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누구의 잘못인가(22)
운호는 과연 자신을 둘러싼 여인들의 치열한 싸움을 몰랐을까?
-이 능구렁이 같은 놈.
그럴 리가.
운호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매우 똑똑한 편에 속한다.
물론 이런 감정적인 일은 단순히 지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지만, 경지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운호는 세상을 보다 넓게, 그리고 깊숙하게 느끼는 초월적인 감각이 있다.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눈을 돌렸다. 어쩔 수 없었다. 운호라고 어찌 꽃보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자신에게 관심 갖는 것이 싫겠는가. 하지만 사랑을 속삭이던 여인이 눈앞에서 한 줌 핏물로 화하던 장면이, 그 순간에 무력하게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순간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백 공자. 아, 아니. 내 정신 좀 봐. 백 장군님.”
“이전에도 부탁드렸지만, 부디, 제발. 그냥 운호라고 불러주십쇼.”
“어머,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저희 남편보다도 더 높은 분이신데요.”
종자명의 부인인 영화가 배시시 웃었다. 젊었을 적에는 제법 미인 소리를 들었겠지만 불혹을 훌쩍 넘어 지천명을 향해 가는 지금, 특별한 무공조차 익히지 않은 그녀는 딱 그 나이대의 평범한 아낙이었다. 하지만 운호는 그 미소가 참으로 보기 좋았다. 이제는 참 오래된, 하지만 너무나도 선명한 어머니의 미소가 그러했다.
물론 운호의 어미는 영화에 비하자면 훨씬 초라했다. 어염의 아낙과 대갓집의 마님이 어찌 같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상하게 영화와 함께 있으면 마치 어머니와 함께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씨가 문제였는지, 혹은 밭이 문제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종자명과 영화는 아이가 없었다. 하지만 만약 자신들이 남들과 같은 시기에 아이를 하나 낳았더라면 지금쯤 운호만한 나이가 되지 않았을까? 물론 저만큼 영특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생긴 건 저만큼 영준하지 않았을까?’
대장군부에서 머물던 지난 시간.
운호가 굳이 따로 집을 구하지 않고 사택과 종자명의 집을 오가며 생활한 데는 두 사람의 이러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휴, 천인장 나부랭이는 이거 서러워서 살 수가 없군.”
“어머? 당신?”
“종 장군님!!”
종자명이 투덜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지만 투덜거리는 입과 달리 그 만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아주 지금 대장군부에 난리가 났다네. 그 예쁜 아가씨는 대체 누구냐고 말이지. 흐흐흐, 고향에 그런 예쁜 아가씨를 숨겨뒀으니 영가의 여인들이 눈에 찰 리가 있었겠나.”
“그런 거 아닙니다. 게다가 화산파는 제 고향도 아니고요.”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일세. 말이. 어쨌거나 부인. 부인도 이제 백 장군 혼사는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구려.”
“그런가요? 백 장군. 그러면 그 아가씨 한 번 집에 데리고 와요. 부족한 솜씨지만 제가 맛있는 거라도 한 번 대접할테니까요.”
지난 시간 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영 부인이 이렇게 나오면 말이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을. 저렇게 해사하게 웃으며 권하는 것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는 것을.
“아니, 진짜 아현이랑은 그런 사이가 아닌데······.”
“아 참, 그리고 그 아현이라는 아가씨. 그렇게 꾸며준 것이 현이라고 하더구나.”
“네? 현이 가요? 하지만 분명 그 아이도······.”
영화가 운호를 슬쩍 바라보며 뒷말을 삼켰다.
영현은 그녀의 조카 손녀뻘 되는 아이다. 어린 시절부터 참으로 영특하여 그녀가 특히 예뻐한 아이였다. 지금 그녀가 운호에 대한 소식을 영화 자신을 통해 알아가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굳이 막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만약 운호가 영씨 가문과 혼사를 맺는다면 한 평생을 살아갈 반려로 영휘현 그 아이보다는 영현 쪽이 더 어울릴거라는 영화 본인의 판단도 있었다.
“그러면 백 장군. 그 아현이라는 아가씨에게 물어보고 괜찮다면 현이도 함께 초대하는 걸로 하죠.”
“네?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여인이 그렇게 꾸미는 건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랍니다. 그런 걸 도와줬다면 적당한 사례를 해야 아현 아가씨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거에요.”
“그런가요? 하지만 그런 거라면······.”
“백 장군. 적당히 뭔가 선물하는 걸로 괜찮겠지. 하는 그 생각 넣어두세요.”
운호가 입을 닫았다.
역시 엄마 앞에서는 아니, 관록 앞에서는 당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날 저녁.
운호는 상당히 불편한, 하지만 세 여인은 이상하게 단란한. 그리고 종자명은 히죽히죽 웃어대는 기묘한 식사가 지나갔다.
***
“으음······.”
강진이 운호의 몸을 살피며 짧게 신음했다.
사실 무인이 자신의 몸을 이렇게까지 무방비하게 맡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애당초 운호가 아무것도 없던 시절, 강진에게 여러 가지를 뜯어내고 궁극적으로는 ‘선단’이라는 것의 최초 수혜자가 되기 위하여 내건 조건이 바로 그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것은 당시에는 강진이 운호에게 베푼 제법 큰 은혜였지만, 운호가 이렇게까지 특이한 형태로, 놀랍게 성장한 것을 고려해본다면 이것은 오히려 운호 쪽이 강진에게 베푸는 꼴이 되버렸다.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운호의 질문에 강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허면?”
“모든 것이 좋다. 이상할 정도로 너무.”
