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누구의 잘못인가(32)
그것은 행운이었다.
그곳에서 상리를 벗어난 거대한 크기의 힘이 느껴졌다. 어마어마한 거리를 격하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저릿한 기운이다.
-이런 미친······.
파검이 신음했다.
그가 기억하는 최강의 고수는 마교의 대주교. 고통의 가면을 쓴 그 남자였다. 그가 보여줬던 그 하늘과 땅을 잇는 용화수는 그것이 과연 사람인지를 의심케했었다.
그리고 지금.
저 멀리서 느껴지는 기운 역시 그와 같았다. 초절정 고수 서넛의 기운을 하나로 모아도 저럴 수 있을까?
-설마 어디서 용의 내단 같은 거라도 주워 먹은 건가?
운호 역시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은 그런 허무맹랑한 상상이 아니라면 납득하기 힘든 실로 어마무시한 내공이었으니까.
‘그래도 다행입니다.’
-다행이라고? 너 제정신이냐? 저건 거의 그 괴물놈과 비슷한 괴물 같은데?
‘어쨌거나 저런 기운을 풍겨댄다는 것 자체가 아직 상황이 끝난 게 아니라는 소리니 다행인 건 사실이죠.’
-그야 그렇지만······. 세상에 저런 괴물이 또 있을 줄이야. 아니지, 아니야. 세상에 그런 괴물놈이 둘이나 된다는 가정보다는 그냥 그 놈이 또 나타났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겠는데?
‘본인 입으로 이십 년이라면서요.’
-그래, 분명 내가 그랬었다고 그랬지. 근데 이상하게 흉터로 가득했던 그 커다란 나무를 본 이후의 기억이 없단 말이지.
한가하게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달리던 발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쭉쭉 달려나가는 운호를 바라보며, 그를 따라오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눈을 희둥그랗게 떴다.
태양과 같은 기운에 가려져 있던 익숙한 작은 기운이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니, 결코 작은 기운이 아니다. 그 비교 대상이 워낙에 터무니없었기에 그러했지, 저 기운의 크기 역시 작지 않다.
‘박태감은 무사한 것 같네요.’
그리고 그 주변을 떠도는 수많은 기척.
달려 나가던 기세 그대로 운호가 정답을 뽑아 들었다.
-운호 너 설마?
‘이미 한 번 이야기했던 적 있잖습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아니, 그건 그냥 이야기였고 상식적으로 그게 쉽게 가능할 리가······.
‘애초에 지금 상황도 상식적인 상황은 아니잖습니까. 그러면 갑니다.’
달려 나가던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마치 투창을 던지는 것처럼. 오른팔을 크게 뒤로 뻗어 힘차게 앞으로 내뻗는다. 약 50도의 높은 각도. 정답이 정확히 어디에 도달할 지는 알 수 없었다. 신경 쓴 것은 그저 가장 멀리 내던지는 것뿐이다.
-쾅!!
운호의 손을 떠나간 정답이 공기를 밀어냈다. 하지만 공기가 밀려 나가는 속도보다 정답이 날아가는 속도가 더 빠르다. 마치 채찍의 끝이 공기를 찢어낼 때처럼. 소리의 속도를 벗어난 정답이 거대한 굉음과 함께 하늘 높은 곳으로 날아올랐다.
그렇게 저 높은 곳으로 날아오른 정답이 스스로의 방향을 조절했다.
운호의 의념은 이미 끊어진지 오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귀신들린 검이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인다고 보기도 어렵다. 애당초 이 높은 고도까지 오른 것 자체가 운호의 힘이 만들어낸 결과였으니까.
대략적으로 가늠된 위치에서 검극이 수직으로 곤두섰다.
그 어마어마한 기운의 덩어리? 물론 매력적인 공격 대상이다. 하지만 파검 스스로가 생각할 때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무엇보다 운호가 원하는 것은 그 쪽이 아니다.
부상 당해 피 흘리고 쓰러진 강아현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접근하는 왠 못생긴 늙은이가 보였다. 본래 원거리의 공격에서 시작점에서 한 치의 어긋남은 도착점에서 수십 장의 차이가 되기 마련이다. 미세한 조정. 정답에 깃든 파검이 그것을 완벽하게 해냈다.
