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누구의 잘못인가(29)
언제부터였을까?
처음 운호에게 패배했던 순간? 혹은 녀석의 검술이 공백부가 오랫동안 찾아다닌 그것임을 알았던 순간? 그것도 아니라면 이준형이 꺾였을 때? 종남의 검후를 패퇴시켰을 때? 그것도 아니라면 강호에 널리 이름을 날리고 절정의 경지에 오른 주제에 공허한 눈으로 돌아왔을 때? 함께 황도를 구경하고 초절정 고수와 맞상대하는 모습을 보여줬을 때? 자신과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줬던 바로 그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영현이 운호에 대하여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던 그 순간, 강아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마음 역시 그녀와 다르지 않음을.
그렇기에 그녀는 남았다.
아버지의 설득을 이겨내고, 사랑을 쟁취하기 위하여. 그리고 지금 그 선택은 그녀에게 매우 큰 위험을 안겨주었다.
-옴-
용의 울음이 이러할까?
천지를 진동시키는 거대한 소리가 대장군부 전체를 진동시켰다. 그리고 곧바로 터져나오는 거대한 파괴.
-콰과과과과과광!!
정확하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아가씨!! 여기로!!”
“아니!! 이쪽입니다!!”
시녀와 하인들. 그리고 호위무사들까지.
혼란이 퍼져나갔다. 대장군부가 포달랍궁을 앞서기 시작한 것은 십년 남짓이다. 그 이전까지 대장군부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그 움직임 역시 제도로 정착해있었다. 그들은 그 제도 속에서 충분한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훈련은 어디까지나 훈련에 불과하다. 훈련 받은 대로 움직이는 이들, 자신의 목숨을 어떻게 해야 구할 수 있을까를 강구하는 자들.
“가, 감히!! 내가 누군지 아느냐!”
어떻게든 자신을 살리라 소리치는 인물들까지.
그리고 거기에 동창의 창위들이 합류했다.
“저들은?”
모두가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는 가운데도 홀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영현이 가장 먼저 창위의 등장을 눈치챘다. 그 이질적인 옷차림과 기도를 목격한 아현이 답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들과 검을 맞댔던 것이 아직 이 년도 채 지나지 않았거늘.
“동창의 창위들입니다.”
“동창? 그렇다면 박 태감님이 보낸 사람들이로구나. 아현아 저쪽으로 가자.”
“네? 하지만 지금은 대장군부의 무사들 쪽이 더 안전한 것 아닐까요? 분명 창위들은 믿기 힘든 세력이라고······.”
“아니, 지금 목숨만 생각한다면 저쪽이 더 믿음직하다. 대장군부의 무사들에게 최우선은 할아버지의 혈육. 그 가운데서도 남자 아이들 쪽이지 내가 아니다.”
게다가 대장군부의 무사들이라고 마냥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욕심은 무한하며, 후계를 향한 욕망은 위기라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지금 이 혼란 속에서 대장군부로 몸을 피하는 것이야말로 범의 아가리로 고개를 들이미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영현이 그 뒷말을 삼켰다.
“좌장군의 큰손녀이자 보급대장이신 영초벽 장군님의 장녀 영현입니다. 어서 박 태감님께 저를 안내하세요.”
“실례지만 옆에 함께하시는 분은 시녀이신지?”
“제가 가장 아끼는 사람입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 작은 실랑이에 강아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는 찰나.
“멍청한 놈. 딱 봐도 모르겠나? 화산파 삼대 제자 강아현 소저 맞으시죠?”
그에 조금 떨어져 있던 창위 하나가 서둘러 달려와 물었다.
멍청한 놈 같으니. 사람 보는 눈이 저렇게 없어서야. 물론 이곳의 시녀들 가운데는 특출나게 아름다운 여인도 존재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화장조차 하지 않은 얼굴로 저만한 미모를 보여줄 수 있는 여인은 전 중원을 통틀어도 몇 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 여인은 매우 수준 높은 무공을 익히고 있다.
영현과 함께하는 매우 아름답고 매우 수준 높은 여고수. 정체가 너무 빤하지 않은가.
“네, 네? 맞습니다만 저를 어떻게?”
