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누구의 잘못인가(25)
“부탁 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부탁? 우리가 그런 사이였던가?”
박진만이 미간을 찌푸렸다.
조선이라는 말을 듣고 풍기던 기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그 한 번의 표정이 어마어마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과거 초절정의 고수들을 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시절과는 달랐다. 굳이 몸을 돌려 기세를 흘려내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그 자리에 서서 박진만이 풍기는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이 정도면 그럴만한 사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뭐, 이야기 정도는 들어볼 만한 사이는 될 것 같군.”
박진만이 피식 웃었다.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오던 무시무시한 기세가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산악을 허물 기운을 한순간에 갈무리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놀라운 기운의 수발. 하지만 그간 초절정 고수들의 워낙 대단한 모습들을 봐왔던 탓일까? 운호도 이제 이 정도로는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박진만 역시 딱히 운호를 놀래려는 의도 따윈 없었다. 그는 지금 정말로 운호를 대화 정도는 가능한 상대라고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무슨 부탁이지?”
“이번에 대장군부에 남으실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아무래도 좌장군께서는 나를 믿지 못하시는 것 같아서 말이야.”
“설마요, 좌장군께서 박 태감님을 믿지 못할 리가요. 오히려 매우 신뢰하시는 거죠. 박 태감님께서 황실의 가장 큰 충신이시라는 점을 말이죠.”
“크크크, 그래, 그렇지. 나야말로 황실의 아주 큰 충신이지.”
이미 망한 지 육십 년이나 된 나라의 무사를 자처하는 사내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래서 좌장군이 아주 크게 신뢰하는 이 몸이 대장군부에 남게 됐는데, 그런 나에게 무슨 부탁을 하려는 건가?”
“저의 가장 친한 친구가 대장군부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
“네, 화산의 동기인데······.”
“화산의 동기라면 설마 얼마 전 연회에서 영휘현 고 계집애의 콧대를 눌러줬다는 그 소저 말하는 것인가?”
운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가장 친한 친구라······. 그래서?”
“별 건 아니고, 혹시나 대장군부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조금 신경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가장 친한 친구고, 신경을 써달라라······.”
“그 아이의 아버님이 제 사부님의 의동생입니다. 저에게 아주 큰 신세를 베푼 분이고요.”
“좋네. 뭐 내가 가능한 한도 내에서 신경을 써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미래의 서평왕에게 고작 이런 일로 ‘부탁’을 들어줄 수 있다면 나로서도 크게 남는 장사겠지.”
사실 대장군부에 무슨 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 무한 역시 그런 일이 있기 전까지 무슨 일이 생길 거라고 대체 누가 생각했었겠는가. 그렇기에 운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비를 했다.
***
전쟁.
그랬다. 이것은 분명 무림 문파간의 싸움이 아닌 전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싸움이었다. 물론 무공이라는 것이 보급된 이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인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이다. 고대에 수십 만, 아니 백만이 넘는 병력들이 맞부딪히던 전쟁은 더 이상 없었다.
백 년 전, 개국기에 있었던 가장 큰 전투인 파양호 전투조차 양군 합쳐 고작 십 팔만의 병력이 맞붙었을 뿐이다.
이번 전쟁에 나서는 포달랍궁의 총 병력은 무려 팔만.
청해대장군부의 병력 역시 팔만에 곤륜이 휘하의 속가문을 더하여 일만. 공동에서 속가문을 포함하여 약 팔천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
병력 규모로 따지자면 파양호 전투에 필적하는 숫자다.
운호의 휘하에 있는 수색대들 역시 인근의 문파들에서 징발된 인원들로 완편이 끝난 상황이었다. 이름만 천인대가 아니라, 정말 천 명의 규모를 맞춘 천인대들이 셋. 이전에 비하여 정예함은 매우 떨어졌지만 그래도 숫자가 주는 위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한 달 남짓이라고는 하지만 그 동안 손발을 맞추며 군기를 다졌기에 병력의 질 역시 완전히 엉망이라고 볼 수만은 없었다.
