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누구의 잘못인가(33)
종자명은 유곽의 아이로 태어났다.
유곽의 아이는 그리 드문 것이 아니었다. 유곽에는 피임과 낙태의 비방이 내려왔지만, 그것들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고 생명이 아주 질긴 아이들은 그 비방들 속에서도 기어코 세상의 빛을 보곤 했으니까.
정말로 드문 것은 그의 피부와 눈 그리고 머리카락의 색깔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중원에서 태어나 중원에서 자랐으며 중원의 옷을 입고 중원의 말을 쓴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그를 이방인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어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렇게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였다.
많은 일이 있었다.
그 많은 일들 속에서 종자명은 대장군 영보의 선택을 받았고 그가 계획했던 천살을 완성했던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했던 사건은 아니었다. 종자명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사건은 그 평생의 반쪽인 영화를 만났던 일이었으니까. 많은 사람이 그와 영화의 혼인에 대하여 대장군부의 혈육과 미래가 유망한 고수의 정략혼이라고 했다.
“왜 그 잘생긴 얼굴을 그렇게 매일 찌푸리고 다니는 거예요?”
“난 당신 눈동자가 참 좋아요. 파란 게 마치 하늘 같잖아요.”
“하얀 피부가 뭐가 어때서요. 전 우리 아이도 그렇게 하얬으면 좋겠는데요?”
“미안해요. 모든 게 다 내 잘못이에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다른 여자를 만나면······.”
단장(斷腸)의 아픔이라고 했다. 문자 그대로 종자명이 피를 토하며 절규했다.
영현과 그 어미 백가려가 그런 종자명을 바라보며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한 걸음 차이였다. 만약 그녀가 한 걸음만 덜 걸었더라면 그녀는 아마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들이 영화의 죽음을 방조하거나 조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생겨나는 죄책감.
종자명의 눈에 붉은 핏발이 곤두섰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 터져나오는 괴성과 함께 그가 라마승 무리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흡사 야차와 같은 기세였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그녀를 죽인 것이 누구인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완성된 천살은 완벽하게 정제되어 검강의 형태로 발현된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저 터져 나오는 살기가 있는 그대로 방출됐다.
그것은 마치 남궁세가의 제왕검결을 연상케 했다. 제왕검결에 당한 이들은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딱딱하게 몸이 굳는다. 전투에 앞서 활성화된 교감신경을 한층 더 강력하게 자극함으로 만들어내는 이적이다.
종자명의 천살은 원리는 그와 같지 않았으나 그와 비슷한 효과를 만들어냈다. 마치 호랑이 앞에 선 토끼처럼. 그 압도적인 살기가 라마승들의 반응을 늦췄다.
-서걱
마치 잡초라도 수확하는 것처럼 손쉽게 라마승의 목이 날아갔다. 그렇게 하나씩 라마승들을 죽여나갈 때마다 종자명의 살기는 해소되기는커녕 점점 더 깊어졌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의 살기가 행동을 제약한 것은 라마승들만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피아를 가리지 않는 그것에 당황하여 죽어나간 창위들 숫자 역시 적지 않았다.
운호의 검을 억제하고, 동시에 박진문의 공격을 수월하게 막아내던 활불이 자신의 시선을 그 폭발하는 살기의 원천에게 돌렸다.
예감이 영 좋지 않았다.
스스로를 부처라 칭하는 활불이다. 비록 그 영성은 천리(天理)에 닿지 못했으나 그 수백 년의 경험은 능히 천리를 논할만하다.
그의 마음이 움직였다.
-퍼억
종자명의 머리가 크게 뒤로 튕겨 나갔다. 안그래도 각혈하여 피로 물들어 있던 얼굴에 핏물이 더해졌다.
코로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우드득, 흥.
