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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역대급 천재-189화 (189/288)
  • 189화

    누구의 잘못인가(37)

    지난 몇 달. 운호는 반야검을 지금처럼 펼쳐내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다.

    사실 반야검 명현식은 기초부터가 터무니없는 무공이다. 경맥과 경혈의 위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 다르다. 판관필과 같은 전문적인 무기를 사용해도 봉혈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가만히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해도 그렇다.

    헌데 검을 사용하여 전투의 과정에서 봉혈을 한다? 터무니없다.

    그렇기에 그 터무니 없는 검술의 창안자인 명현 신니도 정작 자파의 제자들 가운데는 누구에게도 전수하지 못한 채 연이 닿았다는 이유로 운호에게 전수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 오의라고 볼 수 있는 도피안검(到彼岸劍)까지 가게 되면 그 터무니없음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커진다. 경혈이 아닌 곳을 타격하여 봉혈을 한다? 물론 무공 가운데는 그에 못지않게 비합리적인 것들이 넘쳐난다. 검을 타고 하늘을 나는 어검비행이나 하늘의 별빛을 검으로 끌어오는 검강. 부서진 몸을 일순간에 회복하는 금강불괴지신 등 많은 것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그 모든 무공의 공통점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절정’이라 분류되는 곳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운호는 이미 검강이라는 명백한 초절정의 범주에 속하는 무공을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정답이라는 신검에 깃든 파검의 백이 돕기에 가능한 일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본래는 초월한 곳에 존재하는 무공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가 된다면 또 다른 것이 안 될 이유도 없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운호가 사용하는 도피안검의 초식이었다.

    그리 어렵지 않게 검을 휘둘러 만들어낸 결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본래 명현신니는 초절정 고수의 비대한 의념을 통하여 불가능을 가능의 영역으로 끌어내렸다.

    하지만 운호의 도피안검은 조금 달랐다.

    경혈과 경맥. 가장 중요한 곳과 그 중요한 곳들을 연결하는 통로. 경맥을 도는 막대한 기운들을 고작 검극으로 제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일반적인 봉혈이 자신의 기운으로 상대의 경혈을 틀어쥐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경맥을 건드리는 것으로 그것을 이루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운호는 조금 다른 선택을 했다.

    상대방의 경맥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힘을 더했다. 물론 말은 쉬웠지만, 이것 역시 보통의 일이 아니다. 이질적인 진기를 상대방에게 주입하고, 그 기운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진기도인을 방해하겠다니.

    파검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미쳤군.

    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처음 운호가 이 도피안검(到彼岸劍)을 성공했을 때

    -이런 미친 놈이?

    라고 평가했다.

    파검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사라진 몽원경에서 운호가 대체 얼마나 긴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굴불신마 영무결은 운호의 하루가 남들의 열흘과 같다고 평가했다. 그것은 운호의 오성, 그리고 그가 복용하는 벽곡단을 고려하여 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실제로 운호는 매일매일 남들보다 훨씬 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시뻘건 살기를 흩뿌리며 자신을 향해 뛰어든 종자명을 향해 활불이 주먹을 꽉 쥔 채 반바퀴 몸을 돌려 마치 철퇴처럼 팔을 크게 휘둘렀다. 어지간한 여자 머리통 크기만한 주먹이 위협적으로 날아들었다.

    -퍼억!!

    그것을 받아낸 종자명의 검이 크게 휘청였다. 그의 몸 역시 마찬가지로 크게 휘청였다. 하지만 부러지지 않는다. 검도, 종자명도. 그리고 그의 이글거리는 마음도.

    그렇지만 그의 몸이 크게 날아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활불의 시선이 운호에게 못 박혔다.

    -온다.

    파검의 이야기에 운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검은 활불의 공격을 대비하지 않았다.

    반야검을 펼쳐내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했다. 경지를 넘어서지 못한 이가 경지를 넘어선 무공, 아니 그것을 흉내낸 무공을 펼치기 위해서는 그만한 댓가가 필요한 법이었으니까.