“좌장군의 장손녀. 그리고 강아현 소저. 모두 일급호위대상이다.”
“잠시만요. 저희 어머니와 동생들도 저쪽에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조충, 오괄. 너희가 얼른 모시고 오도록 해라.”
“네!!”
“소저들은 저를 따라오시죠. 서두르셔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더 우선 순위가 높은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런 이들을 모두 데리고 갈 수는 없다. 오히려 이렇게 쉽게 이들을 만난 것만 하더라도 행운이다.
같은 시간
은검귀조 박진문이 멀리서 느껴지는 기운만으로 적을 가늠했다.
‘삼 할?’
승리의 확률이 아니다.
싸워서 무사히 몸을 뺄 확률이다. 기운의 크기가 실로 무시무시하다. 활불인가? 아니, 활불이어야 한다. 저만한 힘을 가진 이가 활불이 아니라면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
적어도 동창에서 포달랍궁의 세력을 잘못 파악한 것이 분명하다. 동귀어진? 아니, 자칫 잘못하면 청해성이 몽땅 장족에게 넘어가는 것을 넘어 그 이상의 사태로까지 발전할 수도 있다.
“멍청하기는······.”
동창에서는 청해대장군부가 무너지는 상황까지도 고려했다. 물론 그렇게 될 경우 상처투성이가 된 포달랍궁을 황실의 힘으로 밀어버리고 청해성을 직할령으로 삼겠다는 계획이 수립되긴 했지만······.
물론 최염의 우려도 이해는 됐다.
굴불신마 영무결의 존재는 황실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그의 할아버지인 영균보다도 강력한 존재였으니까. 심지어 영균의 시대에는 태조황제가 있었다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없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저 힘의 크기는 감히 굴불신마 영무결에 비할것이 아니다. 은검귀조 박진문은 초절정의 고수로 굴불신마와 싸운다고 해도 자신의 승률을 3할까지 잡았다. 물론 굴불신마에게 묻는다면 코웃음을 칠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박진문 스스로가 생각하기로는 그쯤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저 힘은 감히 맞설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무한에서 학살을 자행했다던 마교의 대제사장이 저와 같았을까?
물론 직접 싸워본다면 또 이야기는 다를지 모른다. 싸움이라는 것이 어디 힘의 크기만으로 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적어도 느껴지는 힘의 크기는 저것이 인간이라는 것이 믿기 힘들 만큼 막대했다. 지금까지 그가 만난 이들 가운데 가장 막대한 내공을 자랑하는 고수는 현음명 최염이었는데, 저자에게서 느껴지는 힘의 크기는 그 두 배를 족히 넘어 선다.
“태감 어른!!”
“벽안검마의 부인은?”
“최우선으로 확보했습니다. 다만 성내의 혼란이 상상 이상입니다. 현재 일급 호위 대상 가운데 저희가 확보한 인원이 삼 할을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조금 더 기다려볼까요?”
“아니, 아니다. 지금은 지체할 상황이 아닌 것 같구나. 지금 대장군부의 움직임은 어떠냐.”
“이차 저지선이라고 할 수 있는 대장군부 내벽을 경계로 싸울 요량인 듯합니다. 저희가 확보하지 못한 다른 대상들은 대부분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대장군부에 남은 전력은 적지 않았다.
물론 정식으로 군적에 이름을 올린 이들의 숫자는 적었다. 하지만 나름 방귀 꽤 뀌는 집안에서 개인적으로 고용한 낭인들의 숫자만 하더라도 상당한 숫자다. 저들이 얼마나 많은 숫자로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경계망 사이를 뚫고 왔다면 그 숫자가 천단위에 이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껏해야 몇 백 정도. 숫자로는 확실히 압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박진문은 대장군부에 합류하는 것을 택하지 않았다.
저 무시무시한 기운을 느끼고도 도망 대신 싸움을 택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멍청함의 극치일 터이니. 물론 그렇다고 해도 입으로는 도망이 아닌 도리를 논했다.
“본래 의무는 권한에서 오는 법이지. 시작이 어찌됐건 굴불신마가 우리를 후방에 빼놓는 전력으로 임명하고, 심지어 나에게 이곳을 통솔할 권한을 주지 않은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무가 없다.”