손을 들어 코뼈를 맞추고 코에 뭉친 핏덩이를 내뱉었다. 활불이 미간을 찌푸렸다. 마지막 순간 스스로 몸을 날려 피해를 분산했다. 안좋은 예감이 맞아 떨어지는 것인가? 목뼈를 분지를 생각으로 작정하고 손을 썼건만 너무 미미한 피해다.
약간의 빈틈.
박진문이 그것을 놓치지 않고 쇄도했다. 검게 물든 손끝이 활불의 호신강기를 파고들었다. -끼기기기긱!! 마치 유리를 손톱으로 긁는 것 같은 불쾌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소음의 끝. 마침내 박진문의 손 끝이 활불의 몸에 닿았다.
-합!!!
그러나 그것도 잠시.
활불의 외침 한 번에 박진문의 몸이 뒤로 크게 튕겨 졌다. 호신강기를 파훼했음에도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한 상황. 하지만 그렇게 튕겨 나가는 박진문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쾅!!!
마치 우레 소리와 같은 굉음이 터졌다. 그 굉음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운호. 그가 정답을 내리누르던 힘을 박살 내고 마침내 검을 크게 휘둘렀다.
활불이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시선이 운호를 따라갔다.
보이지 않는 공격들이 운호를 덮쳐왔다.
조금 전 종자명의 코뼈를 분질렀던 공격들과 흡사한, 하지만 단발성이 아닌 연달아 이어지는 공격들이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공격. 일종의 격공장과 같다. 하지만 더 까다롭다. 격공장은 그래도 손을 휘젓는 모양이라도 있지만 이것은 그런것도 없다. 아무런 전조증상 없이 허공에 갑자기 형성되는 공격들인 셈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운호는 그 공격들을 마치 당연히 그러한 것처럼 하나하나 받아냈다.
파검이 활불의 그 공격에 크게 감탄했다.
-이런 미친. 기운을 이런 식으로 뭉쳐서 내던진다고?
물론 너무 대단한 기술이기에 감탄한 것이 아니다.
-이건 그야말로 비효율의 극치로구나.
밥을 먹는데 굳이 발가락으로 젓가락질 하는 꼴을 본 적이 있는가?
잘 서있던 사람이 세 걸음 떨어진 곳을 이동하는데 굳이 자리에 누워 데굴데굴 굴러가는 꼴은?
지금 파검이 본 활불의 공격은 그와 같았다.
초절정의 고수가 장풍을 발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저 그러겠다는 마음을 갖고 내공을 움직여 손을 흔들면 그만이다. 하지만 거기서 손을 움직이는 과정을 제외한다면? 물론 은밀해진다는 장점은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소모되는 내공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지금 활불이 하고 있는 짓이 바로 그런 짓이었다.
대체 얼마나 여유가 있으면 저런 짓이 가능한 것일까.
활불의 공격이 조금씩 힘을 더해갔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눈동자뿐. 그 터무니 없음조차 넘어선 막대한 기운이 그의 마음을 현실에 구현해주었다.
박진문이 그 싸움에 합류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저 작자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니까.”
“네? 움직이지 못하는 거라고요?”
어느 것이 선이고 후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박진문은 확신했다. 그저 꾸역꾸역 내공으로 가득 채운 몸이다. 움직임 자체에 제약이 올만큼. 그래, 저 활불이라는 작자는 마치 터지기 직전의 풍선과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정확히는 움직이는 것이 더 손해라고 봐야겠지. 저 비대한 몸뚱이를 좀 보거라. 저게 어디 무공을 펼칠만한 몸뚱이란 말이더냐. 내가 지금까지 싸우는 동안 저 작자가 움직인 것은 술법을 활용한 것 같은 발걸음 한 번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 역시 함정일수도······.”
박진문이 고개를 저었다.
“만약 저 자에게 느껴지는 저 터무니없는 기운이 일반적인 그것이라면 저 작자는 이런 짓을 할 이유도 없었다. 그저 대장군부의 본대를 박살 내면 그만이었지.”
“무언가 약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단 뜻이로군요.”
