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누구의 잘못인가(36)
인간의 몸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오래 전 활불은 그 해답을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먹은 만큼 움직인다. 더 많이 먹으면 더 많이 먹은 만큼 저장하거나 혹은 성능을 개선한다. 근육이 육체를 움직이는 장치라면 지방은 그 장치를 움직이기 위한 연료다.
무지막지하게 쌓아둔 지방이 활활 타고 있었다. 몸이 내뿜는 어마어마한 열기가 지방이 분해되며 생성된 막대한 수분으로 식혀진다. 한 번의 들숨과 한 번의 날숨에 어마어마한 기운이 오고 간다.
명백히 상리를 벗어난 현상이었다. 하지만 내공이라는 것은 본래 그러하다. 만약 그가 금강공과 유가밀공의 합일에 성공했더라면 지금 벌어지는 작업의 효율은 극도로 개선됐을 것이다. 최소 지금의 열 배, 어쩌면 백 배까지도.
내공은 불합리한 힘이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두 발로 걸어야 하는 사람이 하늘을 훨훨 날게 해주고 저 하늘의 별빛을 지상으로 끌어 내린다.
하물며 지금 활불은 그 이상의 댓가를 치루고 있었다.
-쿠과과과광!!
실로 압도적인 파괴력.
압도적인 힘은 그 자체로 파훼할 수 없는 무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활불이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종자명은 물러나지 않았다.
천살성의 화신이 된 그의 무공에 물러남이란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아갈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점점 뒤로 밀려났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순수한 힘의 격차였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내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그것이 저 압도적인 충격량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해소될 수 없는 뼈에 사무친 원한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자리 죽음에 더 가까운 것은 그의 원수인 활불이 아닌 종자명 자신이라는 점이었다.
박진문은 자신이 살아왔던 그 기나긴 세월을 돌이켰다. 이역의 타향에서 망국의 무사로 참으로 긴 세월이었다. 야망과 욕망으로 넘치던 시기를 지나 좌절과 오욕으로 가득했던 시련을 건너 피 끓는 원한을 갚고 천하에 손꼽히는 자리에 올랐건만 남은 것은 허무함 뿐이었다.
눈앞의 저 거인은 그의 운명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종의 자연재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린 초절정의 무인은 피가 끓었다.
감히 항거할 수 없는 압도적인 적. 그는 젊은 시절 이미 그런 적을 상대로 승리해본 경험이 있었다. 물론 눈앞의 활불과 같은 형태는 아니었지만. 하지만 그 감히 항거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그를 들끓게 했다.
박진문의 그 거대한 덩치가 마치 표범과도 같이 민활하며 탄력 있게 움직였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살이 익을 것 같은 열기가 그를 덮쳐온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밀려오는 저 압도적인 권력.
박진문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그 뒤로 운호가 달려왔다.
활불의 움직임에 밀려오는 열풍이 뜨겁다. 포원공의 진기가 운호를 보호하기 위하여 활발히 움직였다.
-쾅!!
예고 없이 날아온 활불의 뒷 발차기를 흘려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뼈마디가 비명을 내지른다. 훅하고 밀려오는 뜨거운 증기에 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포원공의 보호가 없었더라면 그대로 살이 익어버릴 열기다.
-젠장, 하여간 멍청해서는.
파검이 도망치라는 자신의 말을 당당하게 무시한 운호에게 불만을 표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마음 한켠에는 운호의 선택이 흐뭇하다. 그래, 모름지기 무인이라면 이래야지. 파검 역시 그러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찌 촌구석의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무인이 그 드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운호가 상황을 판단했다.
초절정, 혹은 그에 근접한 고수 셋의 합공이다. 물론 과거 마교의 대제사장은 그 이상의 상황에서도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상대는 활불. 마교의 대제사장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괴물이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업적 때문이다.
당대의 활불은 전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중론이고, 실제로 굴불신마 영무결은 단신으로 활불을 제압했다.
아니, 사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전대의 활불 역시 초절정 고수들의 협공에 목숨을 잃었다. 물론 수백이나 되는 절정을 참살했고, 당시 그를 죽이기 위해 달려든 초절정의 고수 숫자만 넷이었다지만 어쨌거나 여덟이나 되는 초절정 고수와 수백의 절정 고수로도 막아서지 못했던 마교 대주교와는 명백한 수준 차이가 존재한다.
지금 문제는 단순히 활불의 실력이 압도적인 것만이 아니다. 물론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긴 했지만, 그것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게다가 현재 그것을 극복할 해답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운호가 판단할 때 지금 문제는 합공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물론 지금 운호와 박진문, 종자명 역시 함께 활불을 공격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합공인가를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물론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 연마한 검진과 같은 효율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마치 일대일의 싸움을 셋이서 펼치는 것과 다름 없는 수준으로 싸우고 있었다.
사실 처음 손발을 맞추는 사람들끼리 자신의 실력을 온전히 발휘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제법 훌륭한 합공이라고 볼 수도 있긴 했다. 하지만 운호의 기준에서는 아니었다.
실제로 운호는 과거 종남산에서 종남의 소검후 종화, 그리고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철과 힘을 합쳐 그들의 기량을 아득히 뛰어넘는 고수를 상대로 승리해본 경험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세 사람은 딱히 손발을 맞춰본 적이 없었지만, 운호는 놀라운 기량으로 적절하게 상황을 만들어냈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은 그때 이성을 잃은 것이 적이었다면, 지금은 이성을 잃고 검을 휘두르 것이 우리 편이라는 점이다. 더 어렵다.
