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누구의 잘못인가(27)
무엇이 잘못이었을까?
처음 백운호를 요격하기 위하여 모습을 드러냈던 것?
아니, 아니다. 그건 분명 적절한 선택이었다. 절정 고수를 그렇게 쉽게 참살할 수 있는 녀석을 날뛰게 뒀다면 전황은 더 나빠졌을 테니까.
잘못은 녀석의 기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설마 그 기습을 막아낼 줄이야. 게다가 그 검강······. 그래, 검강이다. 지금까지 그가 목격했던 가장 뛰어난 유사 검강은 천살성의 기운을 긁어 모아 만들어낸 저기서 날뛰고 있는 벽안검마라는 녀석의 검강이었다. 하지만 이 운호라는 녀석의 검강은 그것조차 넘어섰다. 어쩌면 진짜배기 검강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고작 절정 주제에.
체텐의 검이 운호의 몸을 스쳤다. 기회일까? 운호의 눈이 번뜩인다. 그가 과감하게 공격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소심하구나.
‘돌아오셨네요?’
-그래, 하지만 아직 힘을 쓰는 건 무리다.
앞서 한차례 데였기 때문일까?
초절정 고수라는 위명에 걸맞지 않게 지독하게 소극적이다. 매농검의 논리로 몇 차례 허점을 만들어주었지만, 쉽게 넘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조금씩 더 검 끝이 과감해진다. 그래, 그거면 됐다. 상대는 부상을 입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한 것은 운호다. 단순히 경지의 차이 때문이 아니다. 육십 평생 좋은 것만 잔뜩 먹어가며 쌓아올린 내공과 고작 십년 남짓한 내공이 같을 수는 없다. 한순간의 출력이야 기교를 통해 어떻게든 따라간다고 해도 지구력은 정직하다.
바로 그 순간 보이지 않던 뒤편에서 누군가 과감하게 창을 찔러왔다.
-휙
뒤편에서 찔러오는 창을 그대로 잡아당겨 체텐에게 집어 던졌다. 하지만 체텐 역시 그 정도는 예측하고 있었다. 날아오는 사내의 겨드랑이 틈. 그 작은 틈새로 그의 검이 날아든다. 운호의 검이 힘있게 그 검을 올려쳤다.
-서걱
과감하게 운호의 빈틈을 노렸던 용감한 장족 사내가 순식간에 외팔이가 돼버렸다. 솟구치는 핏물과 비명성. 그 사이로 운호와 체텐의 검굑이 수십 번을 오고 갔다. 그리고 그 수십합의 싸움 사이로 체텐의 검이 약간의 비효율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퉁
검 끝에 튕겨 나온 핏물이 눈동자를 노린다. 한쪽 눈을 감고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생겨난 사각지대. 체텐의 부러진 다리가 운호의 옆구리를 향하여 쇄도했다.
-조심!!
그러나 파검이 경고하기도 전.
운호의 왼쪽 팔꿈치가 그 부러진 다리를 내려찍었다. 너무 뻔했다. 저만한 고수가 거기서 그런 비합리적인 판단을 내릴리 만무하다. 결국 변수의 창출이고, 그것이 운호의 왼쪽 눈이라면 노리는 방향 역시 뻔하다.
-쾅!!
뻔하지 않았던 것은 체텐이 보여주는 어마어마한 경기공(硬氣功). 한순간 부러진 다리를 내려찍은 왼쪽 팔꿈치가 얼얼했다. 하지만 분명 효과는 있었다. 체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운호의 검이 체텐의 목을 노렸다.
-팅!!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돌조각이 검의 방향을 살짝 비틀었다. 동시에 체텐의 검이 운호의 옆구리를 노린다. 동귀어진의 한 수. 운호가 망설임 없이 몸을 비틀었다. 물론 이만한 기회 속에서 아무런 소득 없이 물러날 리는 만무했다.
운호의 검이 체텐의 어깨를 스쳤다. 그가 뒤로 몇 걸음 빠르게 물러났다. 하지만 역시 초절정 고수는 초절정 고수. 그의 발끝이 운호의 허벅지를 두들겼다.
잠깐의 소강.
