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누구의 잘못인가(34)
파검이 소리쳤다.
-지금이다!!
파검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운호 역시 그것을 느꼈다.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금이라고.
박진문은 한 호흡 늦었다.
어쩔 수 없었다. 활불의 시선이 종자명에게 향하기 직전. 그의 시선이 머물렀던 곳은 박진문이었으니까.
그가 활불의 공격을 막아낸 모든 여력을 해소했을 때. 운호는 이미 별빛이 머무는 검을 휘두르며 승부에 나서고 있었다.
“조심!!”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앞서 한 차례 활불의 압도적인 호신강기를 체험해본 적이 있었다. 심지어 그 호신강기를 부쉈음에도 저 거대한 육체의 벽에 막혀 유의미한 타격을 주지 못하고 물러나기까지 했다.
이미 앞서 여러차례 확인했던 것처럼 운호의 검강은 진짜배기다. 하지만 초절정 고수인 자신이 전력으로 휘두르는 검강에 비하자면 조금 부족하다. 비유하자면 운호는 10의 힘을 가진 사람이고 종자명 자신은 100의 힘을 가진 사람. 그리고 검강은 10이라는 힘을 필요로 하는 수법이다.
10의 힘을 가진 사람이 10의 힘을 모조리 뿜어내는 것과 100의 힘을 가진 사람이 10의 힘을 사용하는 것. 출력된 힘의 크기는 같은 10이지만 그 안정성과 위력은 미묘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당연한 일이다. 싸움은 그저 검에 검강이 맺히게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 주변을 살펴야 하고, 상황을 읽어야 하며, 상대의 반응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
박진문이 한 박자 늦게 운호의 뒤를 따랐다.
활불에게 달려드는 운호의 시선은 다른 이들을 향하지 않았다.
그의 감각 역시 다른 것들을 보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검과 저 거대한 활불에게 모든 것을 집중했다. 그의 역량은 분명 검강을 발현하기에도 그리고 유지하기에도 벅찼다. 그 부족한 부분을 정답에 깃든 파검이 보조했다.
운호는 초식의 교환에 관해서는 상대방의 움직임을 읽고 그 운동량, 무게의 중심 등을 모두 파악하여 마치 상대의 공격을 미리 읽는 것처럼 대응할 수 있다. 그러한 운호의 재능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활불은 최악의 상대다. 그는 선 자리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오직 의념으로 만상을 지배한다.
달려가던 운호의 몸이 삼십도 왼쪽으로 휘청였다.
활불의 공격을 허용한 것일까?
아니었다.
-펑!!!
활불의 격공장이 허공에서 터졌다.
다섯 치.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회피다. 운호의 왼 다리가 땅을 강하게 짚었다. 그의 대퇴근이 크게 부풀었다. 한걸음에 넉 장. 그야말로 쏜 살과도 같다.
-퍼버벙!!
활불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거대한 장벽을 세우는 것처럼 달려오는 운호의 코앞에 거대한 격공장의 세례를 퍼붓는다. 그 징조 없는 폭발 바로 앞에서 운호의 몸이 누군가가 뒤에서 잡아당긴 것처럼 멈춰 섰다. 그리고 폭발과 폭발의 틈 사이로 또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마치 미래를 읽기라도 한 것 같은 움직임이다.
그와 함께 하는 파검은 이해하지 못했다.
격공장은 허공을 격하고 들어오는 기의 응집이다. 그것을 보고 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방법은 상대가 격공장을 발출하는 모양을 보고 피할 수밖에 없는데 지금 활불은 그런 동작조차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초절정 고수쯤 되면 피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초절정 고수는 그 형태나 방법이 어찌 됐건 기본적으로 어느정도 인간을 초월한 존재이며 그들의 영성은 미약하게나마 천기에 닿아 있다. 그렇기에 그 육감은 단순한 충동이 아닌 현실을 예측하는 혜안이 된다.
하지만 운호는 초절정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박진문이 방향을 틀었다.
종자명과 운호의 중앙 지점. 삼면에서 일거에 활불을 덮치겠다는 의도다. 너무나도 빤히 보이는 움직임이었지만 그럼에도 효율적이다.
