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누구의 잘못인가(28)
곤륜의 서신이 녜룽 분지에 도착한 것은 그들의 싸움이 사흘 차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첫날 제법 커다란 교전 이후로 두 세력은 그리 적극적인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었는데, 대장군부 쪽에서는 그것을 적의 초절정 고수인 삼장로 체텐이 부상을 회복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 판단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몰아치지 않았느냐? 간단했다.
곤륜이 포달랍궁을 박살내고 합류하면 더 적은 피해로 적들을 물리칠 수 있으니까. 대장군부가 볼 때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었다.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소? 포달랍궁이, 포달랍궁이 텅 비어 있었다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요.”
“말 그대로입니다. 그곳에 있던 자들은 머리를 박박 밀고 승복을 입은 장족의 무사뿐. 진짜 라마승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흑의를 입은 노도인 하나가 말을 이어갔다.
“혹시나 본대에 적들이 합류한 것이 아닌가 걱정되어 정예 문도들만을 이끌고 급히 달려왔습니다.”
“고맙다. 우선은 여독을 풀고 좀 쉬도록 해라. 병사들에게 일러 막사와 식량을 내어주마.”
본진을 비웠다?
포달랍궁은 무려 오백 년 전. 최초의 활불이 터를 잡았던 곳으로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헌데 거기까지 비워가면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차라리 저 노도사의 이야기처럼 본진에 힘을 더하여 한순간에 밀어붙였다면 또 모를까.
영무결의 막사에 함께하던 참모들과 장군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내뱉었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허, 이 사람아. 누가 그걸 모르나. 당연히 꿍꿍이가 있겠지. 지금은 그게 뭔지를 생각해봐야지.”
“본진을 비웠다는 말은 그 병력으로 뭔가 별동대를 꾸렸다는 말일텐데······.”
“헌데 별동대라고 해봤자 얼마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지금 저희와 대치하고 있는 병력만 하더라도 포달랍궁과 장족 부족들의 전력을 긁어모은 수준일 텐데요.”
“맞습니다. 게다가 별동대를 만들었다고 해봐야 노릴 수 있는 전략적 목표가 뭐가 있겠습니까.”
“글쎄······. 보급선?”
“무슨 고대의 전쟁도 아니고. 개국기의 대전 때도 그런 멍청한 작전은 나오지도 않았었습니다. 당장 저희만 하더라도 알아서 보름치 식량들을 싸 들고 오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촉상이라면 황실이 가장 큰 지분을 지닌 상단입니다. 포달랍궁도 정신이 박혀있다면 감히 촉상을 습격하지는 못 할겁니다.”
“너무 자신할 건 또 없지 않나. 쥐새끼가 궁지에 몰리면······.”
“상식적으로 봤을 때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에서야 전략적 이득을 취할 곳이 전혀 없는 선택을 염두에 두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우리 대장군부 본부를 침입하여 동귀어진으로 최대한 많은 민간인을 죽이고 간다는 미친 생각도 못할 건 없는 선택이 되는 겁니다.”
그 순간 곰곰이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영무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맙소사!!”
“좌장군.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잊고 있었다.
상대는 미친놈이다. 보통의 사람에게 백년대계라는 말은 자신의 인생을 넘어 후대와 그 후대까지를 바라보는 계획이다. 하지만 그 미친놈에게 백년대계는 그저 조금 먼 미래에 있을 자신의 일이다. 시간의 단위가 다르다.
“지금 여기서 활불을 본 사람은?”
“제가 봤습니다.”
“저도 봤습니다.”
“그가 무공을 펼치는 광경은?”
“네? 아니 그거야······. 자네는 봤나?”
“아니, 요 며칠 초절정 고수들이 나설 일이 없었으니······.”
“하지만 그건 분명 활불이었습니다. 그 무시무시한 기세. 그리고 제가 십칠 년 전에 봤던 활불 그대로였습니다.”
갑작스러운 영무결의 질문.