“기본적인 진법 훈련은 끝났습니다. 다만 실전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는······.”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그런 부분은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한 보급 역시 고대의 전쟁과는 크게 달라졌다.
만 단위의 병력이 움직일 때는 그에 상응하는 어마어마한 보급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다. 하지만 몇 일이라면 몰라도 몇 주, 혹은 몇 달 치의 식량을 짊어지고 움직이는 것은 무리다. 설사 최대한 짐수레등을 이용한다고 해도 싸우기 전에 먼저 지친다.
하지만 최소한의 무공을 익힌 무사들로 이뤄진 부대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크게 늘어나고, 그것은 곧 식량을 그만큼 덜 짊어져도 된다는 뜻이 된다. 상대방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또 정찰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번 싸움의 경우 상대방 역시 전면전을 원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상대가 원하는 것은 최대한 피하고 싫어하는 것을 강요함으로써 이득을 취하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었지만 현재 상대방이 들이닥치는 것 자체가 전략적인 승리의 결과물이다.
상대방은 이제 무턱대고 전력으로 부딪히는 것이 최선인 상황이었고, 청해대장군부는 여기서 굳이 물러남으로써 청해성에 피해를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전면에서는 상대방을 모조리 박살내고 곤륜의 병력들이 포달랍궁의 잔당을 소탕한다.
결과적으로 두 거대한 병력들은 청해성과 서장의 경계 지역. 녜룽(鲁雅)이라는 분지에서 정확하게 마주쳤다.
“오셨습니까?”
“그래.”
운호에게 배정된 거대한 막사.
누군가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심경이 복잡하신 것 같습니다.”
“당연히 복잡할 수밖에. 평생을 이 순간을 위하여 살아왔다.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 오늘이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그래도 운 좋게 죽기전에 이렇게 그런 순간이 찾아오는구나. 그것도 우리에게 상당히 유리해진 상태로 말이다.”
“제 공이 컸지요.”
“흥, 제대로 처리도 못 하고 기절한 놈을 구해줬더니 입만 살아서는.”
“기절하는 순간까지 붙들고 있었던 덕분에 처리할 수 있었노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체질이 그 말솜씨의 백분지 일이라도 따라왔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을.”
청해대장군부의 일인자.
대장군 영보.
그의 주름 가득한 얼굴이 씰룩였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얼씨구, 아직 경지도 못 밟은 놈이 본좌의 몸 걱정을 하느냐? 그러는 네 놈은······. 으음······ 좀 좋아진 것 같다? 뭐 좋은 거라도 챙겨 먹은 것이냐?”
“네, 어쩌다 보니······.”
“흥, 내가 좋은 거 그렇게 주겠노라 이야기 할 때는 극구 거절하더니. 또 사문에서 나눠준 것은 낼름 잘 처먹었나 보구나.”
“마단을 주시니 그런 거 아닙니까.”
“마단이 뭐 어때서. 지금 네놈 몸 꼬라지 보면 그것도 충분히 잘 소화할 것 같더만. 왜? 너도 늙어서 이 꼬라지 될까봐? 흥, 네 놈 지금처럼 굴다가는 이렇게 늙기도 전에 비명횡사 하게 생겼는데 참으로 쓰잘데기 없는 걸 따지는구나.”
운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계를 넘어선 고수들은 쉬이 늙지 않고 오래 산다. 자하신공을 익힌 청무와 같은 이처럼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오십대로 보이는 것까지는 힘들겠지만 당장 무신 모용경만 하더라도 아흔에 가까운 나이로는 절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영보를 보고 있자면 당장에라도 관짝에 들어가야 하는 노인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처음 그와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지난 육 개월.
영보는 늙었다. 그것도 아주 급격히. 이는 그가 익힌 무공이 마공인 탓이며, 포달랍궁의 삼장로 텐진과의 싸움에서 약간의 힘을 사용한 탓이다.
그의 생명의 그릇은 이미 소생 불가능할만큼 금이 간 상태였다. 그리고 그 금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경지가 경지인 만큼 한 번에 흡입하는 기운의 양은 막대하지만 빠져나가는 기운의 크기는 그보다 더 크다.
