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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역대급 천재-173화 (173/288)

173화

누구의 잘못인가(21)

아현이 침을 꼴깍 삼켰다.

눈앞의 여인은 무공이라고는 고작해야 건강을 위한 양신술 정도밖에 익히지 못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여인이 감히 ‘마교’의 씨를 말려버리겠다는 말이 어째서 이토록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어찌 됐건 제법 마음에 드는구나. 얼굴만 봤을 때는 영 별로라고 생각했었는데 너라면 괜찮을 것도 같다. 내일 작은 고모가 개최하는 연회에 초대 받았다고 들었다. 내가 도와주마.”

“네?”

돕는다니? 대체 뭐를?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 잠시만요. 이게 다 뭔가요.”

“뭐기는 옷이지. 안 봐도 뻔하다. 연회에 그 꼴로 갈 생각이었겠지. 나는 여인이기 이전에 무인이니까. 이딴 생각이나 하면서.”

지독하게 화려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궁장들이었다.

“새 옷을 맞추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거야. 다행히 침모의 솜씨가 좋고, 네 키가 나와 크게 차이 나지는 않으니까 내일까진 충분히 몸에 맞출 수 있을 거야.”

무려 여섯 명의 시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음, 아냐. 이건 좋지 않아. 아, 그러고 보니 내일 백 장군은 무슨 옷을 입는다고 그랬지?”

“영 부인의 말씀으로는 지지난번에 입으셨던 그 무복을 다시 입고 나오실 거라고 합니다. 몇 번이나 말려봤지만, 도저히 어쩔 수 없었다고······.”

“아니다, 그래도 다행이구나. 지지난번에 입었던 그 무복이면 그나마 제일 괜찮은 옷 아니더냐. 그러면 이거랑 이거 중에서 골라보자.”

영현이 강아현에게 옷 두 벌을 권했다.

“아니, 정말 괜찮습니다. 정 그렇다면 아가씨께서 먼저 고르시는 게.”

“걱정하지 말아라. 내 옷은 이미 골라뒀다. 아무렴 내가 너처럼 당장 내일 나갈 연회에 옷도 한 벌 제대로 골라두지 않았을 리 있겠느냐.”

***

“정말 괜찮으십니까?”

“그래, 젊은 애들 모이는 자리에 늙은이가 나가서 뭘 하겠느냐.”

“늙은이라니요. 딱 사숙 또래의 어른들도 많이 나오십니다. 당장 보급대장님도 참석하시기로 하셨는걸요.”

“됐다. 강호인이 관과 얽혀서 좋을 것도 없다.”

“허면 다 같이 안 나가는 것이······.”

“아현이가 있지 않더냐. 그래도 초대장까지 왔는데 안 가는 것은 또 예의에 어긋나지. 나는 그냥 여기서 쉬고 있을 테니 아현이나 잘 챙겨주려무나.”

강진이 불편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운호에게 이야기했다.

불굴신마의 한 수는 실로 대단하여 정말 외상 따윈 하나도 없이 정확하게 늑골 하나만을 갈랐다. 당장 드러누워야 하는 상태는 아닌, 그저 운신에 약간의 불편함이 있고 큰 후유증 없이 아물 수 있는 부상인 것이다. 그렇기에 더 무섭다. 그 말은 불굴신마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같은 수법으로 조용히 심장을 터트릴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전설상의 심검(心劍)이 이러할까?

“알겠습니다. 저도 그런 자리가 익숙한 것은 아니지만 최대한 아현이를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네 몸도 조만간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꾸나.”

“네? 혹시 뭔가 문제라도?”

“아니, 아니다. 그저 지난 이 년 동안 서신만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지 않았더냐. 한번 직접 살펴볼 때도 됐지 싶구나.”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내일 연회가 끝나고 제가 한 번 시간을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고대의 어느 철학가는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하는 무언가이며, 이제 막 태어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아름다운 것에 끌리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절대성의 증명이다.