-퍼억!!
정답이 라마승의 몸을 가르는 그 순간.
하늘에서 떨어지는 정답을 감지한 사람은 오직 둘. 인간이긴 한 것인가가 의문인 집채만 한 덩치의 라마승과 은검귀조 박진문 뿐이었다.
“운호?”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강아현의 입에서 운호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쯧, 고생은 노부가 다 했거늘. 하여간······.
여전히 운호의 의념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한 수는 분명한 효과를 불러왔다. 잠깐의 소강.
활불이 정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기어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저 검은 그저 한 차례 거세게 날아왔을 뿐, 그 이후로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단순한 비검술인가? 하지만 비검술로 대체 어떻게 이런 위력을. 아무리 정상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절정의 고수가 반응도 쓰지 못하고 절명할만한 위력이라니.
하지만 그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바닥에 박혀있던 정답이 꿈틀대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제야 활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검(鬼劍)이로구나. 헌데 이런 위력의 귀검이라니. 대체 어떤 장인이 있어 이 시대에 이런 검을 만들어냈을꼬.”
-왔구나!!
끊어졌던 감각과 감각의 연결.
자신을 인도하는 기운을 따라 파검이 날아올랐다. 하지만 활불은 그것을 그냥 지켜보지 않았다.
“어딜 감히!!”
파검 주변의 공기가 단단하게 응축됐다.
조금 전 박진문을 압박했던 예의 그 수법이었다. 그것은 천생신력을 타고 태어나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박진문조차 쉽사리 떨쳐낼 수 없던 수법이다. 날아오르려던 정답이 –털썩 바닥에 달라붙었다.
-이이익!!
생소한 감각이었다.
정답은 파검이 머무는 육체였지만 사람의 몸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는 정답에 거한 이후 단 한 순간도 ‘고통’을 느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를 짓누르는 이 불쾌한 감각은 명백히 그에게 고통을 선사하고 있었다.
“이렇게 기대하지 못했던 소득을 얻게 된다니 아무래도 오늘은 운이 좋은 것 같구나.”
“물건의 주인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도둑질이라니. 늙은 스님께서는 참으로 염치가 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 땅의 주인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거늘 너희 중원의 도둑놈들은 이곳을 너희의 땅이라 하는데, 고작 이깟 칼 하나 내 것이라 말하는 것이 뭐 어떻단 말이냐. 안 그러냐 아이야?”
거대하다.
힘들게 달려온 운호가 처음 느낀 감각이었다. 느껴지는 힘의 크기도, 그리고 물리적인 크기도. 모두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했다.
“서장은 옆마을 사람이 도적질을 하면 옆마을의 것을 아무것이나 훔쳐가도 괜찮은지 모르겠으나 중원의 법도는 그와 다릅니다. 죄를 따지려면 도적질을 한 사람에게 따져야지 어찌 그와 무관한 이에게 그것을 묻는단 말입니까.”
“글쎄, 도적질 해온 물건으로 배불리 먹고 자고 살아왔다면 그 죗값 역시 함께 물어야 하지 않겠나?”
“그런 터무니 없는 논리로 이 땅의 무구한 백성들을 약탈하고 강간하고 살해하며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드는 겁니까?”
“약탈? 대체 누가 먼저 우리의 터전을 빼앗았는가. 누가 먼저 우리를 저 거친 황무지로 내몰았는가. 죄업 위에 쌓아 올린 무지는 마찬가지로 죄업이다. 그것은 약탈이 아닌 정당한 권리의 행사이며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팔백 년!! 팔백 년이 지났습니다. 늙은 스님께서는 지금 이 땅에 살아가는 이들이 정말 그런 이들이라고 믿으시는 겁니까? 그들 가운데는 십수 년 전 국경을 넘어온 장족들도, 수백 년 전 국경을 넘어와 정착한 장족들도, 심지어 그때 황무지로 나가지 않았던 장족의 후예들도 있습니다.”
