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누구의 잘못인가(31)
강아현을 비롯한 동창의 창위들을 향한 압박이 줄어들었다. 박진문의 활약 덕분이었다. 활불만 하더라도 무시무시한 상대였거늘 무려 넷이나 되는 절정이 더 그에게 따라붙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박진문은 그것을 견뎌냈다. 전신이 피칠갑이 되는 와중에도 기어코 절정 고수 둘을 더 참살했으며 활불의 공격이 그들을 향하지 못하도록 묶어두었다. 그 가운데 백미는 활불이 전력을 깃들인 사자후. 수십 장의 성벽을 단박에 무너트린 그것을 고작 한 자루의 대검으로 막아낸 것이었다.
물론 그 대가로 황실에서 하사받은 그의 대검은 더 이상 검이라 부를 수 없는 형태가 돼버렸지만, 그는 자신의 별호가 괜히 은검귀조(隱劍鬼爪)가 아님을 증명하듯 그 굴강한 열개의 손가락으로 상대의 살점을 찢어발겼다.
하지만 그것이 상황을 호전시켰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상황은 점점 더 절망적으로 흘러갔고 그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대로는······.’
강아현의 시선이 전장을 훑었다. 가장 삼엄한 곳. 그리고 가장 허술한 곳. 그녀의 힘으로 일거에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 따위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곳을 뚫어내는 정도라면? 단단한 가죽포대를 홀로 찢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뾰족한 송곳 끝이 되어 구멍만 낼 수 있다면? 가능성은 존재한다.
창위들을 압박하는 절정의 라마 가운데 하나. 데끼 상인(德吉 上人)이 입맛을 다셨다. 처음부터 단연 눈에 띄는 미색이었다. 게다가 대장군부에서는 워낙에 급하게 다시 출발하느라 회포도 제대로 풀지 못했다.
“이쪽은 내가 맡지.”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랫도리가 묵직해진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가 안았던 계집들 가운데 최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욱
계집의 검이 그를 상대하던 라마승의 가슴을 꿰뚫었다. 제법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기껏해야 스물 남짓한 어린 계집이다. 물론 대장군부에는 백운호라는 나이를 넘어선 괴물도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극히 예외적인 상황이다. 그런 예외가 여기 또 있으리라고 생각하긴 힘들다.
자신을 가로막는 창위 하나의 팔을 뽑아 그 팔로 머리통을 날려버리며 계집에게 접근했다. 계집이 흠칫 놀라 뒷걸음질 치는 꼴이 참으로 볼만하다.
“크크크, 너무 무서워하지 말아라. 어떻게 보자면 이런 곳에서 본 상인을 만난 것 자체가 너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큰 행운 아니겠느냐.”
저 정도면 단순히 채음보양 한 번으로 끝내기에는 너무 아쉬운 미모다. 게다가 스무살에 저만한 무공이라니. 어쩌면 남은 평생을 짝으로 함께 무공을 수양한다면 그도 경지를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이건 사실 따지고 보면 저 계집에게도 나쁠 것은 없는 제안이다. 옷을 보아하니 도가의 무공을 익힌 계집 같은데 방중술은 도가에서도 권장되는 수련 아니던가.
“이리 오너라. 내 너의 목숨만큼은 절대 해치지 않겠다 약속하마.”
계집이 인상을 찌푸렸다.
괜찮다. 예상한 반응이다. 오히려 여기서 기꺼이 다가왔다면 오히려 의심했을 것이다. 뒤편에서 기습적으로 달려드는 무사 하나의 목뼈를 분질렀다. 죽을 곳도 모르고 달려드는 부나방 같으니. 이제야 조금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지 네 명이 뭉쳐 그를 견제한다. 잡아 죽이는 것이야 어렵지 않겠지만, 그래도 일류 고수 넷이면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우선 한 걸음 뒤로······.
‘지금이다.’
강아현의 기해혈 깊숙한 곳.
