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누구의 잘못인가(23)
“마음?”
강진이 자신의 턱 끝을 문지르며 잠시 고민했다.
“마음이라······. 너무 추상적이고 모호하군.”
“의념과 마음.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요.”
“다르지. 아주 달라. 마음은 여기. 그리고 의념은 여기.”
강진의 손끝이 자신의 가슴, 그리고 머리를 각각 가리켰다.
“의념은 이성. 마음은 감정이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물론 사람의 이성과 감정이 어찌 칼로 벤 것처럼 구분할 수 있겠냐마는 굳이 따지자면 그렇게 봐야겠지.”
과연 그러한가?
운호가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꼭 뭐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왠지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흥, 말장난하기는. 하여간 이래서 책상물림들은 안된다니까.
파검이 퉁명스러운 말투로 강진의 이야기를 말장난이라 평가했다.
강진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각설하고, 진기는 육체를 강화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의 법칙 내에서의 일이다. 허면 초절정의 고수는, 혹은 몇몇 절정의 고수는 어떻게 그것을 벗어난 힘을 보여주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인간의 강력한 의지. 의념이라고 판단했다. 영혼백육(靈魂魄肉) 가운데서 가장 고차원적인 영. 그것이 만들어내는 이적인 셈이다.”
“잠깐만요. 그렇게 따지자면 말이 좀 안되는데요? 애초에 영혼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내가 진기가 없는 보통 사람이라도 초절정 고수와 같은 초월적인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하잖습니까.”
강진이 고개를 저었다.
“말이 된다. 실제로 초절정 고수가 아니더라도 그런 초월적인 무언가를 보여주는 이들도 있으니까. 예컨대 도를 깨달아 등선했다는 신선들. 혹은 해탈했다는 고승들이 바로 그런 이들이지. 무공 한 번 익힌 적 없는 인간이 천 리 밖을 내다보고, 학을 타고 날아다니며,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 이것이 이적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하지만 그것은······.”
“헛소문이라고? 진기의 운용 역시 천축에서 중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헛소문 취급을 받았었다. 그리고 천년 전만 하더라도 내공을 쌓아 신선이 되는 것보다 도를 깨달아 등선하겠다는 것이 더 정상적인 생각이었지.”
“하지만 당장 주변에 초절정의 고수는 드물어도 실존합니다만, 그런 식으로 이적을 발휘하는 이는 찾아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 가운데 사기꾼 아닌 이가 없고요.”
“그래, 그렇지. 왜냐하면 그것이 가능할 만한 사람은 이제 모두 무공을 익히고 있으니까.”
결국 이것 역시 숫자의 문제다.
강진은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물론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다. 무공이 그러한 모든 길들을 좌도로 밀어내고 우도가 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니까. 찻잔의 물이 넘치기 위해서는 가득 찬 찻잔이 필요한 법이다. 초절정의 경지가 넘쳐나는 찻잔이라면 절정의 경지는 가득 찬 찻잔인 셈이지. 물론 정확히 같지는 않다. 인간을 초월하는 것과 인간으로 완성되는 것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격차가 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인간을 초월하는 데는 완성된 인간 쪽이 그렇지 못한 인간보다 훨씬 수월한 것은 사실이다.”
“그 말씀은 무공은 인간을 완성 시켜 준다는 말씀인가요?”
“그래, 절정의 경지가 바로 그 완성된 인간이다.”
강진이 잠시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네가 먹는 벽곡단은 본래 인간을 신선으로 만들어주기 위한 선단에서 시작됐다. 당시 나의 선조들은 신선이라는 것이 결국 백육이 아닌 영혼에 달린 일이라 여겼고, 그것을 위하여 백육의 성질을 영혼에 가깝게 만들어 인간의 모든 요소를 영혼에 가깝게 만들면 그것이 곧 신선이 되리라 생각했었지.”
강진의 말이 이어졌다. 그는 현재 운호가 섭취하는 벽곡단에 관한 길고 지루한 이야기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확실히 좋은 화자는 절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줄줄이 늘어놓는 성향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필요 없는 이야기는 잔뜩 늘어놓고 정작 필요한 이야기는 건너뛰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운호는 아주 좋은 청자였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렇군요. 그러니까 결국은 지금 제 몸이 저의 의념을 받아들이기 더 쉬운 형태로 변했고 그것은 외공을 통하여 초절정에 오른 고수들의 그것과 흡사하다는 말씀이네요. 헌데 그거야 이미 예전부터 말씀해주셨던 부분이잖습니까. 굳이 이렇게 찾아와서 몸을 살피고 따로 말씀을 하실 것까지는 없지 않나요?”
“그러니까 그것이······.”
혼원단(混元丹),
그래, 문제는 혼원단이었다.
혼원단은 연단사 일맥에 내려오던 단약이 아니라 강진이 직접 개발한 단약이었다. 심지어 그것도 본래는 선단을 만들어내려던 과정에서 나온 일종의 부산물에 가까웠다.
“결과적으로 영혼(靈魂)을 제외한 백육을 강화해주는 약이 됐는데······. 너에게는 이상하게 백(魄)쪽은 효능이 부족하게 나타나고 오직 육만이 강화되는 형태로 가버렸구나. 다행히 너는 영성이 지극히 발달한 체질이라 영혼육의 불균형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부실하던 육이 강화되는 좋은 효과가 이뤄졌지. 문제는 백인데······.”
운호가 단번에 강진의 말을 이해했다.
“내공이로군요.”
백이란 인간의 행동이 만들어내는 사념의 결집체다.