결국 좌장군이 전면에 나선 것은 그의 기량이 올라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영보가 활동하는 만큼 더 빨리 죽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뭐, 애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빠르기는 하다.”
“네, 그게 모두 저를 구하기 위해 힘을 쓰신 덕분이시죠.”
한 시진?
텐진과의 싸움으로 그가 태워 먹은 수명이 그쯤 될 것이다.
“알면 됐다. 초절정 고수의 소중한 시간을 소진 시켰으니 그만한 활약은 해야지.”
“안그래도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노인의 시선이 저 멀리 화려하게 치솟은 군기(軍旗)로 향했다.
그 모양은 십삼 년 전에도, 오십팔 년 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감히 상대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전대의 활불이 떠오른다. 당시 그는 무서운 기세로 청해대장군부의 절정 고수들을 도살했었다. 그때, 대장군이던 영보의 아버지 영균을 비롯한 삼 인의 초절정 고수가 목숨으로 그를 막아섰었다. 지금에야 사상의 일인인 최염과 영보 자신이 거기서 크게 한몫을 거들었었다고 알려졌지만, 당시 그들은 감히 그 싸움에 끼어들 깜냥이 되지 못했었다.
활불이 노렸던 것은 청해 대장군부의 미래였다.
실제로 이후 영보가 대장군부를 재건하는데는 정말 터무니 없는 노력이 들어갔었고, 거기에 천운이라고 할만한 행운까지 따라왔었다. 아마 황실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었더라면 5대 활불이 완성되기도 전에 청해 대장군부는 적들에게 짓밟혀 사라졌을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현재.
당시의 활불은 청해대장군부의 미래를 짓밟았다. 하지만 그 미래라는 것은 결국 한 세대일 뿐이다. 그 세대를 너머 그 다음 세대로. 무려 오십 팔년 이라는 세월은 그토록 긴 세월이다.
현재의 청해 대장군부는 저 포달랍궁보다 강하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죽어가는 노인의 평생이 담긴 결실이다.
시대를 좌우할만한 거인의 일생이 담긴 긴 세월.
그것을 앞두고
마찬가지로 그 거인의 반대편에서 활불이라는 위대한 지도자의 빈 자리를 훌륭하게 메워왔던 포달랍궁의 대장로 니마 주걸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옴마니 반메홈. 부디 우리의 미래가 지금보다 나아지기를. 큰 스승이시여. 부디 우리의 아이들에게 그런 미래를 안겨 주시오.’
***
곤륜의 흑백쌍도.
올해로 세수 백 세에 다다른 도인들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지 삼십 년도 더 된 고인들이다.
어지간한 일에는 절대 본산을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이 도인들을 움직이기 위하여 청해대장군부는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 두 도인은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포달랍궁의 본산을 직접 습격했다.
생각보다는 저항이 미미했지만, 그래도 그 오랜 시간 침입을 불허했던 곳답게 험난한 함정들이 가득했다. 초절정의 경지에 다다른 이 두 노인이 아니었다면 곤륜의 피해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다른 거대한 사원. 소문처럼 황금으로 칠한 화려한 사원은 아니었지만, 그 웅장함은 과연 팔백 년 넘게 장족의 정신적, 행정적 중심지라는 이름에 걸맞았다.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느냐!!”
하지만 그 내부. 그 웅장한 사원을 메우고 있어야 하는 사람은······.
“포달랍궁의 요승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머리를 밀었을 뿐. 포달랍궁의 정예는 이곳에 없습니다.”
“맙소사!! 당했구나!!”
텐진의 사망.
포달랍궁은 몇 안되는 초절정의 고수를 잃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오직 손해만을 본 것일까? 텐진을 제거하기 위하여 대장군부는 포달랍궁에 깔아뒀던 눈과 귀의 팔 할을 날려 먹었다.
그리하여 같은 시간.
녜룽 분지에서 포달랍궁과 대장군부의 병력이 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