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누구의 잘못인가(18)
새하얗게 질렸던 강아현의 안색이 조금 돌아왔다. 처음 운호가 흑삼정을 복용할 때 무슨 짓이냐 물으려던 강진도 아현의 그 모습에 침착함을 조금은 되찾았다.
“고맙다 운호야.”
“아닙니다, 그보다 어쩐 일이십니까. 사숙.”
“어쩐 일이기는. 너를 만나러 온 것이지. 그보다 너야말로 어쩐 일이냐. 아니, 대체 여긴 어떻게 된 일이냐. 대장군부를 지척에 둔 곳에서 이런 도적떼라니.”
강진의 눈에 비친 광경은 실로 참혹했다.
흐르는 피와 널브러진 살점.
시체와 시체와 시체. 칼을 쥔 자들도 있었고, 칼을 쥐지 않은 자도 있었으며, 칼을 쥐기에는 너무 늙은 이도 있었고, 아직 칼이라는 단어조차 알지 못하는 아이도 있었다.
강진이 알고 있는 세계는 이렇지 않았다. 강호인들은 여전히 칼을 차고 다니지만, 그들이 칼을 휘두르는 상대는 어디까지나 마찬가지로 칼을 쥔 상대들이다. 물론 힘을 가진 이가 그렇지 못한 이를 핍박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한 이래, 아니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어디에나 있던 일이지만, 그것이 도를 넘어서면 징치하는 자가 있는 것 역시 어디에나 있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정도이며 그것이 중원 무림의 질서다.
“전쟁입니다.”
“전쟁?”
“네, 며칠 전, 포달랍궁이 발호했습니다. 현재 공동과 곤륜에는 지원을 요청했고 인근 문파를 소집했습니다. 하지만 포달랍궁 정예 병사들의 움직임에만 모든 눈과 귀가 집중된 덕분에 경계망에 구멍이 생겼고 그 틈으로 파고 들어온 장족의 소규모 부대입니다. 아무래도 싸움을 피해 화전민 마을을 약탈한 것 같군요.”
“허면 네가 여기 온 것도?”
“제가 여기 온 것은 사숙님과 아현이가 이곳으로 오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는 것을 들었다고? 대체 어떻게?”
“네, 관도를 통해 오는 부녀로 보이는 한 쌍의 남녀. 화산파의 의복을 입었고 절세미남과 절세미녀라는데 사숙님과 아현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요. 다만 설마 관도를 벗어나실 줄은 몰랐던지라 길이 엇갈렸습니다. 뭐, 덕분에 저자들을 징치할 수 있었습니다.”
강진이 기억하는 운호는 이제 막 열일곱 살을 지난 어린아이였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거대한 힘을 얻었지만,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많은 것을 잃어버린 아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 앞에 선 운호는 조금 달랐다. 그때와 비교하면 훨씬 크다. 단순히 키가 더 자랐다는 말이 아니다. 키는 당시 그가 예측했던 것처럼 마지막 헤어진 시점보다 특별히 더 자란 것은 아니었다. 몸이야 조금 더 단단해졌지만 그뿐이다.
“사내가 됐구나.”
“네? 아뇨, 아직 멀었습니다.”
자신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내였다는 답은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강진이 말하는 사내라는 말이 생물학적인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지금 강진이 말하는 사내라는 단어는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 아닌, 그렇게 만들어지는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고. 운호가 알고 있는 그 ‘사내’라는 단어에 부합하는 사람들을 떠올려본다면······.
-그래, 오래간만에 맞는 말을 하는구나. 사내라니 아직 한참 멀었지. 이제 겨우 코밑이 거뭇해지기 시작한 주제에 사내는 무슨 사내냐. 그리고 진정한 사내라면 응당 계집을 알아야······.
‘어르신!!’