    활불의 발길질이 운호의 몸을 향했다. 무학의 오묘한 이치 따위는 개나 줘버린 지극히 단순한 움직임. 하지만 그렇기에 이것 역시 무학의 극한이다.

    박진문이 움직였다.

    한순간 자신의 손가락이 활불의 등허리를 파고들 때만 하더라도 대체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전에 있었던 일들, 그리고 이후 벌어지는 일들에서 박진문은 모든 것을 파악했다.

    백운호다.

    무슨 짓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저 불굴의 요새와 같은 육체를 한순간이라도 무너트린 것은 그의 수법이 분명했다.

    그의 몸이 한순간 흐려졌다.

    은검귀조(隱劍鬼爪)라 했다.

    내관이란 그러하다.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햇볕을 쬐어야 할 본체가 사라져버린 그림자는 어찌해야 하는가.

    그렇기에, 복수를 완결한 이후의 박진문은 그림자에 숨어들지 않았다. 양지에서 그 거대한 몸을 드러낸 채 당당하게 살아왔다.

    뜨거운 열풍이 몰아치는 활불의 몸 바로 옆.

    시커먼 그림자 사이로 두 개의 검은 손아귀가 그의 발목을 낚아챘다.

    -꽈드득

    활불의 발차기를 완전히 막아낼 수는 없었다. 강맹한 위력을 품고 날아가는 저 발을 낚아챘다가는 귀조(鬼爪)가 아닌 신조(神爪)가 온다고 해도 손가락이 모조리 박살날 테니까.

    하지만 어디 공격을 흐트러 트리는데 그런 것이 필요하다던가. 박진문이 낚아챈 발목은 운호를 향해 날아가는 쪽이 아닌, 대지를 단단히 밟고 선 발목 쪽이었다.

    물론 그쪽 다리 역시 마치 천주(天柱)라도 된 것처럼 단단하게 대지에 못 박힌 채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추정되는 몸무게만 하더라도 약 사백 근. 저 어마어마한 발길질을 날리기 위하여 증강된 무게는 또 어떨 것인가. 박진문은 능히 만근의 무게를 들 힘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한 발로 선 활불을 넘어트리지 못했다. 오히려 손아귀에 엄청난 반탄력을 느낀 채 튕겨 나왔다.

    그리고 운호에게는 그 정도로 충분했다.

    운호가 깊숙하게 호흡했다.

    딱히 박진문과 미리 교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박진문이 저런 재주를 부릴 것을 알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박진문이 무슨 짓을 해서라도 활불의 공격을 막아낼 것을 예측했을 뿐이다.

    강맹하게 날아드는 발차기가 운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열풍만으로도 피부가 살짝 벗겨지고 살점이 열에 벌겋게 익어간다. 하지만 운호는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고도의 집중.

    박진문이 활불의 등에 열 개의 구멍을 만들고, 종자명이 뛰어들었으며, 활불이 그것을 두들겨 쫒아내고 다시 박진문이 활불의 다리를 움켜쥘 때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한 호흡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그 시간의 수백분의 일로 나눈 시간. 활불의 발차기가 운호의 코 앞을 스쳐 지나간 그 짧은 시간 사이로 운호가 활불의 오금을 바라봤다.

    -콰과광!!!!!!

    전력으로 휘두른 강철검이 인간의 오금을 두들겼을 때 난 소리라고는 믿기 힘든, 마치 거대한 포탄이 성벽에 부딪혔을 때나 날법한 굉음이 터졌다.

    조금 전 장심과는 달랐다. 사람의 오금은 명백한 약점으로 부극(浮郄), 위양(委陽), 위중(委中)이라는 족태양방광경(足太陽膀胱經)의 경혈 세 개가 모여있는 부위였다.

    정답을 타고 운호의 진기가 활불의 경혈로 침투했다.

    “감히!! 본불이 똑같은 수법에 또 당할성 싶더냐!!”

    활불의 몸이 한층 더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어마어마한 기의 폭풍우. 활불의 경혈은 그야말로 진기의 덩어리 그 자체였다. 기해혈이 아닌 67개나 되는 족태양방광경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그 경혈 하나에 담긴 기운이 운호의 내공 전체에 비할만했다.