그녀는 그런 복잡한 철학의 이론 따윈 조금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만약 절대적인 미의 화신이 존재한다면 어쩌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오늘의 영휘현은 그만큼 아름다웠다.

귀하디 귀한 붉은 촉금에 금실과 은실로 수놓은 궁장.

금과 옥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장신구들. 그 가운데 백미는 서장산 경옥을 통째로 깎고, 진주와 홍옥으로 장식된 봉잠이었다. 그야말로 지금 그녀가 몸에 걸친 의복과 장신구만 하더라도 장원 한두 개 정도는 너끈히 사들일만한 귀물들이다.

하지만 정작 더 놀라운 점은 따로 있었으니 보통 사람이라면 그저 들러리로 만들어버릴 그 화려한 궁장과 장신구조차 그저 그녀의 미모를 돋보이게 만드는 ‘수단’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압도적 미모.

미의 화신이라는 월궁의 항아가 이러할까? 하지만 정작 그 미모를 뽐내는 영휘현은 연회를 즐기기는커녕 기다리던 사람은 오지 않고, 초대했는지조차 가물거리는 사람들만 들어오는 입구를 바라보기에 바빴다.

“오, 연매. 오늘도 참으로 아름답구려. 과연 천상에는 항아가 있다면 청해에는 가연이 있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소. 군부의 사람들이 나의 활 솜씨를 궁신 예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 어쩌면 그대와 나의 미래를 둘러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싶소. 하하하.”

오늘도 왠 머저리 하나가 들러 붙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었다.

이 머저리는 월궁의 항아와 궁신 예의 마지막이 슬픈 마무리였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모를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멍청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이겠지.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선물을 잊었구려. 이번에 가문의 광산에서 제법 큰 옥이 출토됐다고 하지 않았소?”

“아,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주 커다란 백옥이었다고 들었는데요.”

“그렇지. 워낙에 큰 옥이라 커다란 벽을 만들고도 그 남은 조각으로 장신구를 넉넉히 만들 정도였다오. 그래서 말인데······.”

사내가 진주로 장식된 옥팔찌 하나를 내밀었다. 적어도 금자 이삼십 냥은 너끈히 나갈만한 귀물이다. 뾰로통하게 입구만 힐끔거리던 영휘현이 그것을 확인한 순간 그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어머, 조 오라버니. 고마워요. 사실 요즘 경성에서는 경옥이 유행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옥중지왕은 역시 백옥 아니겠어요?”

“그렇지. 역시 영매는 물건을 보는 눈이 있다니까. 어디 지금 한 번 해보겠소?”

사내가 영휘현의 팔목을 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가 조금 더 빨랐다.

“아이참. 오늘 제가 입은 옷은 붉은색인걸요. 그 팔찌에는 어울리지 않아요. 다음에, 다음에 그 팔찌에 어울리는 옷을 입은 날에 차는 게 더 좋겠어요.”

허무하게 허공을 휘저은 그가 뻘쭘한 손을 회수하며 뒷통수를 긁적였다.

“하하, 그렇지. 내가 참으로 어리석었소. 뭐든 가장 어울리는 것이 있는 것을. 그러면 이 팔찌는······.”

“경아야. 이리 와서 팔찌 잘 받아서 내 패물함 가장 위쪽에 잘 모셔두려무나. 내 다음번 연회에는 꼭 이것을 차야겠다.”

“네, 아가씨.”

언제나처럼 그녀의 시녀 하나가 조용히 선물을 수거했다.

그래도 패물함에 넣어 두라는 것을 보니 아슬아슬하게 기준점은 통과한 듯싶다. 혹은 저 사내가 앞으로 더 귀한 선물을 마련해올 가능성이 크다고 봤을지도······.

금자 30냥짜리 팔찌를 선물받은 영휘현이 방긋방긋 웃으며 사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렇게 일 각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연회장의 입구가 열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검은빛의 비단 무복.