활불의 시선이 또 한 번 종자명에게 향했다.
-퍼억!!
그 사이 라마승 일곱의 목을 벤 종자명이 이번에도 활불의 공격을 허용했다. 이번에는 그 공격으로 종자명 왼쪽 어깨의 살점이 한 웅큼 떨어져 나갔다. 어깨가 아닌 얼굴을 노린 공격이었다.
종자명의 얼굴에 살기가 한층 더 진해졌다. 라마승들의 핏물과 지방으로 더러워진 장검이 또 다른 라마승의 모가지를 날려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뭐라 말할 수 없는 기괴한 외침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넘실대는 살기. 짐승과도 같은 본능적인 움직임.
그것은 완성되지 못한. 아니, 종자명이 영보가 전수해준 무공을 익힘으로써 천살의 기운을 정제하기 전의 모습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종자명은 대장군 영보가 창안했던 천살의 무공을 타고난 체질과 자라온 환경 그리고 그 자신의 재능으로 완성 시켰다. 초절정 고수의 상징인 검강(劍罡). 종자명이 사용하는 천살의 기운은 그 검강에 거의 근접한 기운이었고 그렇기에 그것을 완성한 것만으로도 일반적인 절정 고수를 상회하는 무력을 뽐낼 수 있었다.
절정의 고수는 무공의 완성이며 초절정 고수는 무공의 초월이다. 대장군 영보는 자신의 막내 제자가 초절정 고수가 되는 길이 인간에 있다고 봤다.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의지가 아닌 함께 살아가겠다는 마음. 살인을 통하여 완성한 무공이 초월에 닿는 것은 활인에 있음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그는 종자명이 자신의 아내와 알콩달콩 살아가는 것에 만족했다. 아니, 혹여 초절정에 닿지 못한다면 또 그것은 어떠한가. 불행으로 얼룩졌던 막내 제자의 삶이 저토록 행복하거늘.
라마승의 기름과 핏물로 얼룩진 그의 검은 라마승들의 생명을 또 하나 빼앗았다.
그 거대한 불길함에 활불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종자명에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백운호와 박진문.
그들은 매우 영리하게 활불을 상대했다.
처음 한 번은 그저 라마승들과 창위들간에 벌어지는 싸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공격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공격으로 한 차례 손해를 봤음에도 굳이 한번 더 그런 공격을 시도하는 순간 깨달았다.
뭔가 있구나.
백운호는 그 타고난 영리함으로. 박진문은 거기에 오래된 경험까지 더해졌기에 잘 알고 있었다.
싸움이란 본래 상대방이 싫어하는 행동을 반복할수록 유리하진다는 사실을.
굳이 무리해서 활불을 어떻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시선이 종자명에게 쉽게 가지 못하도록 위협적인 공격으로 그의 손발을 묶어두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마침내 세 번째.
활불이 제법 큰 피해를 무릅쓰고 종자명에게 또 한 번 공격을 가했다. 이전보다 한층 더 강력한 공격. 운호와 박진문에게 제법 큰 피해를 감수한 공격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이성을 잃어버린 것 같은.
그저 흉흉한 붉은 빛의 안광으로 라마승의 모가지를 날리는 것에만 집중하던 종자명이 크게 몸을 움직여 기름과 핏물로 범벅된 검으로 무언가를 후려갈겼다.
-쾅!!!
제법 큰 충격음.
활불의 격공장이 갈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라마승들의 핏물과 지방, 각종 오물이 떨어져 나간 종자명의 검이 보였다.
강철의 은백색?
아니, 아니었다.
종자명의 손에 들린 검에는 빛이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검붉은 빛의 어둡고 칙칙한 무언가가 감돌고 있었다.
여전히 이성이 돌아오지 못한 것 같은 눈빛.
종자명의 몸이 활불을 향하여 크게 도약했다.
그리고 그보다 한 걸음 먼저.
운호의 검극에 별빛이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