활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저 변절자들이며 민족을 저버린 부역자들일 뿐이다.”
“하지만!!”
운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서른일곱 번의 호흡.
외상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기의 흐름만큼은 8할 이상 돌아왔다.
박진문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하늘에서 검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지금을 준비했다. 저 특징적인 검이 누구의 것인지는 뻔했다. 중원이 넓다고 하지만 저런 검으로 이기어검을 펼치는 고수가 둘일 리는 만무했다. 심지어 그 검이 구해낸 사람이 백운호가 자신에게 부탁한 여아임에야.
처음에는 다 됐다고 생각했다. 운호는 일반적인 절정을 훌쩍 상회하는 고수이기 이전에 수색단의 단장이었다. 수색단 전체, 아니 일개 천인대만 데리고 온다고 해도 상황은 역전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감각에 느껴지는 기척이 너무 적었다. 물론 앞서 두 차례나 활불에게 큰 코를 다쳤음에도 그는 자신의 감각을 완벽하게 신뢰했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그의 감각이 옳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공격.
시커멓게 물든 손가락이 비대한 활불의 허리를 노렸다.
-쾅!!!
활불의 몸이 흔들렸다. 하지만 여전히 움직임은 없었다. 운호가 정답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동시에 그의 몸 속에서 삼단공에 이른 포원공(抱元功)이 묵직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정답은 그저 –꿈틀꿈틀 약간의 미동만을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크윽······.
운호의 귀에 파검의 신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정답 근처에 다가갔을 때, 운호는 파검이 어찌하여 그런 신음을 내고 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묵직하다. 그리고 파검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 무게감은 더 커졌다.
운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정답의 움직임 역시 조금씩 커졌다.
-쿠과과과광!!
박진문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가 조용히 호흡을 고르는 동안 활불은 정답의 움직임을 억제했으며 운호와 대화를 나눴다. 당연히 더 많이 회복되는 것은 박진문 자신이어야했다.
하지만 힘의 크기 자체가 달랐다.
십의 팔 할은 팔이지만 백의 팔 할은 팔십이다. 물론 박진문과 활불 사이에 힘의 크기가 열 배나 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세 배. 박진문이 팔 할의 힘을 회복하는 동안 활불이 칠 할만 회복한다고 해도 그 회복의 절대치는 활불 쪽이 더 높다.
박진문이 소리쳤다.
“백 장군!! 아직인가!!”
답할 기운조차 없었다.
한껏 확장된 횡격막. 전신의 기운이 일점에 집중됐다. 이제 정답까지의 거리는 세 치 반. 하지만 그 거리는 너무나도 멀었다.
그리고 본래 활불을 도와 박진문을 치던 두 명의 절정 고수가 그에게 합류하려는 찰나.
익숙한 얼굴들이 그들을 막아섰다.
“워워, 너는 나랑 손을 나눠보자고.”
“그러면 너는 나랑 붙으면 되겠네.”
왕효, 그리고 장당.
수색단의 두 절정 고수였다. 갑작스럽게 달려 나간 운호를 따라오느라 기운이 조금 흔들리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랜 시간 싸워온 상대도 마찬가지일 터.
“부인!!!”
그리고 그들보다 조금 빠르게.
벽안의 장년인이 탈출한 대장군부의 식솔들을 향하여 달려갔다. 물론 쉽지 않았다. 라마승의 숫자는 동창의 창위들보다 많았고 그 수준 역시 만만치 않았으니까.
하지만 절정의 고수가 자신의 몸에 상처가 나는 것을 감수해가며 최대한 빠르게 돌파하는 것을 막아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야말로 양떼들 사이로 뛰어든 늑대와 같은 기세. 천살을 완성한 무인의 강기가 라마승들을 도륙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가 자신이 찾던 곳에 도착했을 때.
종자명을 기다리는 것은 하얀 얼굴을 한 그의 반쪽이었다.
“부······부인······. 영매······. 영매. 영매!!!!”
영화.
향년 51세.
사라진 것은 하체의 삼분지 일. 사인은 과다출혈로 인한 충격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