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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잘못인가(15)
지금 대장군 영보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군왕(君王)의 자리에 앉고 싶노라고.
‘사실상 왕부나 다름없는’이 아닌 서평왕부(西平王府)를 열어젖힌 시조 자리가 탐이 나노라고.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운호 너를 선택했다고 말이다.
초절정 고수는 초인이다.
물론 절정만 되더라도 무공을 모르는 잘 훈련된 병졸 백 인은 너끈히 상대할만한 괴물이다. 하지만 이 시대. 정예병들은 대부분 최소한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 하지만 초절정 고수는 그런 정예병들조차도 군단 단위로 달라 붙어야 억제할 수 있는 격이 다른 존재다.
만 명의 정예병을 키워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것을 키우기 위해서는 그만한 자원이 필요하고, 유지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초절정 고수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영보는 그러한 고수를 키워내기 위해 평생 동안 정말 많은 기재들을 만나 아낌없이 투자를 해왔다.
그것은 흡사 집채만한 바위에서 한 줌의 금을 찾아내는 작업과 같다. 심지어 그 바위에 금이 들어 있는지 아닌지, 혹은 얼마나 들어 있는지도 사전에는 알 수 없다. 영보는 평생 동안 그런 작업을 해왔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운호는 이미 표면에 찬란히 빛을 발하기 시작한 조금만 연마하면 거대한 금덩이가 될만한 원석이다.
물론, 이미 여기저기 잔뜩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자들이 많다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그 원석이 현재 위치한 곳은 자신의 손바닥 위였고, 그는 자신이 손에 쥔 금덩이를 절대 남에게 뺏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버지는?”
“대장군께서는 지금 그 아이를 만나고 계십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영무결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그는 이번 일을 위하여 그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감내했다. 특히 치명적이었던 것은 포달랍궁 내부의 비선 조직이 8할 가까이 궤멸 됐다는 점이었다.
무려 20년 가깝게 공을 들여온 조직이다. 아무리 초절정 고수라고 해도 단증 하나를 제거한 것조차 그리 수지맞는 장사는 아니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셨습니다.”
“그래, 그렇지.”
최근 포달랍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동창 쪽은 최선을 다 해봤습니다만······. 그나마 지난번 사태에서 신세를 졌으니 은검귀조 박진문과 파견부대를 귀환시키지는 않겠노라고······.”
“고생했다.”
제국의 역량을 굳이 숫자로 따지자면 황실이 이할 오푼. 북병이 일할 오푼. 청해대장군부와 남로군이 각각 일할. 그리고 구대문파와 칠대세가를 포함한 전 무림이 사할 가량 된다고 볼 수 있었다.
현재 청해대장군부와 청해성의 곤륜파. 그리고 감숙성의 공동파를 비롯한 무림 문파의 힘을 더한다면 포달랍궁보다 조금 우세하다. 만약 제국이 약간만 전력을 보태준다면 충분히 서장을 토벌하고 포달랍궁을 뿌리 뽑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굳이 청해대장군부를 서평왕부로 만들어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비옥한 중원을 차지하고 있는 황실의 역량과 싸움을 반복하는 청해대장군부의 역량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질 것이고 결국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완벽한 중앙집권화도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이 포달랍궁을 치기에 최적의 순간인가를 묻는다면, 사실 그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꼭 필요했다. 포달랍궁의 예기를 꺾어버리는 것. 그리하여 그들을 망설이게 하는 것. 그리고 동시에 추가적인 이득을 더 가져오는 것까지.
“참으로 아쉽더군. 그렇게까지 했는데 여전히 경지에 들지 못하다니.”
“그 아이에게 거는 기대가 참으로 크신 것 같습니다.”
“글쎄······. 이걸 기대라고 해야 할까? 그건 너무 막연한 단어인 것 같고. 그러니까 이건 예측이라고 해야겠지.”
“예측이요?”
“그래, 예측. 대체 하늘이 무슨 변덕을 부린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지독한 의지가 하늘을 속인 것인지. 뭐가 됐건 남들이 일 년을 살아갈 때 홀로 십 년의 세월을 살고 있으니 말이야.”
동창은 분명 개입할 것이다.
서로의 전력이 박빙이 되도록. 그리하여 서로의 세력을 갉아먹고 상잔하도록.
그리고 거기에 바로 길이 존재했다.
저 영원히 도전하는 비겁한 영생자를 박멸할 길이.
***
“사형, 실로 지독한 자들입니다. 사로잡힌 자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고 의심 가던 자들은 모조리 독단을 깨물고 자결했습니다. 심지어 개중에는 조금도 의심할수 없던 자들마저 포함되어 있었으니······.”
“옴마니 반메홈.”
“하지만 동시에 그런 자들까지 자결했다는 것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자들은 남아있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 의심암귀야 말로 적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점이겠지.”
“빌어먹을 변절자 놈들 같으니······.”
지난 백 년. 서장과 청해성의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정말 많은 장족이 비옥한 제국으로 귀순했다. 민족을 배신한 비열한 변절자들이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단순한 변절을 넘어 제국의 개가 되어 민족의 가장 연약한 살에 칼을 꽂기 위해 숨어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그토록 오랜 기간 공들여왔던 세력을 통째로 날려버리면서까지 텐진을 제거했다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위기에 몰렸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하긴······, 이제 슬슬 활불께서 출관하실 시간이 되었으니까요.”
전대 활불 시절은 포달랍궁의 최전성기였다. 당시 활불은 그야말로 역대 최강. 중원은 중원의 황실의 세력 대부분과 청해성의 전력까지 모조리 동원하여 포달랍궁을 상대했었다.
“참으로 어렵구나.”
“아닙니다. 충분히 이겨내실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아니다.”
“스승님!!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릅니다.”
