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역대급 천재-176화 (176/288)

176화

누구의 잘못인가(24)

포달랍궁의 진격이 시작됐다.

사실 예고되어있던 진격이었던 만큼 대장군부의 혼란은 없었다.

“곤륜과 공동은?”

“곤륜에서는 예정대로 크게 돌아 포달랍궁의 후방을 압박할 예정이고 공동은 본대에 합류를 할 예정입니다.”

“중앙에서는?”

“여러 가지로 손을 써봤지만, 여전히 추가지원은 어렵다고 합니다.”

개자식들.

벽안검마 종자명이 이를 악물었다.

분명 청해대장군부와 구대문파 두 개의 힘이 합쳐진 크기는 포달랍궁의 그것보다 거대하다. 하지만 그 크기가 상대방을 압도할 만큼 거대한가, 상대방을 완전히 격멸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또 그렇지 않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황실이 원하는 것은 지금 현 상태의 유지라는 뜻이다.

종자명의 눈앞으로 약탈당해 죽어가는 수많은 청해성의 백성들, 그리고 서장과의 싸움에서 스러지는 병사들이 스쳤다. 그 모든 죽음을 멈출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의 것들은 자신들의 권력 장난을 위하여 ‘균형’이라는 것을 유지하려고 한다. 자신들의 안전이 청해성 백성들과 병사들의 고통 아래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로 말이다.

좌장군 영무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어쨌거나 은검귀조(隱劍鬼爪) 박진문은 철수하지 않겠다는 뜻이니. 종장군의 공이 크다.”

“하지만 저들의 행동이 이래서야 과연 그를 완전히 믿을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전쟁에서 믿지 못할 아군은 적보다 더 무서운 법이니까요.”

“맞습니다.”

“하지만 어찌 됐건 초절정의 고수 하나가 포함된 파견대 전체의 전력은 무시할 수 없다.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억제력이 되지.”

회의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애당초 몇 가지 경우의 수에 관하여 미리 논의가 끝난 상황이었고 지금은 실시간으로 변동되는 상황들을 이야기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공동에서 도착하는 시간에는 변함이 없겠지?”

“네, 최대한 관도를 이용할 수 있도록 협조하고 있습니다. 장문인인 무량자가 공동삼협을 비롯하여 문파의 정예 대부분을 이끌고 오고 있다고 합니다.”

“든든하군.”

청해대장군부는 평소 공동이나 곤륜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들 역시 황실과는 다르게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고사를 잘 알고 있던 만큼 청해대장군부의 일에 적극 협조했다.

“사실 이번 싸움은 그리 큰 위기도 아니다. 우리 청해대장군부가 중천을 향해 떠오르는 태양이라면 그들은 이미 저 서산으로 저물고 있는 지는 해에 불과하다. 이것은 저들의 마지막 발악이다. 우리는 그저 그것을 사뿐히 즈려밟고 대장군부의 오랜 비원을 이루면 그만이다.”

“맞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방심은 금물이다. 구석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까. 물론 쥐새끼가 고양이 코를 물었다고 고양이가 지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코의 살점은 떨어져 나갈 것이고, 나는 그 살점이 여기 그대들이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알겠나?”

“네!!”

***

“돌아가지 않을거야.”

“뭐라고?”

강아현의 갑작스러운 폭탄 발언에 운호가 깜짝 놀랐다.

전쟁을 코앞에 둔 상황이었다. 그런데 돌아가지 않겠다니.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그녀의 아버지인 강진은 별반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운호의 시선을 느낀 강진이 입을 열었다.

“나? 나는 돌아가야 한다. 이번에 확실히 느꼈지만 아무래도 내 전공은 이런 쪽은 아닌 것 같구나.”

“네? 하지만!!”

“아현이의 나이도 이제 약관이다. 어염의 처자도 아니고. 한 명의 무림인이기도 하고. 저 나이에 저만한 무위라면 강호행을 말릴 이유도 없지. 게다가 여긴 운호 너도 있지 않더냐.”