-알았다. 알았어. 부끄럽다고 계집애처럼 빼액 소리 지르는 꼴이 사내가 확실히 멀긴 멀은 것 같구나. 그나저나 저 계집애도 참 예쁘게 자랐구나. 여기까지 이렇게 찾아온 걸 보면 너에 대한 마음도 여간한 건 아닌 것같고. 휘현 고 계집애는 대장군가에 발목이 잡힐 것 같아서 싫은 거라면 이 아이도 괜찮겠지. 홍매당이라면 화산에서도 손에 꼽히는 세력이니 지금 네 명성에 홍매당까지 등에 업는다면 차차기 장문인은 따놓은 당상 아니더냐. 개인적으로는 대장군부 쪽이 더 좋긴 하다만, 뭐 화산파도 나쁠 건 없겠지.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인간이 우화등선이라니······. 이 인간이 우화등선을 한 것은 하늘의 실수, 혹은 등선에 인간 개개인의 성품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강진이 뭔가 더 말을 하려는 찰나
“장군.”
장대한 체구의 장년인이 병사들 몇을 거느리고 걸어왔다.
강진 자신의 또래 정도?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잔당 처리는?”
“끝냈습니다. 정말 잔챙이들이더군요. 젠장. 세금이 대체 몇 푼이나 한다고. 당장 굶어 죽는 것도 아닌데 화전민이라니. 신고하고 제대로 세금만 냈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사내가 그 체구에 걸맞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찌를 듯한 기세에서 은은한 분노가 느껴졌다. 자신의 기도를 숨길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는다.
절정.
그래, 절정이다. 강진이 흠칫 놀랐다. 물론 단순히 절정의 고수가 생소하기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무림의 모든 문파 가운데 가장 많은 절정 고수를 보유한 것은 화산파다. 화산파를 대표하는 무공인 자하기공은 최소한의 재능과 시간. 그리고 적절한 지원이 합쳐진다면 매우 높은 확률로 절정에 다다르는 신공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하기공이 아니더라도 다른 상승의 무공 역시 완성도가 매우 높다. 당장 옥녀진결을 익힌 강진의 아내 능라나찰 소여향만 하더라도 절정의 고수다.
하지만 그만한 고수가 운호에게 장군이라 부르며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충분히 놀랄만한 일이었다. 느껴지는 기도로만 따진다면 화산의 현자 배. 그 가운데서도 상위권의 고수다.
“몇 년 정도 아무 일도 없었으니 그 돈이 아까웠겠지. 쯧, 그것이 모두 우리의 목숨값이거늘. 아무튼, 그렇다고 해도 같은 중원인들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잘 수습해서 살길을 마련해주도록 해라.”
“네, 장군.”
“아, 그리고 이쪽은 내 사숙님, 강호에서는 화산금정 강진이라고 불리는 분이다. 사숙, 이쪽은 제 휘하 수색 3대에서 오백인장을 맡고 있는 장당이라고 합니다.”
장당이 먼저 강진에게 인사했다.
“청해대장군부 오백인장 장당이라고 합니다. 화산금정이라는 이름은 무림에 문외한 저도 종종 들어본 이름입니다. 강호제일의 연단사라고요.”
“그저 허명입니다. 수고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수고라니, 아닙니다. 지금은 장군께서 내린 명이 있어서······.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추후에 대장군부에서 뵙고 이야기를 좀 나눠보고 싶군요. 사실 제가 약에 관련해서 좀 긴밀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은 것이 있는지라······.”
“아, 얼마든지요.”
장당이 운호에게 한번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났다.
“사숙, 잠시 아현이가 깨어날 동안은 잠시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시죠.”
“그래, 그러자꾸나. 헌데 내가 군부에는 조금 어두워서 그런데, 청해대장군의 편제는 혹시 북병과는 조금 다른 것이냐? 내가 알기로는 절정쯤 되면 적어도 천인장의 직책을 받는다고 들었는데······.”
“아니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북병도 저희와 비슷할 겁니다. 이건 그냥 저희 부대의 특수성 때문입니다.”
“특수성?”
“네, 수색이라는 것이 워낙에 위험한 임무이다보니 최악의 경우 초절정의 고수를 만나는 것까지 상정하고 움직여야 하거든요. 그래서 천인대 하나에 절정 고수 둘씩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지만요.”
“허면 너의 천인대에 부관이 저 장당이라는 분이신게냐?”
운호가 멋쩍게 웃었다.
지금까지 강진에게 정말 많은 서편을 보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재 몸 상태에 대한 보고서들이었다. 그의 직책에 관하여 딱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으니 조금 전 모습만 보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하겠다 싶었다.