단단하게 봉인되어 있던 진기 조각이 폭발했다. 순식간에 몇 배로 빨라진 진기의 속도. 거기서 끝이 아니다.
한 번 더.
강아현의 탄력 넘치는 경맥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하지만 버텨낸다.
그녀의 두 눈이 번뜩였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세 걸음.
부운약표의 오의 가운데 옥녀진결에 가장 어울리는 구절은 역시 돌풍과 같은 질주다. 그리고 그 질주의 끝. 그녀의 화산검이 쭉 뻗어나갔다. 그것은 데끼 상인을 압박하던 네 명의 일류 고수조차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 일격이었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나던 데끼 상인이 반응하기에 너무 신속한 공격이었다.
-푸욱
데끼 상인이 본능적으로 오른팔을 휘둘렀다. 경황중에도 역시 절정은 절정이라는 것일까? 주욱 늘어난 오른손이 강아현의 검로를 완벽하게 막아섰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녀의 일검에는 보통의 일류 고수가 가용한 범위를 아득하게 상회하는 힘이 실려 있었으니까. 라마승의 오른팔이 폭발하는 것처럼 터져나갔다.
완성에 다다른 유가밀공으로도 극복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위력의 일검이었다.
“끄아아아악!!”
아현은 추가로 공격을 해야할까를 망설이지 않았다. 그 방향 그대로 주욱 달려나갔다. 이미 한차례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었다. 이런 막대한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동창의 창위들이 그녀의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했다.
그들의 시선이 잠시 박진문에게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만약에 저 자리에 있는 이가 최염이었다면 창위들은 절대 이런 선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랑캐 출신의 내관으로 그 무공은 초절정에 다다랐지만 권력 구조에서는 철저하게 배제된 박진문이다. 그를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이는 많지 않았다.
강아현이 뚫어낸 길.
창위들이 그 뒤를 이어 움직였다.
“이 녀언!!!”
사람은 생각보다 약하다.
팔의 삼분지 이가 터져 나간 사람은 그 즉시 특별한 처치가 없다면 출혈과다로 사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과연 절정의 고수라는 것일까? 데끼 상인의 터져 나간 팔뚝이 마치 자기 의지를 가진 것처럼 오므라들었다.
창위 하나가 데끼 상인에게 묵직한 비도를 내던졌다.
-쾅!!
팔이 하나 사라졌다. 몸의 무게 균형이 흐트러졌고, 순간적으로 소실된 피 역시 만만치 않다. 강아현을 따라잡으려던 데끼 상인이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그 사이 강아현은 벌써 저 앞에서 창위들과 힘 싸움을 벌이던 라마승 무리 하나를 박살 냈다.
전신을 미친 듯이 나돌던 진기가 서서히 잠잠해져 갔다. 그 폭발적인 움직임으로 상처 입은 경맥이 고통을 호소했다. 그녀의 시선이 대장군부의 사람들에게 향했다. 창위들이 제법 열심히 보호했고, 그들의 사병 역시 최선을 다해 보호했지만 죽어나간 자들, 부상 입은 자들의 숫자가 상당했다.
영현의 생사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누가 죽었고 누가 살았는지를 분간하기도 힘들다.
송곳의 가장 뾰족한 끝단은 그저 구멍을 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머지는 다른 이들의 몫이다. 옥녀진결 삼단공의 힘이 사그라들기 전, 강아현이 달려 나가는 기세 그대로 질주했다.
그리고 저 멀리 누군가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
“어리석기는.”
지금까지 활불은 박진문의 공격에 의해 한 걸음 물러난 것을 제외하고 싸움이 시작한 이래 자의로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보통 사람의 허리보다 두꺼운 다리가 서서히 지면에서 떨어졌다.
“어딜!!”
박진문이 절정 고수들의 방해를 피해 활불에게 달려들었다. 검은 빛으로 번들거리는 열 개의 손가락이 사뭇 위협적이다. 하지만 그가 활불에게 달려드는 것보다 활불이 한 걸음을 떼는 것이 조금 빨랐다.
