것처럼 활불이 대장군부의 생존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돼!!!!”
순식간이었다.
단순히 한 걸음을 옮긴 것만으로 한 사람은 몸의 절반이 사라졌고 또 한 사람은 왼팔을 잃어버렸다. 핏물은 터져 나오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나오는 뜨거운 증기가 살점을 지져버렸으니까.
비명성
아니, 그 비명성보다 빠르게 활불의 손이 팔을 잃어버린 이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압도적 폭력.
그에게 달려들던 일류 언저리쯤 되는 창위 하나가 허무하게 끓어 올랐다.
나름대로 공격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고는 조금의 피해도 줄 수 없다는 판단이었겠지만 틀렸다. 공격에 전력을 기울인다는 것은 몸을 보호하는 기운조차 남기지 않는다는 이야기였고, 지금 활불의 몸 주변 온도는 인간의 체액 따위 순식간에 부글부글 끓어오를 만큼 높았으니까.
초절정의 고수가 전력으로 이백 장을 주파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일까?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아무리 경공이 뛰어난 고수라고 해도 적어도 차 한 모금을 들이키는 시간은 필요하다. 운호의 경우 부운약표를 극성으로 발휘한다고 해도 적어도 다섯 호흡. 아니, 지금 상황에서는 일곱 호흡은 필요하다.
보통이라면 일곱 호흡 정도로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하지만 저 뜨거운 열풍을 내뿜는 파괴의 화신에게 일곱 호흡은 실로 어마어마한 시간이다. 그저 팔을 한번 뻗는 것만으로 서너 명의 머리를 터트릴 수 있고, 발길질 한 번에 일류 고수 수십이 삭제된다. 아니, 그저 근처에 걸어 가는 것만으로도 일반인은 살이 익어 사망할 것이다.
이성을 되찾지 못한 종자명이 가장 빨랐다.
그의 본능은 오직 활불을 쫓고 있었고, 그 본능이 가리키는 방향은 명확했으니까. 검붉은 기운으로 불타는 그가 전력으로 달려갔다.
박진문의 몸이 종자명의 그림자에 올라탔다. 전력으로 달린다면 그보다 조금 빠를 수도 있다. 하지만 저만한 적을 상대하는데 굳이 그렇게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박진문의 입장에서는 여기 인원을 다 잃는다고 해도 활불을 잡아낸다면 충분한 이득이다.
운호가 그 뒤를 따랐다.
한 걸음.
종자명의 몸이 쭉 뻗어나간다. 극성에 이른 부운약표도 감히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초절정, 그리고 절정. 함께 싸울 때는 느끼지 못했던 그 명백한 경계가 너무나도 절실하게 느껴진다.
-나를 던져라!!
그래, 파검이 있었다.
운호가 가진 가장 강력한 원거리 공격 수단. 파검이라면 어쩌면 잠깐의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쾅!!!
한 호흡.
강력한 진각과 함께 운호의 손끝에서 파검이 날아올랐다. 종자명과의 거리는 그만큼 더 멀어졌다. 활불의 주먹이 누군가의 머리통을 피곤죽으로 만들었다. 그래도 대장군가의 식솔 가운데 무공을 익힌 인물이었는지 어설프게나마 피하려는 동작 끝에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운호의 시선이 강아현에게 꽂혔다.
남궁혜의 마지막이 머릿속을 스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기력함. 그리고 그 사이로 뻗어 나온 공격의 파편. 그것은 남궁혜를 노린 공격도 아니었다. 남궁혜가 죽은 것은 하필 그 자리에 남궁혜가 있었다는 이유 뿐이었다. 그래, 굳이 이야기하자면 불운이다. 운호는 그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 항거할 수 없었던 재액을 그저 불운이라 치부해야 하다니.
파검이 맹렬한 기세로 날았다.
그의 마음과 운호의 마음이 같았다. 아니, 그의 마음이 운호의 마음보다 더 컸다.
파검 좌부원은 이 세상을 떠났다.
물론 정답에 깃든 그는 파검 좌부원의 생전 기억을 모조리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번뜩이던 좌부원의 영성이 없이, 그저 생전의 모든 기억과 습관만을 가지고 있는 백이 어떻게 스스로를 좌부원이라 칭할 것인가.
오직 운호뿐이다. 그래, 현재의 좌부원을 인지하고, 교감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운호뿐이었다.