운호의 시선이 적의 대장로 니마 주걸과 대장군 운보의 싸움을 스쳤다. 조금 전 운호의 검을 두들긴 돌조각 하나로 운보가 제법 큰 이득을 봤다. 위기의 순간. 니마 주걸이 무리하여 체텐을 도운 덕분이다.
-퍼억
“아주 똥줄이 타들어 가는 모습이 꼴 보기 좋구나.”
“어디서 저런 놈을 주워서 의기양양하기는.”
“어디서 저런 놈 잘 주워오는 것도 능력이지. 넌 활불인지 뭔지 영 잘못 주워서 인생 자체가 엉망진창이 되지 않았더냐.”
“이놈이 감히!!!”
니마 주걸이 크게 분노하며 기세를 북돋웠다. 영보가 생각했다. ‘여기서는 맞받아치기보다는 한 걸음을 물러나고 다시 기세가 죽어갈 때 두들기면 되겠다.’ 라고.
오산이었다.
영보가 슬쩍 한 걸음을 물러나는 순간.
대장로 니마 주걸이 그 북돋은 기세 그대로 자신의 진영을 향하여 몸을 날렸다.
“하하하,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맛있는 진미를 하루에 홀라당 먹어버려서야 재미없지.”
“저······, 저?”
사실 현재 상황은 참으로 묘한 상황이었다.
운호와 체텐. 운보와 니마 주걸. 어느 쪽의 싸움이 무너지건 간에 나머지 한쪽은 크게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본래는 도주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니마 주걸이 뒤로 물러나는 바로 그 순간, 체텐 역시 그림자로 녹아들 듯 자신의 모습을 감췄다.
농락당했음을 깨달은 운보가 크게 팔을 떨쳐 주변의 병사 수십을 단번에 도륙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그가 이내 정신을 되찾았다. 혼잡한 전장. 무엇보다 운보 자신은 이제 늙어 죽어가고 있다.
마지막을 위하여 아껴둔 소중한 진기를 이렇게 낭비해선 곤란하다.
게다가 지금 이 싸움으로 이득을 본 것은 명백히 대장군부였다.
어차피 수십만이 맞붙는 싸움이다. 하루아침에 승부가 결정 날 수는 없었다. 뒤로 물러나는 상대의 진영이 질서정연했다.
좌장군 굴불신마 영무결이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그 머저리 성격상 이렇게 조용할 리가 만무한데.”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활불도 혈기가 좀 줄어든 것이겠지요.”
“글쎄다. 그거야 정상적인 사람일 때 이야기고. 그 놈은 어쨌거나 수백 년 묵은 괴물 아니더냐. 평범한 사람과는 시간관념 자체가 다른 놈이다.”
지난번 싸움에서 한 차례 영무결 자신에게 큰코다쳤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런 것 치고도 조금 이상하다.
“뭐, 어쨌거나 그래도 오늘 싸움은 우리의 승리라고 봐야겠구나.”
“네, 자칫하면 백장군에게 큰일이 생길 뻔했습니다만, 할아버지께서 나서 주신 덕분에 일이 잘 풀렸던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이 조금 아쉽구나. 자명이나 운호. 둘 중 하나를 노릴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빨리 시도할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공동의 장문인도 운호의 호위를 맡길 걸 그랬구나.”
“역시!! 할아버지께서 나선 순간이 너무 빠르다 싶었는데. 아버지께서 친히 부탁해두셨던 것이로군요.”
“아니, 내가 감히 아버지를 어떻게 좌지우지하겠느냐. 그저 아버지의 심중을 읽었을 뿐이다. 그나저나 대장로의 무공이 생각한 것보다 대단하더구나. 자칫하면 아버지가 위험할 뻔했어.”
“호위를 늘릴까요?”
“아서라. 물론 아버지 눈을 피할 수 있다면 그래도 좋겠지.”
“그거야······.”
“물론 현재 대장군부의 대소사를 모두 내가 결정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묵인과 인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버지의 의지를 반하는 행동을 할 수는 없다. 그보다 이전부터 뭔가가 조금 찝찝하긴 한데. 그게 뭔지를 도통 알 길이 없구나.”
***
활불은 판단했다.
지금 이대로라면 가능성은 없다고.