“그게, 제가 최근에 일이 있어 수색대 전체를 총괄하는 수색단장 자리를 맡게 됐습니다.”
“자······, 잠깐만. 그러면 네 밑으로 저만한 고수들이 더 있다는 소리냐?”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강진이 정말로 크게 놀랐다.
수색 3대라고 하였으니, 적어도 부대가 3개는 된다는 소리고, 그 말은 밑으로 여섯의 절정 고수와 삼천의 병력이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그 장당이라는 자의 뒤에 서 있던 병사들 하나하나가 일류였다. 여섯의 절정과 삼천의 일류. 거기에 운호 자신까지. 이만하면 화산까지는 무리더라도 구파의 말석인 종남 정도는 충분히 자웅을 겨뤄볼 만한 숫자다.
물론 이는 운호의 부대가 완편 상태가 아님을 모르는 강진의 오해였지만 어쨌거나 현재 운호의 위치가 강진이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때, 조용히 누워있던 아현에게서 약한 신음성이 들려왔다.
“아현아!!”
강진이 빠르게 아현에게 달려갔다.
“아빠?”
“그래, 나다. 정신은 좀 드느냐?”
“어떻게 된 건가요? 분명 마지막에 제가 검을 휘두르긴 했는데······.”
“걱정할 것 없다. 다 잘 해결됐다. 운호가 마중을 나왔더구나.”
“운호가요?”
아현이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안녕, 오래간만이네.”
“백운호?”
이마에 화려한 영웅건을 질끈 둘러매고 단단해 보이는 가죽 갑옷을 걸친 운호의 모습은 매우 생소했다. 하지만 그 생소함이 이상한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생소함은 아현의 심장을 매우 크게 들썩이게 만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발갛게 달아올랐다.
“응? 어디 혹시 안 좋아? 최대한 약 기운을 잘 전달한다고 했는데 사실 제대로 해본 적은 없던 일이라······.”
“야······, 약기운?”
“어, 너 정신 잃었을 때 어떻게 약을 먹일 방법이 마땅치 않아서.”
“뭐뭐뭐······뭐 뭐야. 너 너 설마?”
아현은 지금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사람이 아버지라는 사실조차 순간 잊어버릴 만큼 크게 놀랐다. 강호에 기절한 사람에게 약을 먹이는 방법이라면 전통적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것 아니던가. 아니, 하지만 아무리 의료행위라고 해도 과년한 남녀가 입맞춤이라니.
물론 운호에게 마음이 많이 가기는 했지만, 그리고 오래간만에 본 녀석이 더 잘생겨져있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직 아무런 교감도 없었는데 대뜸 그것부터는······.
“아쉽지만 그런 건 아니야.”
“아······, 아쉽다고?”
그런 게 아니라는 말보다 아쉽다는 말이 먼저 들어왔다.
설마, 운호도?
“응, 기에 대한 이해는 높아졌지만, 아직 경지를 뛰어넘을 만큼은 아니더라. 대장군님 말씀이 기의 총량 자체가 너무 심각하게 부족한 거라서 어지간한 걸로는 힘들고, 이전의 경험과 비슷한 뭔가 충격적인 걸로 확 뛰어넘는 거 아니면 어렵겠다고 하시더라고. 그래도 기에 대한 이해가 올라가면서 통제 자체가 수월해져서 그런지······.”
운호가 무공에 관하여 한참을 떠들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원래 이런 놈이었다. 헤어지던 순간에도 함께 해주겠다는 이야기에 무공수련을 위해서는 화산이 더 좋지 않겠냐는 소리를 늘어놓던 놈이다.
“아, 내 정신 좀 봐. 사숙. 아현이도 깨어났으니 일단 대장군부로 가시죠. 조금 어수선한 상황이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그곳이 가장 편할겁니다.”
“그래, 그러자꾸나.”
강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현을 등에 업었다.
***
“백 장군은? 돌아왔데?”
“네, 아가씨. 헌데······.”
“헌데 뭐?”
“그게, 장군께서 웬 여자와 함께 돌아오셨다고······.”
“뭐? 여자?”
또렷한 이목구비,
꽃보다 아름다운 여인의 아미가 크게 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