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누구의 잘못인가(20)
강진이 꿀꺽 침을 삼켰다.
감히 똑바로 바라볼 엄두도 나지 않는다.
신분? 아니다. 강진은 스스로를 진정한 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인세의 규칙은 감히 그를 억누를 수 없었다.
이것은 그저 ‘격’의 차이다. 강진은 이와 비슷한 위압감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권신 청무 진인.
화산을 대표하는 무인인 그 노인은 종종 마치 인간을 초월한 것 같은 느낌을 주곤 했다. 지금 그가 마주하는 저 굴불신마 영무결 역시 그와 흡사했다. 아니, 오히려 더하다. 권신 청무 진인에게서 느껴지던 감정이 호감이라면 저 굴불신마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적의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대가 화산금정인가?”
“네, 그렇습니다.”
“황제 시해자의 후예라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강진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영무결을 바라봤다. 얼굴만이 아니다. 호흡, 심박, 시선. 어느 것 하나 이상한 점이 없었다. 그 뻔뻔한 모습에 영무결이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연기가 참으로 일품이로구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군요.”
“네가 백 장군에게 보내는 단약.”
“아!! 그 단약이라면. 그건 사실 제가 젊었을 적에 우연히 얻게 된 약방을 기초로 만들어낸 단약입니다. 식사 대용으로 섭취했을 때 몸과 머리를 맑게 하고 탁기를 제거해주는 효능이 있지요. 헌데 설마!! 그게 황제 시해자들의 비방이었단 말입니까? 맙소사.”
“인정하마. 연기가 참으로 일품이다.”
이름난 예인이라도 감히 자신 앞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영무결이 발휘하는 이 무시무시한 기세를 두고 연기를 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하는 것과는 다르다.
물론, 이쯤 되면 강진의 말이 진실일지도 모른다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무결은 확신했다. 지금 저 녀석은 거짓을 말하고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을 앞에 두고 덜덜 떨면서 긴장하는 것이 당연하다.
설사 일류의 고수라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다. 그가 익힌 마공은 그런 공부다. 실제로 강진도 처음에는 그런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오히려 더 긴장해야 하는 질문에서 평온을 되찾았다. 준비된 연기라는 뜻이다.
“뭐, 솔직히 송이 망한 지도 벌써 오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황제 시해자이니 뭐니 하는 것을 따질 이유도 없지. 나는 그것보다 지금 백 장군이 먹는 단약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보고 싶다.”
그것은 사람을 사람이 아니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약이다. 인간이 상위의 차원으로 도약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을 강제로 없애주지만, 동시에 인간이 인간으로 있기 위해 꼭 필요한 것까지 없애버린다. 그렇기에 그것은 독약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만약 백 장군이 그것의 복용을 중단한다면 중단으로 인한 부작용은 없는 것인가? 금단증상은? 혹은 복용을 멈추는 순간 거기서 상태는 더 진행되지 않는 것인가?”
“글쎄요······. 저도 전해오던 비방을 토대로 작은 수정을 가한 정도에 불과한지라······. 그 비전서에 적혀있던 대로라면 부작용이 생기기 전에만 중단한다면 아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사실 곡기를 모조리 끊고 그렇게 단약만을 복용한다는 것 자체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제가 어디에선가 듣기로는 그 황제가 사망했던 일도 곡기를 끊지 않아 효능이 사라졌는데, 억지로 그것을 이어가겠다며 더 독한 약을 만들어 내라 명령하여 생겼던 일이라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흥, 황제 시해자들의 후예가 아니라고 했으면서 그런 이야기는 잘도 알고 있구나.”
“워낙에 유명한 이야기인지라 우연한 기회에 업계 사람에게 들었습니다.”
영무결은 순간 저 녀석의 혀를 뽑을까 잠시 망설였지만 참았다. 운호가 사숙이라고 부를 만큼 각별한 사이라고 했다. 게다가 화산이라면 제법 큰 세력으로 공동, 곤륜과 함께 구파로 분류된다. 전쟁을 앞둔 지금 공동과 곤륜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굳이 그들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교훈은 괜찮겠지.
영무결의 검지 손가락이 강진의 갈비뼈를 가리켰다.
-서걱
지풍? 아니었다. 이것은 강진의 인지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그의 늑골 하나가 마치 칼로 베인 것처럼 부러졌다.
“연기는 나쁘지 않았으나 능글맞게 구는 것도 사람을 봐가면서 해야 하는 법이다. 감당할 수 없는 고수를 만났을 때 보여줄 모습도 하나 만들어서 연습해 두는 것이 좋겠구나. 오늘은 백장군의 면을 봐서 내 이 정도로 끝내도록 하마.”
“가······, 감사합니다.”
***
대장군부에 도착하여 하루. 강아현은 자신의 몸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괜찮아졌음을 깨달았다.
사실 지금 그녀의 수준에서 옥녀진결 삼단공을 사용하는 것은 딱 한 번이 한계였고 그나마도 그 이후 며칠은 정양해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인데 어찌 그런 것을 따질까. 덕분에 최악의 경우 진기에 손상까지 각오했건만 진기의 손상은커녕 오히려 이전보다 경맥이 훨씬 단단해진 느낌이다. 물론 본래 부러졌다 붙은 뼈가 단단해지고, 찢어졌다 회복된 거죽이 질겨지는 법이기는 하다만 그 이상이다. 이제 삼단공의 옥녀진결을 사용해도 하루 정도 휴식만 취하면 괜찮을 것 같은 수준이다.