이 년이 넘는 시간.
칠십 년이 넘었던 그의 인생에 비하자면 너무나도 짧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이 운호와 함께였다. 그 어린 것이 상처 받았고 발버둥 쳤으며 여기까지 걸어오는 모든 시간 속에서 파검은 함께였다.
-나는 용납하지 않겠다.
아직도 그날의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았다.
재잘대며 떠들고, 예쁜 여자를 보면 눈이 돌아가고, 눈이 마주치면 가슴이 콩닥거리며, 밤에는 몰래 담벼락도 넘어줘야 할 나이다.
그 모든 것들을 거세한 채 그저 홀로 검을 휘두르는 인생에 하나의 상처가 더해진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하늘에 닿았던 그 날의 영성은 없었다. 천하를 논하던 무적의 검술도 없었다.
남은 것은 그저 기억과 업보. 그리고 손도 발도 온기도 없는 날카로운 강철의 칼날 뿐이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겠는가.
천하를 논하던 검객이 검 그 자체가 되었으며.
감히 천하를 논하던 마음은 사라졌으나, 한 인간을 위하는 마음은 남아있었으니.
이미 그 한 인간이 그에게는 천하와 같은 것을.
그리하여 그렇게 그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쏘아진 검이 스스로의 의지를 발현했다.
파검류 오의
천하(天下)
그것은 파검 좌부원이 저 높은 곳으로 도약할 때 보여줬던 무적의 검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천하에 베는 것이 없다 자신하던 마음의 검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저 생전의 기억 그대로.
천하를 오시하던 마음 대신, 한 인간을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이 담긴.
검에 깃든 불완전한 귀신의 일검일 뿐이었다.
영현과 그녀의 어미 백가려가 신음했다.
이제 정말 끝이로구나.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희뿌연 안개가 갑자기 나타났고, 거기에 닿은 인간들이 피곤죽이 되어 쓰러진다. 그리고 그 희뿌연 안개는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그 영역을 넓혀오고 있었다.
저 하늘에서 또다시 검이 내리 꽂힐 때만 하더라도 잠깐 희망을 가졌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안개 속으로 들어간 검은 소식이 없었고, 안개는 여전히 빠르게 영역을 넓혔으니까.
그리고 그녀들 사이에 강아현이 있었다.
그녀는 영현이나 백가려보다는 조금 나았다.
몸의 상태는 온전치 않았지만 일류, 그 가운데서도 절정을 바라보는 고수의 눈이다. 그녀의 두 눈에는 영현과 백가려가 그저 시뿌연 안개라고 판단한 그 사이에 우뚝 선 거대한 거인의 모습이 똑똑하게 보였다.
화산 본산에 남아있는 장굉 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인이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본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도 장굉의 코 끝에 정수리가 닿는 사람도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참으로 터무니없는 괴물이다. 하지만 그 괴물의 진정 터무니없는 모습은 그 크기가 아니었다.
압도적 파괴.
그리고 그 사이로 운호의 검이 빛났다.
이전,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운호의 검은 실로 놀라웠다. 대체 어떻게 그런 수법이 가능할까 믿기 힘든 수준이다.
하지만 지금 날아오는 검은 또 달랐다. 이전의 검이 그저 강력했다면, 이것은 지극히 오묘했다. 그 일검에는 그녀의 오성으로는 감히 십 분지 일도 이해할 수 없는 무학의 이치가 존재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신선의 검이 아닐까? 혹여 운호가 무형의 검결을, 아니 어쩌면 그 너머를 대성이라도 한 것일까?
그리고
-터억!!
강아현이 비명 없이 절규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붉은 거인의 손이 그 검날을 그대로 낚아챘다.
저 어린 놈의 이기어검이던가? 참으로 괴물이다. 검에 담긴 이치가 얼마나 오묘했는지 무려 손가락이 ‘베였다.’
하지만 단지 그뿐.
절대적인 힘의 크기는 어쩔 수 없었다. 먹물이 아무리 검다고 해도 대해에 뿌린다면 아무런 흔적조차 남길 수 없을 지니.
저 어린아이와 그의 사이에는 그만한 간격이 존재했다.
여전히 그들과 활불의 사이는 멀었다.
활불이 원하는 것을 모조리 이루고도 남을 만큼 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