강아현이 향했던 방향은 활불의 정 반대 방향이었다.
하지만 고작 한 걸음.
전설상의 축지법이 이러할까? 칠십 장에 다다르는 거리가 그 한걸음에 좁혀졌다.
-쾅!!
그야말로 포탄이 떨어지는 것 같은 충돌음.
포위망을 찢어내고 질주하던 강아현이 뒤로 튕겨 날아갔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일까? 몸에 전해진 충격량이 어마어마했다. 심지어 활불은 특별히 손을 쓴 것도 아닌, 그저 강아현이 갑자기 나타난 활불의 몸에 부딪힌 것이었음에도 그러했다.
-쿨럭
그녀의 입에서 검붉은 핏물이 왈칵 쏟아졌다. 하지만 본격적인 상황은 이제부터였다. 살에 파묻힌 활불의 두 눈에는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처럼. 그의 입에서 한 음절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강아현이 뚫어낸 길을 따라 달리던 대장군부의 식솔 사분지 일이 그 한 음절의 음성에 핏물로 화했다.
항거 불능의 불합리한 파괴력.
박진문이 활불을 향해 달려왔다.
“이 노옴!!”
-쾅!!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활불의 호신강기를 뚫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포기했음에도 죽지 못해 살아가는 망국의 망령에게 너무 많은 사람이 헛되이 죽었구나. 이 모든 것이 본 부처의 부족함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개소리 집어치워라. 전략적, 전술적 목표 따윈 상관없이 그저 불타오르는 복수심으로 노인과 아녀자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아이들이나 죽이러 온 비겁자가 어디서 헛된 죽음을 논하느냐.”
“한 치 앞밖에 보지 못하는 인간이 어찌 수백 년을 내다보는 부처의 마음을 이해할꼬. 너의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그냥 여기서 죽어라.”
그저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일까?
여전히 활불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인간을 초월한 그 무시무시한 기운이 활불의 의지를 따라 박진문을 내리 눌렀다. 만 근의 무게가 박진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의 이마에 핏주링 곤두섰다. 천생 신력을 타고 태어나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박진문이었기에 버텨낼 수 있는 무게였다. 하지만 그 역시 단지 버티는 것이 한계다.
-퍼석
박진문의 두 다리가 무릎까지 땅에 틀어박혔다. 이 근방은 단단한 화강암지대였지만 그 조차도 그 막대한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부족한 탓이었다.
뒤늦게 두 명의 절정 고수가 박진문을 따라 왔다. 한바탕 핏물을 쏟아낸 강아현이 자세를 바로 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자세를 바로 잡기는커녕 숨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가슴이 불편하다. 부러진 늑골이 장기를 압박하고 있다. 오른팔 역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부러진 늑골이 팔의 신경을 짓누른 탓이다.
“흐흐흐, 혹시나 죽어 버린 것이 아닌가 걱정했건만 멀쩡하구나.”
그녀의 뒤편.
한쪽 팔을 그렇게 날려 먹었음에도 음욕으로 번들거리는 추악한 라마승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현이 생각했다.
후회하지 않는 결정이었나?
그녀의 머릿속에 자신을 만류하던 아버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마찬가지로 강경하게 반대하던 운호의 모습 역시 스쳤다.
그럴 리가.
안일했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대장군부는 안전할 것이고, 운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었다.
멍청함에는 댓가가 따르는 법이다.
강아현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 대신 그나마 움직이기는 하는 왼팔로 검을 움켜쥐었다.
라마승이 그 발버둥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퍼억
마치 저 하늘에 누군가가 있어 천벌이라도 내린 것처럼 한 자루 장검이 저 높은 하늘 위에서 라마승의 머리통까지 직각으로 내리꽂혔다.
여전히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현은 바닥에 꽂힌 그 검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운호다.
마치 저잣거리 매화자들이 떠드는 싸구려 협객담의 한 장면처럼.
운호가 그녀를 구하기 위하여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