“포기라니.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 그저 판단했을 뿐이다. 잊었느냐? 저들에게 주어진 것은 이 순간뿐이지만, 나는 영원을 살아간다. 지금이 안된다면 미래로 미루면 그뿐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여기서 저들의 미래를 모조리 가져가겠다. 그러니 너희가 해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미래를 보존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활불은 오십에 가까운 절정 고수를 홀로 척살했고, 당시 대장군이던 영균의 한쪽 팔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 희생을 바탕으로 포달랍궁은 커다란 피해 없이 무사히 물러설 수 있었다.
다만 당시 활불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그의 이번 생이 이토록 부족한 재능에 강림하리라는 것이었다.
“텐진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아라한의 숫자는 우리 쪽이 여전히 우세하다.”
포달랍궁의 대장로 니마 주걸(尼瑪 珠杰)이 의지를 다졌다.
이번이 아니면 기회는 없었다.
58년 전. 활불은 자신의 목숨을 불살라 포달랍궁의 미래를 기약했었다. 그리고 그 미래들이 전성기에 다다른 것이 바로 지금이다.
그래, 바로 지금!!
지금이 지나면 포달랍궁의 전력은 점점 더 감소할 것이다. 이미 대장로 니마 주걸의 노화는 진작에 시작됐고, 그 사제인 이장로 쩌시 지앙쵸(扎西 降措) 역시 이제 하루하루 그 실력이 감퇴하고 있다.
물론 적들의 수괴인 영보 역시 늙어가는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연령대에 분포한 고수의 숫자를 따져볼 때, 시간의 흐름에 손해를 보는 쪽이 포달랍궁이라는 것은 명확하다.
‘어쩌면 그때의 스승님처럼 우리 역시 지금을 미래로 미룰 시기일지도······.’
***
늦은 밤.
눈을 감았던 운호가 다시 눈을 뜬 곳은 자신의 침상이 아니었다.
황량한 광야.
익숙한 풍경이었다. 증무진인 목운평이 자신의 백을 태워 최후의 일검을 선물하고, 파검 좌부원이 몽원경이 아닌 정답 속으로 들어간 이후 매일같이 보던 풍경이기 때문이다.
운호가 검을 뽑았다.
검의 형상이 흐릿하다. 확실한 것은 손에 쥔 검이 정답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들었던 모든 검들을 조금씩 닮아 있었다. 가장 오래 사용했던 화산의 보급검. 가장 인상적이었던 남궁철의 명검. 그리고 지금 쥐고 휘두르는 정답까지.
운호가 머릿속에 얼마 전 포달랍궁의 삼장로 단증과의 싸움에서 휘둘렀던 검격을 떠올렸다. 참으로 또렷하다. 지금 당장에도 그 형상을 그대로 따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뽑아든 검을 그 머릿속의 기억대로 휘둘렀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실로 완벽하여 당시의 그것 그대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식불간의 깨달음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그 완벽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틀렸어.”
꽃은 피어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운호가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그 과정은 머릿속으로 기억을 떠올리는 것과는 달랐다. 운호는 그 다름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다르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선과 선.
그 선들이 모여 어느새 한 송이 꽃이 피어났다.
아니, 이것이 과연 꽃일까? 어쩌면 그것은 꽃이 아닌 험악한 돌산 같기도 했다. 마치 화산(花山)이라 이름 붙었지만, 꽃나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화산처럼.
그렇게 마음속에 피어난 꽃은 흐릿했다. 그 희미한 선들 만큼이나.
운호가 다시 눈을 떴다.
여전히 그가 서 있는 곳은 황량한 광야였다.
그의 시선이 저 뒤편으로 향했다.
파검 좌부원이 정답으로 들어간 이후, 운호가 서 있는 곳은 그저 메마른 바람이 몰아치는 황량한 광야였다. 그저 끝없는 지평선과 지평선만이 이어지는 곳.
운호는 그곳에서 묵묵하게 검을 휘둘러왔다.
하지만 요 며칠. 정확히는 단증과의 싸움이 끝난 이후.
운호의 시선이 머무는 저 뒤편에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생겨났다. 운호는 그 무언가를 향해 아주 오랜 시간 걷고 또 걸어보았지만 닿을 수 없었다.
꽃일까? 아니, 어쩌면 돌산일지도.
저 먼 곳에 생겨난 희미한 저것이 지금 운호의 마음이 그리는 그 한 송이 꽃, 혹은 깎아지른 돌산을 닮아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운호는 검을 휘둘렀다.
‘빌어먹을 공과격!!’을 외치며 운호와 검을 섞어주던 증무진인은 없었다.
‘그딴 거 내가 알 게 뭐냐!!’를 외치며 현실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파검도 없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운호 자신.
그리고 손에 쥔 검뿐이었다.
***
화산 옥녀봉.
화산금정 강진의 잘생긴 얼굴에는 최근 매우 진한 눈 그늘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최근 화산에는 정말 대단한 수준의 기부금이 이어지고 있었고, 그것은 과거 종남의 벽운이 화산에 올라 현무를 꺾기 전보다 오히려 더 많은 금액이었다.
덕분에 홍매당에는 매우 많은 금액이 내려왔고, 수석 연단사인 강진의 업무량이 폭주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강진의 얼굴에 눈 그늘이 하루하루 진해져 가는 것은 단순히 홍매당의 업무량이 폭주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실로 놀라운 재능과 능력의 소유자였고, 평소 그에게 주어진 홍매당의 업무는 그 능력에 비하자면 매우 약소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피곤하게 만들었을까?
“이건······, 이건 지금 당장 알려야 해. 그러니까 다음번에 청해성에 벽곡단을 보내는 날이······. 젠장. 아직 삼 주나 남았군. 그렇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