“사숙!! 여긴 이제 곧 전쟁터가 될 겁니다.”

“전쟁터? 그럴 리가. 지금 청해 대장군부의 전력과 오가는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청해성 전체를 통틀어 여기 청해대장군부야 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 될 것 같던데? 안 그러냐?”

확실히 청해대장군부의 대전략을 생각해보면 강진의 이야기는 맞는 말이었다.

“대체 그건 또 어떻게······. 아니, 아닙니다. 사숙님께서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신지는 지금에 와서 중요한 게 아니죠. 가장 중요한 점은 청해대장군부는 현재 전쟁을 앞두고 있고 전쟁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아현아, 절대 안 돼. 사숙 따라서 집으로 돌아가.”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마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 남궁혜가 그렇게 비명에 갔던 것처럼.

“아니, 난 남을 거야.”

“강아현!! 난 네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그러니 당장 사숙을 따라 화산으로 돌아가.”

-쯧

파검이 작게 혀를 찼다.

여인에게는, 특히 아름다운 여인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따위로 말해선 안된다고 나무라고 싶었지만, 운호의 마음이 어떤지, 그리고 그의 과거가 어떤지를 잘 알고 있는 입장에서 마냥 나무랄 수도 없었다.

하여간 청춘남녀란 이토록 쓸데없이 진지하고, 상처 주고, 상처 입는구나. 여기서 이제 저 여아가 눈물방울을 툭 떨어트리고 휙 뛰어가고 운호는 따라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이거면 됐어.’ ‘이게 최선이야.’ 같은 말을 홀로 중얼거리면 완성이다.

하지만 강아현의 행동은 파검의 예상을 살짝 벗어났다.

“싫은데?”

“뭐라고? 난 네 도움 따위는!!”

“누가 너 도와준다고 했어? 내가 너한테 관심 조금 있어 보인다고 뭐든지 너를 위해서 움직일 줄 알았어? 너 그거 자의식 과잉이야. 세상이 네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하는 그런 거.”

“자······, 자의식 과잉? 아니 난 그런 게 아니라······.”

“난 현이 때문에 남는 거야. 전쟁 터지고 불안하다고 해서 곁에서 말동무나 해주려고. 뭐, 게다가 나도 여기서 영 배울 게 없는 것도 아니고.”

“현이라면······, 영현 소저?”

운호가 순간 멍해졌다.

영현이라고? 아현이가 여기 머무른 것은 이제 일주일이 조금 넘었다. 대체 언제 둘이 그렇게 친해진 거지? 물론 이번 연회에 옷과 장신구를 빌려준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생 무공을 수련하며 살아온 아현이와 대장군부에서 아가씨로 살아온 영현 사이에는 매우 큰 간극이 존재한다. 그것을 뛰어넘어 친해질 이유따윈 없을 텐데? 심지어 그녀들은······.

-네놈을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사이다. 뭐 그런 소리냐? 크, 이거이거 내가 다 부끄럽구나.

‘입 밖으로 내지도 않은 이야기 가지고 부끄럽다니요!!’

-하여간, 아무것도 모르는 양 내숭이나 떨어대면서 저 여자들도 네 속마음을 다 알아야 할텐데.

하지만 정신없는 것은 강아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모르게 관심이 있어 보인다고 말을 뱉어버렸다. 물론 아현이 운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을 입 밖으로 뱉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천지 차이다.

아현이 스스로를 침착하게 달래며,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사뭇 어색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강진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참으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딸이다. 어쩌면 장인어른도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돌이켜보면 장인어른은 소여향과 자신의 결혼을 기를 쓰고 반대하셨더랬다. 당시에는 참으로 야속했지만 지금 저 꼴을 보고 있자니 자신도 기를 쓰고 반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진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땠던가. 소여향은 거의 가출까지 해가며, 심지어 그 가출의 과정에서 강진 자신을 납치까지 해가며 결혼을 강행했고 장인어른은 그런 소여향을 찾기 위해 강호에 출두했다가 사고에 휘말려 부상을 입었고, 그 부상이 악화되어 결국 사망했다. 물론 마지막 순간 그들의 혼인을 축하해주긴 했지만, 그 기억은 소여향에게 여전히 큰 상처로 남아있었다.