강진은 지금까지 절정 고수 가운데 두 사람의 몸을 이 정도로까지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하나는 자신의 아내인 홍매당주 능라나찰 소여향. 그리고 하나는 운호의 스승이자 자신의 의형인 현종자 공야찬이었다.
그들의 몸은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한계치에 거의 근접해있었다. 물론 차이는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사람이기에 타고나는 한계점과 같은 것이다. 여인의 몸은 사내보다 근육을 만드는데 부적합하다. 이것은 타고난 성질의 차이도 차이지만 당장 흉부의 근육만 보더라도 여인은 아랫가슴 쪽에 사내보다 더 많은 지방을 축적하고 그로 인해 근육의 절대치가 부족해질 수밖에 없다.
대신이라고 해야할까? 여인의 몸은 보통 사내보다 더 부드러운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 부드러움은 결국 관절의 가동범위로 연결되고 만약 관절 인근의 근육이 비대해진다면 이 가동범위는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절정 고수들에게 말하는 인간의 한계라 함은 이와 같다. 타고난 자질과 성향. 본인이 익힌 무공의 형태. 그 모든 것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봤을 때 다다를 수 있는 극한지점에 도달한 것이 바로 절정의 고수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운호의 몸은······.
“네 몸은 이미 절정을 넘어섰구나.”
“네? 하지만.”
운호가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운호 자신도 조금은 느끼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상태가 보통은 아니라는 것을. 바보가 아닌 한에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 검강이나 어검술이야 정답에 깃든 파검의 도움을 받는다고 치자. 하지만 그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절정의 고수가 초절정의 고수와 박빙으로 겨룬다?
게다가 대장군 영보와 굴불신마 영무결이 모두 입을 모아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 운호 자신은 스스로의 생명을 태워 실력을 높이고 있다고.
강진이 말을 이어갔다.
“본래 근육은 한계라는 것이 존재한다.”
연단사 일족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하여, 참으로 많은 연구를 해왔다. 그리고 그 세월은 최초의 황제인 시황제부터 무려 이천년에 가까운 세월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국가의 최고권력자의 비호를 받아가며 연구했던 기간이 무려 천오백년에 달한다. 송태종 이후 박해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기록은 조금의 유실도 없이 강진에게 오롯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강진은 연단사 일족을 통틀어서도 유래를 찾기 힘든 천재였다.
“우리 선조 가운데는 근육 그 자체에 집중했던 이가 있었다. 그는 왜 같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누구는 더 강한 힘을 내고, 누구는 그렇지 못한가에 의문을 가졌다. 근육의 질이 다른 것일까? 내공에 반응하는 성질이 다른 것일까? 그렇다면 동물은 어째서 더 작은 체구로 더 폭발적인 힘을 내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동물과 인간의 근육은 그 구조부터 다르다. 그리고 현재 중원에 퍼진 외공 가운데 금강 계통의 외공이 역근에서 시작됐다면 불사 계통의 외공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상상하지 못했던 비사.
하지만 그것은 지금 운호에게 그리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운호가 눈빛으로 강진의 말을 재촉했다.
“이야기가 길어졌구나. 어쨌거나 불사 계통의 외공이 근육의 종류 자체를 변환시키고 내가진기라는 힘을 통하여 이적을 만들어 낸다고는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건 어디까지나 자연계에 존재하는 다른 동물들의 그것과 흡사한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하지만?”“그것을 통하여 초절정에 오른 고수는 완전히 이야기가 달라진다.”
초절정에 오른 외공의 고수.
순간 운호의 머릿속에 그날, 마교의 대주교와 상대하던 무신 모용경이 떠올랐다. 그 처절했던 싸움. 모용경이 보여줬던 투혼은 운호의 머릿속에 깊숙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부서진 몸을 순식간에 수복한다. 심지어 어떤 이는 반으로 갈라진 몸을 붙여 살아난 적도 있다. 일반적인 외공의 고수, 절정에 다다른 이들의 재생이 빠른 회복, 혹은 꼬리가 잘린 도마뱀이 다시 꼬리를 만들어내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면, 그들은 마치 부러진 검을 이어 붙이고, 혹은 박살난 강철을 다시 녹여 검으로 벼려내는 것에 가깝다. 너는 이것이 사람의 몸으로 과연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강진의 질문에 운호가 답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 그런 의문을 가진 적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초절정에 오른 고수는 검을 타고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고, 그들이 휘두른 검에 집채만 한 바위가 가루가 되어 사라지며 몇백 리 떨어진 곳의 기척을 감지한다. 박살난 몸이 재생되는 것 역시 그와 같은 선에서 보자면 그저 초절정 고수이기에 당연한 일이다.
강진이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당연한 일이란 없다. 탐구하고 탐구하다 보면 결국 답이 나온다. 물론 그것이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사람이라면 그것을 탐구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다 보면 언젠가 누군가는 진짜 정답에 도달하겠지.”
“그래서 혹시 제 몸이 지금 그와 같다는 말씀이십니까?”
뜬금없었다.
외공의 고수와 같은 몸이라니. 물론 특제 벽곡단을 꾸준히 복용함으로써 회복이 조금 빨라지긴 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운호가 보여주는 회복력은 외공의 절정고수가 보여주는 재생능력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것을 답하기 전에 저 초절정의 고수라는 것들이 어찌하여 그런 기이한 것이 가능한지. 내가 내린 답을 먼저 말해주마.”
강진이 입을 열려는 찰나.
운호가 거의 동시에 하지만 한발 빠르게 답했다.
“마음입니다.”
“의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