상처난 직후 복용 했던 극품의 흑삼정. 그리고 그 약기운을 가장 적절한 곳에 인도한 운호의 처치 덕분이었다. 확실히 운호가 고수가 되기는 됐구나 하는 것이 확 와닿았다. 초절정 고수를 단신으로 제압했다는 소문이 영 헛소문만은 아니겠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똑똑
“누구세요?”
“좌장군님의 맏손녀이자, 보급대장님의 큰따님이신 영현 아가씨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네?”
좌장군의 맏손녀이자 보급대장의 큰딸?
높은 사람이라는 건 잘 알겠다. 헌데 그런 사람이 갑자기 아현 자신을 왜? 잠시 당황한 아현의 귀에 앳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볼 일이 있어 찾아왔네. 미리 연락하지 못해 미안하네만 잠시 얼굴 좀 보고 이야기 나눴으면 하네.”
무슨 일일까.
일단 대장군부에서도 제법 귀한 아가씨인 듯한데 밖에 세워둘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아현이 문을 열고 그녀를 맞이했다.
단아한 궁장의 여인.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 여인의 맑은 눈동자였다. 가끔 그 눈동자가 마치 밤하늘의 별과 같다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저 영현이라는 여인이 딱 그러했다. 비록 미색은 그에 미치지 못했으나 실로 현숙해보이는 것이 사대부집에 맏며느릿감이 바로 이러한 여인이겠다 싶었다.
영현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과연, 사람들이 말이 많은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구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지금 대장군부에 아주 소문이 자자하다. 여자를 보기를 돌같이 하던 백 장군이 아주 아리따운 여인네를 데리고 왔다고 말이다.”
강아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대체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리따운 여인네라는 말보다 운호가 여자 보기를 돌 같이 했다는 말이 더 기분이 좋게 느껴진다.
영현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고 보니 내 너의 이름도 묻지 않았구나.”
“강아현이라고 합니다.”
“아현이라. 내 이름과 같은 글자를 사용하는구나.”
영현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는 그와 비슷한 이름을 하나 알고 있었다.
영휘현.
촌수로 따지자면 그녀의 작은 고모였고, 나이로 따지자면 그녀보다 한살이 어린 여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휘현과 그녀는 대장군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 가장 못생긴 여인으로 이름이 높았다. 게다가 이름자에 같은 현(賢)자를 사용한 탓에 더 자주 비교됐다. 가끔 짓궂은 자들은 영휘현을 아름다운 현(佳賢)이라 부르고 영현을 (醜賢)이라 부르기도 했다.
“나도 이름을 외자가 아닌 두 자로 지었어야 했나 싶구나.”
“네?”
“아, 아니다. 내가 실없는 소리를 했구나. 그보다 백 장군과 함께 수학을 한 사이더냐? 백 장군이 통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내 그의 과거가 궁금한데 아무것도 알 길이 없으니 참으로 답답하던 차였다. 혹시 괜찮다면 나에게 이야기를 좀 들려줄 수 있느냐?”
“운호의 과거를요? 설마?”
“그래, 내가 그를 연모하고 있다. 물론 외사랑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현이 깜짝 놀랐다.
대장군부의 좌장군이라면 대장군의 큰아들이자 차기 대장군으로 알고 있다. 그런 이의 맏손녀가 운호를 연모한다고? 심지어 그것을 부끄럼 없이 이렇게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니.
영현은 그런 강아현의 놀람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다.
“역시 너와 백 장군의 사이에 무언가가 있나 보구나.”
“아뇨, 그런게 아닙니다. 그저 누군가를 연모한다고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여인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라 그렇습니다.”
“강호의 여인들은 그런 것에서 조금 더 자유롭다고 들었는데?”
“네,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강호의 여인도 여인입니다. 먼저 나서서 사내를 연모한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요.”
“너도 그러하냐.”
영현의 질문에 강아현의 얼굴이 또 다시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백 장군도 참으로 죄 많은 사내로구나. 영씨 집안 여인네들을 모조리 홀린 것으로 모자라 이토록 꽃다운 아가씨까지 홀려놨으니.”
“네네? 아니, 그게 그런 것이 아니라······.”
“좌우지간 백 장군의 과거 이야기나 좀 들려주려무나. 대신 나도 백 장군이 이곳에서 어떠하였는지를 이야기해줄 테니 말이다.”
한 남자를 연모하는 두 여자가 그 남자의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하는 광경은 참으로 기이했다. 하지만 정작 그 대화의 주체들은 그 대화가 참으로 즐거웠다.
“허어, 그러니까 정말 백 장군이 그렇게 약골이었단 말이더냐? 고작 십 년도 되지 않은 옛날에?”
“네, 게다가 키도 어찌나 작고 깡말랐었는지. 저보다도 한 뼘이나 작았었다니까요.”
“하긴, 상천 삼촌만 하더라도 육 년 전까지는 나보다 훨씬 작았는데 지금은 어느새 내가 올려다봐야 하더구나. 사내들이란 참 느리게 자라는 것 같은데 잠깐만 시선을 돌려도 그렇게 훌쩍 자라있으니. 참으로 묘하다.”
어쩌면 그것은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운호의 짝이 되기 힘들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영현은 자신의 외모 때문에. 그리고 강아현은 운호가 지금 어째서 저런 모습이 됐는지를 알고 있으므로.
“뭐라고? 그러니까 백 장군과 서로 연모하던 정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이 눈앞에서 시체도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고?”
“네. 저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 정확히 그것을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듣기로는 그러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랬구나, 그랬어.”
사랑하는 여인을 눈 앞에서 잃어버린 사내. 그리고 그런 사내를 연모하는 여인들.
영현은 어째서인지 운호에 대한 마음이 이 대화로 더 자라났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운호를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무래도 그 마교라는 놈들. 씨를 말려버릴 필요가 있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