활불의 공격이 거듭 쏟아졌다. 마치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운호가 그 공격들을 피해내고 또 흘려낸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쏟아지는 공격의 횟수가 늘어났다. 그 내공이 무한하기라도 한 것일까? 공격이 그치지 않는다.
-뭐, 저 정도면 무한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장작과 같은 연료는 불을 떼는 만큼 그 양이 줄어든다. 하지만 내공은 연료가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내공은 체력이나 근력에 더 가깝다. 열 근의 물동이를 나른다고 했을 때 열 근을 간신히 드는 사람에게 그것은 한차례 왕복하면 지쳐 쓰러질만한 일이다. 하지만 백 근의 무게를 드는 사람에게는 열 번이 아니라 수십 번도 너끈히 할만한 일이고, 천 근의 무게를 드는 장사에게 그것은 그냥 걸어다니는 것과 별 차이 없는 일이 될 것이다.
백팔십 년. 삼 갑자의 내공만 하더라도 인간의 한계라고 봐야 했다. 구 갑자의 내공은 단순히 그 세 배가 아니다. 그야말로 마르지 않는 화수분. 저만한 내공의 괴물에게 격공장 정도는 그저 보통 사람이 손을 떨치는 것과 같은 수준이다.
-콰과광
운호가 정말 간결하고 효율적으로 격공장들을 피해내며 활불에게 접근하고 있는데, 반하여 종자명은 무식하리만치 정직하게 활불을 향하여 달려들고 있었다. 그야말로 우격다짐으로 활불의 격공장을 찢어발긴다.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포효가 종자명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처음 희미하게 검날에만 일렁이던 불길하고 칙칙한 검붉은 빛의 강기가 그 영역을 크게 넓혔다. 검을 넘어 점점 그의 몸까지. 호신강기?
아니, 그와는 다르다. 호신강기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마음의 결정체라면 이것은 그저 누군가를 살해하겠다는 의지의 결정체. 그야말로 천살(天殺)이다.
사마외도(邪魔外道).
저것은 분명 사마외도다. 하지만 그 길이 어떠하건 저 모습을 보고 있자면 종자명이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초절정이다.
박진문은 운호와도 종자명과도 달랐다.
그의 별호는 은검귀조(隱劍鬼爪). 9척에 가까운 키. 장대한 체구. 어딜봐도 대장군감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저 외모에 은검(隱劍)이라는 별호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본래 그의 출신은 고려 출신 공녀의 호위무사로 호위 대상자조차 모를 만큼 스스로를 숨기는데 능숙했다.
덕분에 순간순간 운호나 종자명에게 조금 더 집중하는 찰나, 그의 행적이 희미하게 사라진다. 만약 박진문이 없었더라면 활불은 운호가 됐건 종자명이 됐건 하나는 더 확실하게 박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명의 초절정 고수.
그리고 그에 필적하는 고수 하나.
활불이 광소했다.
과거 그가 이러한 역천자(逆天子)의 길을 선택했을 때. 먼저 그 길을 걷던 역천자는 그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하늘은 역천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다. 항상 중요한 고비고비마다 너를 방해하기 위한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십칠 년 전.
그는 영무결을 보며 그것을 느꼈었다.
전대의 대장군이던 영균, 당대의 대장군인 영보.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른 절대자들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그들 가문에 내려온 심결을 절반도 채 익히지 못했었다. 그들은 활불을 상대하기 위하여 다른 초절정 고수들과의 협공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영무결은 달랐다. 그는 감히 천마를 자칭할만한 무공을 가지고 있었다. 활불은 영무결과의 싸움에서 절망을 느꼈고 그 결과가 지금의 이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금.
활불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저 세 사람을 바라보며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특히 저기 저 기묘한 모습을 보여주는 어린아이. 백운호에게서.
만약 셋 중 가장 약한 이를 꼽으라면 그는 주저하지 않고 저 아이를 꼽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느낌이 가장 불쾌했다.
이성과 감정.
그 가운데서 활불이 선택을 했다.