현재 포달랍궁의 강함은 절정에 다다랐다. 세력으로써 포달랍궁이 이보다 강해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문제는 활불 자신이었다.
“어렵구나. 어려워.”
다섯 번째 환생.
이번 몸은 그가 경험했던 모든 몸 가운데 단연 최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지만, 그것을 활용하는 두뇌의 능력은 처참하다. 심지어 무언가를 잊어버리는 속도는 너무 빠르다. 그렇다고 두뇌만이 문제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육체 역시 부실하기 짝이 없다.
전생의 그는 어린 시절부터 유가 밀공과 금강공을 동시에 수행하여 완벽에 가까운 몸을 완성했었다. 하지만 현생의 그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수행하다 무공이 충돌하여 결국 지금의 이 비대한 몸이 되는 극단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비대한 몸이 된 것이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의 생은 근 오백 년에 달했고 그에 걸맞은 방대한 지식 속에는 그에 어울리는 무공 역시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몸이 육박전에 불리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대장로인 니마 주걸의 무공은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초절정의 고수라고 해도 노화는 어쩔 수 없고 그렇기에 한계에 다다른 내공이 쌓이는 속도보다 여든 이후 가속화된 노화가 빠른 것 역시 어쩔 수 없다.
문제는 초절정의 고수들 가운데 가장 젊은 사장로도 올해 나이 일흔아홉이라는 점이었다. 반면 적의 수괴인 영무결은 이제 갓 예순. 또한, 벽안검마 역시 천살을 완성하여 초절정이 유력한 고수다.
그리고 무엇보다 백운호.
고작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삼장로인 텐진을 주살한 어린 고수. 물론 그가 일대일로 텐진을 척살했다는 말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무공을 익혔다고 봐도 무방한 전생의 자신도 그 나이에 그 정도로 강하지는 못했다.
또한, 텐진이 초절정 가운데는 최약체라고 해도 어쨌거나 초절정의 고수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다만 약관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절정. 심지어 그 가운데도 그런 소문이 퍼져나가게 만들 만큼 특출난 고수라는 점이 문제였다.
차기와 차차기.
대장군부는 여전히 지금과 비슷한 성세를 유지할 것이다.
답은 뻔했다.
무조건 지금 부딪혀야 한다.
시기와 방향이 나왔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뿐이다.
과거의 자신은 절정 고수들을 최대한 많이 데려갔었다. 그 결과 포달랍궁은 수십 년을 버틸 힘을 얻었고 한때는 대장군부를 압도했었다.
그것 역시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셋이나 되는 초절정 고수에 활불 자신의 목숨을 더한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저승길 동무로 삼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길이 있었지.”
어중간한 미래.
이삼십 년 정도를 내다보는 미래는 의미가 없었다. 다시 태어난 활불이 경쟁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었으니까.
사십 년, 오십 년.
만약 당시의 활불이 절정의 고수들이 아닌 이제 막 태어난 아이들부터 십 대에 접어든 아이들까지 모조리 참살했다면 어땠을까? 그리하여 애당초 굴불신마 영무결이라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물론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하지만 수백 년을 살아가는 광기 어린 존재. 활불의 시선으로 볼 때 한 번 정도는 해봄 직한 도박이기도 했다.
어려움은 많았다. 굴욕 역시 있었다.
저 남쪽의 미쳐버린 광신도 놈들과도 손을 잡는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굴욕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장로 니마 주걸의 주름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며 기꺼이 그것을 감수했다.
그리하여 현재.
그의 시야에 거대한 성곽이 들어왔다.
고작 백여 년 전. 그가 원제국의 국사로 봉직하던 시절 하사받았던 그의 정당한 영토다.
빌어먹을 영룡. 그 작자가 주팔 그 작자에게 붙어먹을 때만 하더라도 멍청하다 비웃었거늘. 설마 비루하기 짝이 없던 주팔이 시대의 패자가 될 줄이야.
지금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되찾을 땅.
그렇기에 오늘은 감히 주인이 비운 땅을 자신의 땅인 양 차지하고 앉아 있는 기생충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다.
“가자.”
집채만 한 장년의 라마승을 필두로 한 팔백의 라마승.
그들이 청해대장군부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