몇 차례를 빨아서 그럴까? 염색이 조금 빠져 약간은 색이 바랜 느낌도 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 색 빠짐조차도 매력으로 보이는 것을.

질끈 묶은 영웅건에는 은실로 용이 수놓아져 있다.

요즘 북경에서는 촌스럽다고 하여서 하고 다니는 이가 드물고, 그것은 이곳 대장군부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것 역시 마찬가지로 상관없었다. 그것을 착용한 이가 저토록 헌앙한 것을.

“백 장군님!!”

영휘현이 환하게 웃으며 입구로 달려나갔다. 그 미소는 조금전까지 팔찌를 건낸 사내에게 보여주던 미소와는 사뭇 달랐다.

-으드득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 팔찌를 건낸 조씨 사내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비이성적으로 되는 법이다. 사내의 원망은 그를 버리고 달려나간 영휘현이 아닌 입구로 걸어들어오는 저 백운호에게 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운호가 휘현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 숙였다.

“오래간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정말 오래간만이죠. 제가 장군을 몇 번이나 초대했는데. 참으로 섭섭하네요.”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중임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군무가 워낙 바빠서요.”

“흥. 그러시겠죠. 대장군부의 군무는 온통 백 장군이 처리하고 있으니까요.”

영휘현이 입을 비쭉거렸다. 미녀란 실로 불합리한 존재다. 놀랍게도 그 모습조차도 사랑스러웠다. 그녀를 지켜보던 사내들의 분노가 운호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운호의 뒤편. 하얀 궁장을 걸친 여인이 쭈뼛쭈뼛 운호 옆으로 걸어 나왔다.

수수한 은장신구. 화장 역시 그리 짙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그녀에게 쏠렸다. 사실 그것은 어지간해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 앞에 선 사람이 누구인가. 천하를 통틀어 손에 꼽힐 미모를 자랑하는 영휘현이다.

‘저게 누구야?’

‘대장군부에 저런 미인이 또 있었어?’

밤하늘의 별이 아무리 밝다고 해도 태양 앞에 서면 그 빛을 잃는다. 태양 앞에서 그 빛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같은 태양뿐이다. 그녀의 미모가 그러했다.

“누구?”

“아, 소개가 늦었군요. 제 동문인 강아현이라고 합니다. 아현아 이쪽은 좌장군님의 따님이신 영휘현 소저다.”

아현이 우아하게 포권했다.

궁장을 입고 하는 포권이라니. 참으로 이색적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눈에 띈다.

“화산의 삼대 제자 강아현입니다.”

“그······, 그러시군요.”

너무 당황해서일까? 영휘현이 스스로의 이름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잊었다. 그녀의 시선이 빠르게 강아현을 훑었다.

수수하다. 하지만 동시에 화려하다. 이 지독한 모순은 무엇일까?

답은 간단했다. 저 수수해보이는 물건들이 사실은 진짜 수수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궁장은 지금 영휘현이 입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최고급의 촉금이다. 수수해보이는 것은 화려한 염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신 은실로 정말 정교한 수가 놓여있다. 게다가 은으로 만든 장신구들 역시 재질이 은일 뿐. 그것을 세공한 장인들의 솜씨가 놀랍다. 전체적인 가격으로 따지자면 영휘현 본인이 걸치고 있는 옷과 장신구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망했다.

대체 누구일까?

영휘현의 시선이 빠르게 장내를 훑었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 어느 한 탁자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싱글생글 웃고 있는 한 못생긴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한 살 많은 조카인 영현이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지금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작품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이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영휘현이 더 화려하고 더 비싼 옷을 입었음에도, 평범한 흰색 궁장과 은장신구를 한 강아현보다 딱히 돋보이지 못했노라고.

“아가씨?”

“아, 죄송합니다. 잠시 빈혈이 와서. 그러면 부디 재밌게 즐겨주시기를.”

“네, 감사합니다.”

흰색의 궁장과 검은색의 무복.

선남선녀라는 표현이 참으로 어울리는 그 조합 앞에서 영휘현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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