그와 같은 일을 경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딸의 마음을 축복해주고, 무엇보다 백운호라면 여러 가지 부분에서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강호 최고의 신랑감 아니던가. 무엇보다 강아현의 성품은 소여향의 그것을 빼다박았다. 반대를 해봤자 가출을 하면 가출을 했지 순순히 부모 말을 들을 성품은 아니다.

강진이 고개를 돌려 운호를 바라봤다.

“운호야.”

“네······, 네?”

“나는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혹은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너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을 은혜라 생색내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나와 너의 이득이 맞닿는 지점에서 우연치 않게 너에게 조금 더 큰 과실이 돌아간 것뿐이니까. 하지만······. 아현이 저 아이는 다르다. 저 아이의 시작은 호기심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이후는 분명 너에 대한 호감이었고 호의였다. 그것이 너에게 결과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을 수도, 그다지 없어도 상관없는 무언가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너에게 준 도움보다 훨씬 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나는 네가 그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중요한 것은 의도인가, 아니면 결과인가.

사실 뭐라고 콕 찝어 이야기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운호에게 아주 큰 이득을 준 사람이 직접 자신의 입으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닌 의도라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 말이 주는 깊은 무게감이, 그리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전해주는 진심이 운호에게 강하게 전달됐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그거면 됐다.”

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

“오래간만입니다.”

“오, 소문은 익히 들었네. 참, 이렇게 보니 반갑군.”

은검귀조 박진만.

지금으로부터 근 일 년 전 절강성에서 마주쳤던 바로 그 내관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운호가 만났던 내관들과는 크게 달랐다. 고환은 사내의 근원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이 사라진 내관은 양기가 크게 쇠하여 사내를 상징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불완전해진다.

초절정의 고수인 최염만 하더라도 근육질의 몸과는 거리가 먼, 지방질의 비대한 몸이었다. 하지만 박진만은 달랐다.

거대한 덩치.

그리고 그 덩치에 어울리게 등에 맨 거검의 두께도 심상치 않았다. 마치 전장의 최전방에 서는 용맹한 장수와도 같은 모습이다.

“첫 만남은 영 좋지 못했지만, 나 같은 졸자들이야 하는 일이 어디 나의 의도대로라던가. 그저 위에서 시키니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말게나.”

박진만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먼저 그때의 일을 언급했다.

“십이신의 일좌께서 졸자라니. 소장과 같은 진짜 졸자는 참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십이신은 무슨. 어쩌다 보니 그냥 이름만 거창하게 붙여둔 게지. 차기 서평왕께서 그딴 걸 부러워할 이유가 뭐가 있겠나. 안 그런가?”

그 직설적인 말에 운호가 차마 뭐라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박진만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을 더했다.

“아, 이거 참. 중원 말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군. 내 한어가 아직 어색하여 약간의 말실수를 한 것 같은데 기분이 언짢았다면 용서해주게나.”

“아, 그러고 보니 조선 출신이시라고?”

“고려일세.”

처음이었다.

조선이라는 말에 박진만의 기세가 일변했다. 마치 일반인처럼 잔잔하던 그것이 사나운 폭풍처럼 몰아친다. 운호가 이를 악물었다.

“아차차, 미안하네. 하지만 조선은 나에게는 제법 민감한 주제인지라 최근 몇 년은 굳이 나에게 도발을 하려는 자들이 아니면 꺼내지 않던 말이라네. 나도 모르게 그만 과한 반응을 해버렸군.”

“아닙니다. 그런 주제였다면 소장의 실수였습니다.”

“그래, 그러면 인사는 이만하면 된 것 같고, 어쩐 일로 나를 보자고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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