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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역대급 천재-169화 (169/288)
  • 169화

    누구의 잘못인가(17)

    강진은 영리한 사내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책상 위에서 안전하게 머리를 굴릴 때의 이야기다. 피와 살이 튀는 전장. 자신의 손바닥으로 타인의 숨통을 끊어내는 상황이 그의 뇌를 마비시켰다. 그리고 거기에 바로 눈앞에 보이는 딸의 위급함이 그것을 한층 더 가중시켰다.

    화산금정 강진이 아현의 앞을 막아섰다.

    그 모습에 아현이 아쉬움을 삼켰다. 여기서는 차라리 허장성세가 나았을 것이다. 분명 자신의 무력은 저들에게도 강력한 위협이었으니. 하지만 강진의 이 한수로 아현의 몸이 정상이 아님이 적들에게 알려진 셈이다.

    외날 도끼를 쥔 거한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 웃음에 강진이 상황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신중한 자세로 한 팔을 들어 올렸다. 비록 무공에 전념하지는 않았지만, 내공의 수련만큼은 쉬지 않았다. 제법 오래 싸웠음에도 전신의 충만한 진기가 피로를 날려주었다.

    장족의 무사 열댓 명을 이끌고 도끼를 쥔 거한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거한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일류. 이길 수 있을까? 같은 일류라고 해도 상대는 수많은 실전을 경험한 작자이고, 강진은 고요한 산중에서 초식 수련은 게을리한 일류다. 심지어 그의 뒤편에는 열댓 명의 부하들까지 함께하고 있다,

    가능할까?

    의문은 갖지 않았다. 무조건 막아내야 했다. 지금 그의 등 뒤에 있는 것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의 소중한 딸이다.

    일격.

    도끼를 든 거한이 기습적으로 바닥의 돌들을 차올렸다.

    “허튼 수작이다!!”

    강진의 오른손이 그 공격을 받아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거한의 노림수다. 비어있는 몸통을 향해 외날 도끼가 쇄도했다.

    자운장.

    사실상 화산을 대표하는 이 장법은 다른 문파를 대표하는 절학들처럼 심오한 이치나 오묘한 맛은 확실히 부족했다. 하지만 자운장이 현재 화산을 대표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람이 10의 진기를 가지고 있다고, 무작정 그 10의 진기를 다 뿜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힘이 넘친다고 해도 한번에 사용할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운장은 단순하지만 매우 효과적으로 힘을 뿜어내는 기술이다.

    운호의 검술이 귀찮지만 적은 힘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려 한다면, 자운장은 그 귀찮음을 최대한 생략하고 정직하게 가진 힘만큼 효율을 뽑아내는데 초점을 맞춘다. 그런 의미에서 자운장은 내공이 충만한 강진과도 제법 어울린다.

    -콰앙!!

    거한이 전력으로 휘두른 외날 도끼가 가볍게 휘두른 강진의 왼손등에 튕겨 나갔다. 거한의 얼굴에 놀람이 깃든다. 하지만 그뿐이다. 거한의 도끼를 튕겨낸 강진의 후속공격이 따라오지 못했다. 그의 뒤를 따르던 부하들의 공격 때문이다.

    -우드득

    부하 하나의 팔이 박살 났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거한은 확신했다. 조금 전에도 느꼈지만 역시 이 작자, 싸울 줄 모른다. 여기서는 차라리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자신을 쳤어야 했다. 지금 자신이 이끄는 무리는 이미 한번 도주했던 오합지졸이다. 즉, 이 자리에서 강진이 도끼를 든 거한만 어떻게든 처리했더라면 이자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져 도망갈 것이다.

    그의 시선이 강진 등 뒤편의 아현을 훑었다.

    운이 좋다.

    인근에서 보기 힘든, 아니 그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수준의 미인이다. 이런 화전민촌의 아낙들이나 보다가 저런 절세미인을 보니 눈이 번쩍 뜨인다.

    치밀하지는 못한, 하지만 그래도 어중이 떠중이 무림인 정도는 상대하기 충분한 부하들의 협공 사이로 거한의 도끼가 번쩍였다.

    “어딜 감히!!”