“맞습니다!!”
지금까지 여기에 파견되있으면서 쌓인 인연.
그리고 지난번 종자명과의 다툼으로 생겼던 신세는 그들의 혈육을 보전해주는 것으로 갈음한다.
박진문이 방 한쪽 구석의 장식장을 옆으로 움직였다.
사람 둘 정도는 충분히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동혈이 모습을 드러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도주로였다.
“참으로 재밌구나. 굴불신마를 피하기 위해 파뒀던 도주로를 굴불신마의 혈육을 살리기 위해 사용한다니.”
***
강아현이 은검귀조 박진문을 만나는 것은 두 번째였다.
절강성에서는 적으로. 그리고 지금은 아군으로. 물론 그 두 번의 만남 모두 박진문에게 강아현은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쪽이 아닙니다. 저희는 서장 쪽으로 향해야 합니다.”
박진문이 고개를 돌려 부관을 바라봤다.
‘화산파 제자 강아현입니다. 태감 어르신께서 말씀하셨던.’
기억이 났다. 그러고 보니 이런 난리 중에도 해사한 미모가 눈에 띈다. 과연 특별히 찾아와 부탁을 할만한 계집이다.
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이건 이것이다. 그의 눈짓에 부관이 강아현에게 달려갔다.
“태감 어른. 잠시 그 아이의 말을 들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영현 소저? 죄송하지만 지금은 한가롭게 어린 아이의 생각 같은 것을 들어볼 시간이 없습니다.”
“마냥 어린 생각은 아닐 겁니다.”
박진문이 미간을 찌푸렸다.
불쾌함의 표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현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확실히 영현이라면 어린 계집아이라는 한계는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제법 생각이 있기로 유명한 아이다. 박진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가 많습니다. 대장군부가 얼마나 버텨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결국, 따라잡힐 수밖에 없다면 더 안전한 쪽은 저희 본대가 나가 있는 서장 쪽입니다.”
“태감 어른. 아닙니다. 거리가 다릅니다.”
내륙 방향으로 그들을 이끌려던 창위 하나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박진문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거리가 족히 반 배는 차이가 납니다. 어차피 따라잡힐 위험이 있다면 내륙 방향이 맞습니다.”
“아닙니다!! 물론 물리적인 거리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다수의 병력이 이동을 했던 서장 방면과 내륙은 길의 험난함이 다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본대에서 이런 사태를 눈치챘다면 지원이 올 겁니다.”
지원?
박진문이 잠시 굴불신마 영무결을 떠올렸다. 종종 사람 좋은 미소를 짓지만, 그 미소조차 노력의 결과물인 그 사내가 혈육을 살리겠다고 지원을 보낸다? 혈육이 죽어 나간다고 울부짖는 그의 모습 따위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만약 그 사내가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 역시 냉철한 계산의 결과물일 것이다.
“우리는 감숙으로 향한다.”
“태감 어른 하지만!!”
“나는 백 장군에게 그대의 안위를 부탁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관의 호의에 기댄 부탁이지 본관의 의무가 아니다. 그러니 그대가 자신의 판단을 본관의 판단보다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로 행하는 것을 말릴 생각은 없다. 어찌하겠는가?”
그것은 더 이상 의견을 개진한다면 쫓아내겠다는 엄포였다.
강아현이 입을 다물고 조용히 물러났다.
이백 명에 가까운 인원 가운데 전투 인원은 고작 절반 정도.
이동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 곁에는 초절정의 고수가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위안을 안겨주었다.
“역시 어설프긴 하지만 포위망을 만들어뒀구나. 하지만······.”
압도적인 색적능력.
그리고
-콰과과과광!!
압도적인 무력.
여덟 명의 라마승이 피떡으로 화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목숨은 건졌구나.
고생은 하겠지만 그래도 죽을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살았다.
하루 그리고 이틀.
긍정적인 생각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퍼졌다.
‘응?’
-퍼억!!
“옴마니 반메홈. 고작 여기까지밖에 못 올 것을. 참으로 어리석은 중생들이로고.”
한 번을 피했다면 두 번을 피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초절정 고수 박진문의 감각 너머.
활불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