분명 운호의 체질은 내공을 모으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 넘기기에 최근 운호에게 있었던 기연들. 그리고 지금 절정 고수를 초월한 무위와 그만한 깨달음이 있었음에도 초절정에 오르지 못하는 것을 설명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강진의 말에 따르자면 운호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내공을 증진해주는 영약이 아닌, 조금 더 본질적인 의미에서 인간 자체를 성장시키는 혼원단, 그리고 열화된 선단이라 할 수 있는 강진 특제의 벽곡단이 큰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그의 불균형이 더 심화된 것도 그 때문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면 결국 대단한 영단을 먹어서 내공이 한계에 다다르면 초절정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아니, 대단한 영단을 먹어도 어지간해서는 내공이 한계에 다다르기 어려울 거라는 이야기다.”
“······.”
운호가 잠시 침묵했다.
지금 강진의 이야기는 사실상 어지간해서는 너는 초절정에 오르기 어려울 거라는 이야기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화를 터트리는 대신 어째서 강진이 이토록 길게 설명했는지를 먼저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 제가 경지를 넘어서려면 운기법이 중원에 전해지기 전의 방식으로 가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였군요.”
그 침착한 반응에 강진이 오히려 더 놀랐다.
분명 그는 운호에게 혼원단을 건내며 그 부작용으로 내공 일부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만을 경고했다. 하지만 지금 나타난 부작용은 그 이상이다. 달마 도래 이후, 중원의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경지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물론 지금 운호의 급격한 발전은 혼원단, 그리고 특제 벽곡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의 사람은 자신이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에 더 민감하기 마련이다.
운호가 씨익 웃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내공을 쌓기 어려운 체질이었습니다. 기종이 아닌 검종을 택했을 때부터 각오했던 부분입니다.”
“운호야······.”
파검이 쯧쯧쯧 혀를 찼다.
-그래도 여기선 뭔가 영약이라도 더 뜯어 내야지 그렇게 사람 좋은 말을 해서 뭐 좋을 게 있다고.
그 궁시렁거림에 운호가 고개를 저었다.
‘저거 부작용이라는 거 어르신 때문이잖습니까.’
-응?
운호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혼원단을 복용한 직후 파검은 명확하게 훨씬 또렷해졌었다. 어쩌면 지금 파검이 저 정답이라는 검에 거할 수 있는 것 역시 혼원단의 힘을 빌린 것일지도 모른다.
전설에 따르자면 간장과 막야는 한 사람의 인간이 몸을 던져 벼려냈다고 했다. 인간의 영혼백육이 고스란히 들어간 검인 셈이다. 반면 지금의 파검은 영혼은 저 높은 차원으로 떠나고, 육은 자연으로 흩어졌으며 오직 백만이 남은 인간의 파편이다. 그것으로 그런 신검들과 같은 효과를 낸다는 것은 생전의 파검이 우화등선한 대단한 고수임을 고려해도 쉬이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혼원단이 파검의 백을 강화했기에 생겨난 일이라면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정작 그런 사정 따윈 전혀 모르는 강진은 운호의 말을 그저 순수하게 자신을 배려하는 말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만약 운호가 원망을 한다면 부족하겠지만 자소단이라도 하나 더 챙겨주겠노라 이야기 하려 했었다. 최근 홍매당의 일이 미친 듯이 바빴던만큼 그에게 떨어지는 떡고물도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운호가 이렇게 나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고작 자소단 한 알이 아닌 그보다 훨씬 귀한 것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생겨났다. 물론 자신의 딸인 아현이 운호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현재 대장군부에서 운호에게 보이는 반응과 강호에 퍼진 운호의 명성까지 모두 계산한 마음도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좋다. 이거 받고 앞으로 십 년. 딱 십 년만 기다려라.”
“이게 무슨?”
-뭐하냐. 얼른 받지 않고.
파검의 재촉에 운호가 얼떨결에 강진이 내미는 목갑을 받아들었다.
“자소단이다. 그리고 앞으로 십 년. 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십 년 이내에 선단을 완성하여 네게 안겨주마. 물론 그것이 정말 우리 사문의 비원처럼 단번에 인간을 신선으로 만들어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너와 같은 상태의 사람이라면 한계를 넘어서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다.”
“네? 하지만 분명 선단은 앞선 순번들이 많다고······.”
“흥, 그거야 그때의 이야기고. 내가 그렇겠다는데 누가 감히 막겠느냐.”
강진이 자신 있게 큰 소리 쳤다.
물론 근거 있는 큰소리였다. 당시와 현재. 운호의 입지는 완전히 달라졌다. 당시의 운호가 미래가 기대되는 삼대 제자 정도였다면 지금의 운호는 차기 천하제일인. 그야말로 화산을 대표하는 고수로 꼽힌다. 앞으로 십 년이라고 해도 고작 이립.
아무리 귀한 재료로 만들어낸 단약이라도 고작 단약 하나로 절정의 고수를 초절정에 올려 놓을 수 있다면 화산에서 전략적으로 투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마치 과거 백운 진인이 구해왔던 귀물들로 만들어낸 매화 신단을 청자배 사형제들에게 투자했던 것처럼 말이다.
***
거대한 덩치. 근육이 아니었다. 이것은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살 덩어리. 그래 살 덩어리라는 표현이 적합했다.
과연 사람이 이렇게까지 뚱뚱한 것이 가능할까? 혹은 이렇게 뚱뚱한 사람이 자신의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이 가능할까?
살에 파묻혀 흐릿해진 이목구비 사이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큰스승님.”
“후······, 미안하구나. 본불이 부족하여.”
스스로를 부처라 칭하는 살덩어리.
그 살덩어리 앞에 포달랍궁의 이인자. 대장로 니마 주걸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그저 큰스승님께서 과거에 그러셨던 것처럼 모든 것은 미래를 위하여.”
“모든 것은 미래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