    강진이 손바닥을 들어 그 도끼질을 막아냈다. 그 역시 싸움에 익숙하지 않다고 해도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위협적인 게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 적들을 상대하는 와중에도 거한의 움직임을 신경 쓰는 것을 잊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문제였다. 거한의 도끼를 막아내기 위해 큰 동작을 취하는 사이, 적들의 창이 강진의 옆구리를 스쳤다. 질 좋은 비단으로 겹겹이 두른 옷이 부욱 찢어지고 그 사이로 얕은 상처가 하나 생겨났다.

    아현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싸움이 이어졌다.

    강진의 몸에 하나둘씩 자상이 늘어갔다. 그러는 사이 확실하게 전투불능으로 만든 적들도 다수였지만 오히려 아까 도망간 적들 가운데 여기로 다시 합류한 작자들이 생겨나 적의 숫자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로 마침내 거한의 도끼질이 또 한차례 번뜩였다.

    막아야 했다.

    몸속을 흐르는 진기는 여전히 충만했다. 당연하다 그동안 먹은 약이 얼마고, 내가기공에 들인 공이 얼마인가. 하지만 피륙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핏물들이, 격한 움직임으로 피로감을 호소하는 근육들이 말을 들어 먹지 않는다.

    -푸욱

    잘 정련된 강철과 살점이 만나는 순간의 소음이 강진의 귀를 찔렀다.

    하지만 통증은 없었다.

    강아현이었다.

    마치 죽은 것처럼 누워있던 그의 딸이 한순간 최적의 기회에 몸을 떨치고 일어나 검을 휘둘렀다. 그야말로 번개와 같은 일격. 심지어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강진의 인지조차 벗어난 공격이었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아현의 검이 꿰뚫은 것은 거한의 옆에 있던 다른 무사의 몸. 그리고 그 뒤편에 숨었던 거한은 피륙에 상처를 입는 데 그쳤다.

    “흐흐흐, 역시. 계집 쪽이 조금 더 제대로 싸울 줄 아는구나.”

    강진이 거한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던 것처럼 그 역시 미동조차 하지 않는 강아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현아!!”

    회심의 일격이 빗나가서일까?

    강아현이 다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입가에서 주르륵 선혈이 흐른다.

    “뭐하냐. 얼른 정리하고 짐 챙겨서 떠야지. 이러다가 대장군부쪽 애들 오면 우리 아주 좆되는 거다.”

    “네!!”

    그렇게 거한의 명령에 병력들이 제법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려는 찰나.

    -잘 아네.-

    “응? 누구냐!!”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기는. 방금 네 입으로 말했잖아. 아주 좆되는 거라고.-

    거한이 황급히 도끼를 휘둘렀다.

    -챙!!

    고작 일격.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움직이던 기형검에 덩치 큰 거한이 크게 밀려났다. 비검술? 아니, 아니다. 검의 움직임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치 추수철 벼를 베는 낫처럼. 기형검이 사람의 목을 뎅겅뎅겅 수확했다.

    “빌어먹을!! 검마!! 검마다!!”

    “거······, 검마? 검마가 대체 여길 왜!!”

    지금까지 싸울 때는 전력을 다하지 않기라도 했던 것일까?

    십수 명의 장족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여러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누군가를 제압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산중의 범을 만난 사슴 떼처럼, 흉폭한 이리를 만난 양 떼들과 같은 필사적인 탈주였다.

    그리고 그중 몇몇은 스스로 움직이는 검에 유명을 달리했지만, 한 자루의 검이 십수 명을 모두 제압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던 만큼 검날을 피해 무사히 도망가는 자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는 외날의 도끼를 든 거한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쾅!!!

    “너는 안되지.”

    저 먼 곳.

    한 번의 도약으로 십수 장씩을 건너뛰어 그가 나타났다. 허공을 스스로 유영하던 검이 스르륵 그의 손아귀로 날아온다.

    “거······검마······.”

    터무니없이 젊은 얼굴.

    방금 보여줬던 그 무공이 정녕 이 젊은, 아니 젊다 못해 어린 청년이 보여준 무공이라는 것을 도저히 믿기 힘들다. 그래, 그렇기에 사마외도(邪魔外道)다.

    그들의 큰 스승 중 하나인 텐진을 잔혹하게 살해한, 검을 부리는 마귀.

    검마가 무심하게 검을 휘둘렀다.

    거리는 약 삼 장.

    검의 길이가 다섯 자 남짓임을 고려한다면 터무니없다. 하지만 감히 경시하지 않았다. 그가 외날도끼를 힘차게 휘둘렀다.