그리고 조금 전의 대화.
멍청이가 아니라면 지금 영무결이 무엇을 의심하는지는 명백했다. 지금 저 자리에 있는 자는 활불을 가장한 누군가이며 활불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면 지금 저 자리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를 생각했다. 대체 누구이길래 활불을 가장할 수 있는가. 설마 알려지지 않은 초절정 고수가 또 하나 있었던 것인가? 그것도 활불을 가장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한?
하지만 그 가운데 몇몇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그것을 대체하고 있느냐가 아니었다. 지금 진짜 중요한 문제는 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리 하였느냐다.
“대장군부!!”
“백 장군.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대장군부라니?”
아직도 몇몇 사람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한 채 운호의 얼굴을 바라봤다. 하지만 막사에 모인 이들 가운데 머리를 쓸 줄 아는 사람들은 곧바로 운호의 말을 이해했다.
“어차피 지금은 이길 수 없으니 미래를 기약한다? 분명 전대의 활불도 그리 했었지요.”
“하지만 절정 고수들 대부분도 다 여기 모여있잖습니까.”
“절정 고수가 아닙니다!! 이미 활불은 한차례 실패를 했습니다. 당장 저희들만 보더라도 대장군님의 세대는 포달랍궁에 비하여 많이 빈약합니다. 하지만 그 아랫 세대는 다르죠. 그리고 지금 활불이 노리는 지점이 바로 그 지점입니다.”
“그렇다면 설마 아직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은 아이들을?”
“네, 그렇습니다.”
“맙소사. 부처를 믿는다는 자들이 어찌 그리 흉악한 짓을!!”
순식간에 막사가 소란스러워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대장군부를 구원할 병력을 보내야합니다.”
“아니요. 기껏해야 초절정 고수 하나와 라마승 몇이 전부일 겁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대장군부에는 박태감과 동창의 고수들이 있습니다.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겁니다. 게다가 지금 보내봐야 어차피 늦습니다. 지금은 저들의 병력을 멸절시키고 포달랍궁을 도려낼 절호의 기회입니다.”
“상대는 활불입니다!! 보통의 초절정 고수가 아니에요. 그러다가 대장군부에 큰일이라도 생기면은요!!”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게다가 일이 있다면 이미 일어났을 시간입니다. 지금에와서 허겁지겁 병력을 보내봤자 적들 좋은 일만 시켜주는 겁니다.”
“본성에 처자식을 두고 온 장병들이 크게 흔들릴 겁니다.”
“그러니 비밀로 해야지요. 저도 두고 온 처자식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의 앞에서 처자식이란 의복과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확정된 사실도 아니잖습니까. 그저 추측일 뿐입니다. 어쩌면 저희가 그런 추측을 하고 병력을 내보내는 순간을 노린 적들의 술책일 수도 있고요.”
모두가 목에 핏대를 올리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떠드는 상황.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 운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포달랍궁의 삼장로 단증을 홀로 격살했다는 것은 확인되지 못한 소문이었다면 며칠 전 그가 사장로 체텐을 상대로 팽팽하게 겨뤘던 것은 모두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일이었다.
강호와 달리 관부에서 중요한 것은 무력만이 아니었지만, 운호의 경우는 아직 젊은 미혼의 사내였고 따라서 그 ‘무력 외의 것’ 역시 매우 가까이에 두고 있다 평가받았다.
그렇기에 현재 막사 내에서의 무게감만 따지더라도 손가락에 꼽을만하다. 모두의 시선이 운호에게 모여들었다.
“장군,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흐음······.”
“다행히 곤륜의 흑치노조(黑緇老祖)가 제자들을 이끌고 왔으니 그만한 전력이면 제가 자리를 비운다고 해도 충분할 겁니다.”
영무결이 잠시 고민했다.
어찌 해야 하나.
그곳에 두고 온 처자식들이 떠올랐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아무리 그가 무정한 사내라고 해도 혈육이 주는 정은 각별한 법이다.