    -쯧, 하여간 이래서 무식하게 힘만 키운 놈들이란······.

    차라리 운호가 내뿜은 진기가 맹렬하게 경맥을 공격하는 기운이었다면 활불의 말처럼 똑같은 수법에 또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미미했고, 동시에 너무나도 친화적이었다.

    마치 거대한 대접에 스며드는 한 방울의 먹물처럼.

    운호의 진기가 활불의 경혈 세 개를 동시에 마비시켰다.

    사지백해에 가득하던 기운이 한순간 사그라들었다. 특히 그 공격을 허용한 오른쪽 다리는 무릎 아래로 감각이 사라졌다.

    과거 유가밀공과 금강공을 모두 대성한 그의 육체는 무적이었다. 그 시절의 그는 금강석과 같은 단단함 속에 물과 같은 부드러움까지 갖췄었고 혈도의 위치를 순간적으로 옮기는 것 따위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을 테니까.

    이 어설프기 짝이 없는 육체가 참으로 원망스럽다.

    마비된 오른 다리. 그 약간의 틈 사이로 박진문의 공격이 살점을 끊어냈다. 물론 그 댓가로 그의 옆구리에 주먹을 한 방 날려주었지만, 결정타를 넣기는 부족했다. 저 눈이 훼까닥 돌아버린 벽안검마가 또다시 검을 휘두르며 달라붙었다.

    싸움이 길어졌다.

    고작 여덟 번의 호흡.

    그 짧은 시간 동안 대체 몇 번의 공방이 오고 갔을까? 싸움을 이어가는 네 사람의 시간 자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종자명이 또다시 달려들었다.

    지긋지긋하다.

    진작에 죽어 나자빠져야 마땅할 녀석이 끊임없이 달려든다. 덜렁거리는 왼쪽 어깨와 피로 범벅이 된 얼굴. 한쪽 다리는 뼈가 드러날 만큼 살점이 날아갔고 배에 난 구멍에서는 무언가가 흘러 나왔다. 몰골은 이미 시체나 다름없다.

    이것은 일종의 곡예다.

    절묘하게 세 개의 축이 맡아 떨어지는 곡예. 하나의 축만 박살이 나도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활불은 그 박살날 축이 종자명이라 생각했다.

    박진문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벌써 몇 번이나 그의 손가락이 활불의 몸을 파헤쳤지만, 저 금빛으로 빛나는 몸뚱이는 여전히 거대했고, 단단했다. 금강 계통의 외공을 익힌 몸이지만 외공의 특성상 회복력 자체도 남다르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아니, 아니다.

    박진문이 고개를 저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에는 이르다. 언제나 어느 상황에서도 길은 존재하는 법이다.

    운호 역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초조함을 가라앉혔다.

    -대체 언제까지!!

    활불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여전히 자욱했다.

    운호의 생각처럼 그는 자신의 체성분을 연소시켜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소비된 자원은 단기간에 회복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소비의 속도가 운호의 생각보다 느렸다.

    무엇보다 문제는 운호 자신이었다.

    항상 운호에게 가장 큰 문제는 내공이었다.

    그것은 운호가 타고난 체질, 천형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금 운호의 발목을 잡는 것은 내공이 아니었다.

    정신력.

    그것은 사실 운호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흔히들 정신은 무한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람의 정신 역시 생리적 작용이며 당연히 한계가 존재한다.

    지금 운호가 보여주는 도피안검의 초식은 기예의 극한으로 의념을 대신하는 기교라고 봐도 무방했다. 수도 없이 벌어지는 상황의 변수들을 실시간으로 처리하며, 그 사이의 실낱같은 틈새로 검을 찔러 넣는 행위의 반복.

    또한, 이 모든 싸움에 걸린 목숨이 자신의 목숨만이 아니라는 점.

    무엇보다 대장군부에서 자신과 가장 친밀하게 시간을 보냈던 종자명은 죽어가고 있고, 어머니를 생각나게 했던 영씨 부인이 사망했다는 현실까지.

    그 모든 것들이 운호의 정신이 점점 한계점으로 몰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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