    -쨍그랑

    마치 유리구슬을 바위에 부딪힌 것처럼.

    어느새 석 장 밖에 있던 검마의 검날이 그의 도끼를 박살냈다. 귀신과 같은 움직임. 거한은 그가 접근하는 것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푸욱 부서진 도끼날이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잘 무두질된 가죽갑옷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마치 종이짝을 찢고 들어오는 가위날처럼 그의 가슴을 파헤쳤다. 유명을 남길 틈도 없는 비명횡사.

    가볍게 검을 털어 정답에 묻어있던 핏방울을 날려 보낸 운호의 시선이, 아니 그의 감각이 도망간 장족들을 살폈다.

    굳이 쫓아갈 필요는 없었다. 그는 이제 홀로 움직이기에 너무 귀한 몸이었고, 이런 귀찮은 일을 대신 해줄 부하는 충분했다.

    운호가 성큼성큼 걸어 강진에게 향했다.

    그는 자신들을 구원하러 온 사내가 운호임을 확인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주변에 신경을 끊고 아현의 내상을 살피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사숙, 아현이는 제가 돌보겠습니다. 우선 사숙 몸부터 챙기시죠.”

    강진은 답하지 않았다.

    멍청했다.

    딸과 함께 하는 여행.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남의 일에 끼어들었단 말인가. 대체 자신이 언제부터 그렇게 정의감이 넘쳤다고. 어린아이들의 시체를 좀 보는 게 뭐 어떻단 말인가. 멍청한 놈 같으니. 이 모든 것이 그저 상대의 무공이 별 볼 일 없다는 생각에 호기롭게 나선 탓이다.

    강진이 손을 덜덜덜 떨어가며 자신의 내력을 아낌없이 아현에게 불어 넣었다.

    운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강진이 숨을 들이켜 다시 내력을 밀어넣으려는 바로 그 순간에 그의 팔을 탁 잡아챘다. 그야말로 상대의 맥을 끊는 절묘한 수법이었다. 그보다 조금만 더 빨랐거나 늦었어도 강진은 적잖은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사숙, 사숙보다는 제가 훨씬 낫습니다. 혹시라도 좋은 약 있으시면 하나 주시고, 사숙 몸부터 챙기시죠.”

    “우······, 운호야.”

    강진이 조금 전 아현에게 먹였던 약을 하나 더 꺼내 운호에게 내밀었다.

    “흑삼정이로군요. 과연 숙부님이십니다. 이렇게 질 좋은 놈은 처음입니다.”

    운호가 아현을 살폈다.

    사별삼일이면 괄목상대라고 했던가? 정말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지경이었다. 아, 물론 이 경우는 무공 말고 미모 쪽 이야기다.

    -흐음, 이 정도면 휘현 고 계집애와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는······.

    몸속을 휘몰아치는 기운의 양이 막대했다.

    하지만 그 막대한 기운만큼이나 그 기운을 버텨내는 기맥 역시 단단하고 굳건하다. 당장은 수습이 힘들더라도 충분한 시간만 준다면 별다른 피해 없이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운호의 장심이 그녀의 명문으로 향했다.

    아무리 스스로 털고 일어날 수 있다고 해도, 누워있는 기간을 일주일에서 사흘로 줄여줄 수 있다면 그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날뛰는 기운을 진정시키고 운호가 강진에게 받은 흑삼정을 꺼냈다. 이걸 어찌해야 할까? 흑삼정이 입에 넣기만 해도 스르륵 물처럼 녹아내리는 전설의 영단도 아니고 정신을 잃은 아현이에게 먹일 수 있는 방법 자체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그래, 어쩔 수 없구나. 역시 이럴 때는 전통적인 방법대로······.

    흑삼정을 자신의 입에 가져가는 운호를 바라보며 파검이 엄한 장면을 기대했다. 물론 운호는 그 기대에 부응할 생각 따윈 조금도 없었다.

    스스로 흑삼정을 씹어 삼키고, 그 약력을 뽑아내어 오른손으로 몰아넣었다. 극에 다다른 내기의 운용능력이다. 운호의 장심을 타고 흘러나온 흑삼정의 약기운이 상처 입은 아현의 기맥을 달랬다.

    -쯧, 하여간 쓸데없이 이상한 기술만 늘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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