그렇기에 고민은 길지 않았다.
“불허한다.”
“네? 하지만 장군!!”
“나는 지금 곡지현이 약탈당한다고 하여 병력을 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현곡현이라도 마찬가지이며 주광현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오늘이 오기까지 청해성의 수많은 아녀자와 아이들이 죽었으며 그보다 몇 배는 많은 장정이 죽어 나갔다. 어찌 대장군부, 나의 처자식이라고 하여 특별할 수 있을까. 그러니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눈앞의 몇몇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그 모든 비극의 사슬을 끊고 세상의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그것이 대의이며 나 영무결이 해내야만 하는 일이다.”
운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곤륜의 도사들이 증원된만큼 운호가 빠진다고 해도 전력의 공백은 크지 않을 것이다. 아니, 심지어 거기에 수색단의 천인대 하나 정도는 붙여줘도 될 정도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다짐이기 때문이다.
“활불은 환생을 통하여 영원을 산다고 한다. 그래, 뭐 그럴 수 있겠지.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새롭게 태어나는 활불을 끝없이 죽여주면 된다. 활불이 무서운 것은 환생이 아니다. 갓태어난 활불따위 평범한 아기와 다를 바 없다. 그가 진정으로 무서운 이유는 그가 성장할 때까지 그를 키워줄 포달랍궁이라는 세력의 존재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 이 자리에서 그 근간을 완벽히 파괴한다. 미래는 현재 위에 존재한다. 그들이 우리의 미래를 노린다면 우리는 그들의 현재를 파괴하겠다.”
영무결은 가족을 아낀다. 그의 가업을 이어 나갈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만약 청해대장군부, 아니 서평왕부 자체와 가족들을 놓고 계량한다면 그 답은 명확하다.
서평왕부다.
미래와 현재.
영무결이 미래를 선택한 적들을 비웃으며 그들의 현재를 파괴하겠노라. 그리하여 그들이 꿈꾸는 미래 자체를 삭제하겠노라 선언했다.
-이 놈이고 저 놈이고 죄다 미친놈들 투성이로구나.
***
그것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자연 재해와 같았다.
청해대장군부를 둘러싼 성곽은 흙과 돌을 사용하여 쌓아올린 거대하고 튼튼한 장벽이었다. 가장 낮은 지점도 5장을 넘어가기에 일류 고수는 물론이거니와 어지간한 절정 고수도 도구의 도움 없이 단번에 뛰어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렇기에 그저 한 음절의 거대한 울림.
-옴-
가장 거대한 화포로 가장 거대한 화탄을 쏘아보낸다고 해도 그 백분지 일의 파괴력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수만 관의 화약이 단번에 폭발하는 것 같은 거대한 파괴력. 높이만 5장. 두께 역시 4장을 넘어가는 거대한 성벽이 폭발하듯 무너졌다.
아무리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고수라고 해도 이것이 사람의 몸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과장을 조금 보태 산을 무너트렸다는 표현이 어울릴만한 업적이었다.
성벽을 구성하던 막대한 돌과 토사가 성벽에 인근한 건물 넉 채를 휩쓸었고 그 건물에 머무르던, 혹은 그 근처를 거닐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하지만 진정한 비극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그 뻥 뚫린 성곽 사이로 살기등등한 라마승들이 쏟아졌다. 대장군부에 머누르던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기습공격.
그것은 은검귀조 박진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무슨!!”
초절정의 고수는 앉은 자리에서 백 리를 내다 본다. 물론 세세한 것을 모조리 파악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일류 이상의 고수라면, 특별한 무공을 익힌 것이 아니라면 그 시선을 피해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그 감각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선명하다.
지금 터져나간 성벽과 그가 머무는 거처의 거리는 고작 십여 리.
하지만 이런 커다란 기의 파동이 생겨나기 직전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박진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대장군부의 혈육을 모아라. 탈출한다.”
“네!!”
동창의 창위들이 빠르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