운호가 바짝 마른 입술을 혓바닥으로 핥았다. 하지만 뜨거운 열기에 혓바닥 역시 바싹 말라있기는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익혀온 수많은 검결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납매검, 매농검, 자운검, 광음검, 난풍검. 그리고 최근 비급을 읽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무형검까지. 명현사태에게 사사한 반야검 명현식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혀오는 괴물에게 운호가 또 한 번 접근했다.
그의 주먹이 종자명을 압박하고 있었다. 종자명은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그대로 그 주먹을 박살 내겠다는 기세로 검을 휘두른다.
활불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종자명을 압박하는 와중에 바닥을 한차례 크게 밟았다. 수천 년을 버텨온 단단한 화강암 지반이 부서졌다.
납매검이다.
활불의 동작 한 번에 운호가 대응했다. 박살난 화강암들이 한순간 떠올랐다. 강맹하게 휘두른 활불의 손바닥이 그 화강암들을 그대로 쏘아 보냈다. 이미 높아진 열로 벌겋게 달아오른 화강암들의 기세가 사뭇 위협적이다. 거기에 활불의 몸에서 나오는 수증기가 그 궤적을 어느정도 가려준다.
소용없었다.
쭉 뻗은 검이 한차례 흔들렸다. 화강암 돌덩이들의 궤도가 미묘하게 틀어진다. 그 한수로 대부분의 돌덩이들이 마치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것처럼 운호가 달려가는 궤도를 정확하게 비껴 지나갔다. 심지어 자기들끼리 부딪히고 부딪힌 녀석들 가운데는 오히려 활불의 등을 강타하는 것들도 존재했다.
그의 등을 강타한 돌덩이들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하지만 인왕상을 닮은 활불의 몸은 그것에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가루와 수증기 사이로 찰나와 찰나 사이를 쪼갠 것 같은 순간. 운호가 검강이 맺힌 정답을 내리쳤다.
광음의 한 수다.
하지만 활불의 몸 역시 마치 그것을 예상했다는 것처럼 움직였다. 종자명을 거칠게 밀어내고 빠르게 반바퀴를 회전했다. 그리하여 활불의 오른손. 손가락 하나, 하나가 어린아이 팔뚝만큼 두꺼운 그 손아귀가 운호의 검을 잡아채기 위해 움직였다.
그 순간 박진문의 양손이 활불의 등으로 향했다.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사람 몸통보다 두꺼운 활불의 광배근이 불끈 섰다.
-좋구나!!
운호의 검이 활불의 공격을 예측한 것처럼 움직였다. 아니, 사실 예측한 것이 맞았다. 너무나도 뻔했으니까. 활불의 어려운 점은 초식 따위는 모조리 무시할 수 있는 압도적인 파괴력이지 그 동작 자체에는 의외성과 오묘함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당연하다. 저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동작을 섞는 것 자체가 쓸데없는 행동이다.
게다가 운호가 생각하는 것처럼 활불이 저런 힘을 쓰는 것 자체가 비축해둔 자원을 소진하는 행위라면 그 동작은 최대한 간결해질 수밖에 없다.
운호는 자신이 익힌 화산 검술들을 매우 능숙하게 사용한다. 공수의 수발이 자유롭고 순간순간 초식을 쪼개서 사용할 만큼 완성도가 높다. 운호는 그것을 자신의 오성이 뛰어난 탓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 이유는 될 것이다. 하지만 애당초 화산의 검술이라는 것 자체가 증무진인 목운평이라는 고수가 스스로가 정한 규칙 아래 재정립한 검술들이다.
하지만 반야검은 달랐다. 단순히 목운평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애당초 도가와 불가의 철학 자체가 다르고, 역사가 다르다.
운호의 검이 정확하게 활불의 장심을 찔렀다.
활불은 저 별빛이 감도는 검이라고 해도 감히 자신을 해칠 수 없다고 믿었다. 설사 그 위력이 일반적인 검강의 수준을 뛰어넘는다고 해도 기껏해야 피륙의 상처다. 금강공을 대성하고, 심지어 그것조차 초월한 그의 근육은 금강석보다 단단하다.
-퍼억!!
운호의 정답과 활불의 장심이 만나는 그 순간.
활불은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검을 움켜쥐지 못했다.
반야검(般若劍) 명현식(明賢式)
도피안검(到彼岸劍)
저 남해의 신니가 전수한 불살의 검법. 그 궁극의 초식이 운호의 손에서 펼쳐졌다. 굉음에서 연결되는 자연스러운 초식의 전환. 물론 명현신니 본인이 펼치던 도피안검(到彼岸劍)만큼은 아니었다. 만약 명현신니가 지금 이런 상황에서 검을 펼쳤더라면 활불의 오른팔을 잠시라도 완벽히 봉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른팔에서 시작된 저릿한 느낌이 전신으로 쭉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한순간이었다. 한 번의 호흡을 수십 번으로 쪼갠 그야말로 찰나(刹那)라는 표현이 딱 적합한 시간. 활불의 피부 표면에 감돌던 금빛의 서광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시간 동안 박진문의 검은 손가락이 활불의 거죽을 뚫고 그의 등에 열 개의 구멍을 만들었다. 공격을 성공시킨 박진문 본인조차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당황하여 호기를 놓칠 만큼 어설프지 않았다.
박진문의 열 손가락이 활불의 몸을 더 파고드는 대신 손에 걸린 근섬유를 그대로 –뿌득 끊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활불의 몸이 다시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그 표면에 은은한 금빛이 어렸다.
우연? 행운?
활불이 고개를 저었다.
한계를 넘어선, 혹은 한계에 다가간 이들의 싸움이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애송이는 아직 벽을 넘지 못했음에도 벽을 넘은 이들과의 싸움을 헤쳐나온 변종이다. 우연이나 행운이 아닌 기량이라고 봐야했다.
활불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리고 그 측면으로 살기 그 자체의 화신인 종자명이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