펼쳐지는 격공장들은 오직 그의 의지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공격 수단 가운데는 명확한 매개체를 가진 것 역시 존재했다.
사자후.
만마를 앙복시키는 신수의 외침.
서장 지역에 존재했던 왕국 가운데 하나인 쿠차 왕국의 전설적인 승려. 쿠마라지바가 창안한 전설적인 무공이 활불에게서 펼쳐졌다.
활불이 펼치는 사자후는 수백 년을 버텨온 거대한 성벽도 일거에 무너트릴만한 막대한 힘을 품고 있었지만, 동시에 쿠마라지바라는 전설적인 승려가 창안한 불문의 무공답게 막대한 항마의 기운 역시 내포하고 있었다.
만약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활불은 자신의 감정 그대로 운호에게 이 화살의 촉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쇄도해오는 적들 가운데 명백하게 마공이라고 할만한 무공을 익힌 것은 저 천살성의 화신. 벽안검마 종자명 쪽이었다.
-옴-
한음절의 파괴가 종자명에게 향했다.
그 사이 운호와 박진문이 활불에게 완벽하게 들러붙었다.
신검 정답에 맺힌 별빛이 밝게 빛났다.
파검은 원했다. 운호가 오늘을 이겨내기를.
아직 어린 이 아이가 과거의 상처에 매몰되지 않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너무나도 잔혹하게 잃어버린 이 아이가 또 다시 그런 경험을 하지 않기를.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힘을 이 일격에 보탰다.
그와 동시에 싸움의 이유를 잃어버린 고려의 무사가 오늘도 싸움을 이어갔다. 그의 양손은 언제나와 같은 검은 빛으로 번들거렸다.
-콰과과과광!!!
동시다발적으로 울려 퍼지는 막대한 충격음.
절대적인 방어의 의지가 그들의 공격을 막아섰다. 하지만 사자후를 펼쳐낸 직후이기 때문이었을까? 그 단단함은 처음 박진문이 검을 휘두를 때와 같지 않았다.
무르다.
무진장의 내공을 가진 활불에게도 사자후와 같은 무공은 제법 무리가 가는 무공이었다. 과거 초절정의 고수였던 텐진도 삼음절의 사자후를 사용하고 몸에 쌓아뒀던 지방 가운데 이 할을 잃어버렸다. 활불 역시 그 거대하던 몸이 조금은 줄어든 느낌이었다. 워낙에 거대했던 터라 크게 티는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활불의 호신강기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활불의 호신강기가 물러진 것 이상으로 박진문은 약해져 있었다. 운호 역시 초절정에 버금가는 고수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초절정에 버금가는 고수일 뿐이다. 게다가 그의 특기는 수싸움이지 일발의 파괴력이 아니었다. 박진문이 휘두르던 대검의 압도적인 파괴력과 비교하자면 명백하게 부족하다.
활불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달려들던 종자명을 처치했으니 이제는 남은 두 명을 밀어낼 차례였다. 조금 고생했고, 진원에도 손해를 보긴 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남는 장사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절대적인 파괴의 사자후가 터져 나왔던 그 자리에서 검붉은 빛의 유성이 활불의 등으로 날아들었다.
당대의 대장군 영보는 천살의 무공을 완성하며 이렇게 말했었다.
“살인을 통하여 완성한 무공이 초월에 닿는 길은 활인에 있음이 당연하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태어나 그저 누군가를 파괴하는 것밖에 배우지 못했던 불쌍한 아이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그 빈 자리에 그녀를 받아들임으로써 무언가를 소유할 수 있었다.
진정으로 상실이 아픈 순간이 언제인지 아는가?
처음부터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던 사람은 당연히 상실에도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소유했던 적이 없으니 상실도 아플 수 없다.
영화가 죽었다.
그리하여 천살은 마침내 생명이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아픈 일인지를, 상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를 절절하게 깨달았다.
살인을 통화여 완성한 무공이 초월에 닿는 길은 활인에 있음이 당연해야 했다.
하지만 살인을 통하여 완성한 무공이 상실을 통하여 초월에 닿았을 때.
피투성이의 천살(天殺)이 활불의 호신강기를 박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