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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역대급 천재-164화 (164/288)
  • 164화

    누구의 잘못인가(12)

    뚱뚱한 라마의 입이 벌어지는 바로 그 순간.

    운호는 무언가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보통 저런 식으로 기운을 긁어모아 사용하는 류의 무공은 일종의 강보와 같다. 흐르는 강물을 강제로 틀어막고 물을 쌓아 올려 일순간에 그것을 터트린다. 하지만 물이 제대로 쌓이지 않았다면? 강보를 쌓고 그것을 터트리는 것 자체가 손해일 뿐이다. 결과물은 그저 졸졸졸 흐르는 시내에 불과할 테니까.

    따라서 이런 류의 무공은 그 완성된 결과물이 어마어마한 대신, 그 과정을 방해할 경우 아무것도 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본인이 큰 피해를 입는 경우까지도 생긴다.

    운호와 파검이 지금, 이 순간이 기회라고 판단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과연 초절정 고수라는 것일까?

    보에 쌓인 물이 적다면 그 구멍의 크기를 조절하고, 한순간 밀어내는 힘을 강화하면 그만이다. 물론 말은 쉽지만, 행동은 절대 쉽지 않다. 하지만 보통이라면 할 수 없는 그것을 저 뚱뚱한 라마. 초절정의 고수 텐진이 해냈다.

    “오-오-옴”

    어마어마한 힘의 격류가 터져나왔다.

    검극에 어린 별빛을 믿고 휘둘러봐야 할까?

    잠깐의 고민.

    -부족하다!!

    파검의 외침이 운호의 머리에 울려 퍼졌다.

    분명 완성된 검강은 천하에 가르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것은 유형이 아닌 무형의 무언가라고 해도 마찬가지고 따라서 저 텐진의 ‘사자후’역시 충분히 가를 수 있다.

    문제는 그 검강을 휘두르는 운호다. 일반적인 초절정 고수가 7의 힘을 공격에 쏟고 3의 여력을 방어에 남겨둔다면 운호는 10의 힘에 더하여 파검의 도움까지 모조리 공격에 쏟아부어 간신히 검강을 형성한다. 놀라운 기예로 상대의 공격을 회피하지만 저런 광범위한 공격은 기예고 뭐고 어쩔 수 없다. 갈라낸 사자후의 여파만으로도 갈가리 찢겨 나갈 수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뻔하다.

    가를 수 없는 공격이라면 흘려보낼 수밖에.

    가능할까?

    태극혜검은 천하의 모든 것을 받아낸다고 들었다. 그래, 마치 무당산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난풍검은 어떠하며, 화산은 어떠할까?

    운호가 화산을 떠올렸다.

    신이 직접 깎아내린 것처럼 오롯하게 선 그 돌산. 그리고 그 돌산에서 수행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과 사람과 사람들.

    우습게도 그 사람들 가운데 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악연으로 얽힌 장문인이나 이준형. 혹은 그와 가장 친한 동무인 강아현이 아니었다. 또한, 마지막 자신의 목숨을 불태워 마교의 대제사장을 막아냈던 청우와 청공도 아니었으며, 꼬일대로 꼬여있는 그의 사부 공야찬도, 화산 최강의 무인인 청무진인 역시 아니었다.

    조가촌의 별 볼 일 없던 거지 시절.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그 늙은 도사. 비록 그 의관은 화산이라는 거창한 이름에 비해 추레하였으나 그 기상만큼은 화산 그 자체였다.

    땅을 딛은 두 발에 힘을 더했다.

    꼿꼿하게 서서 검을 내밀었다.

    거기에 사량발천근, 차력미기, 이화접목 하면 떠오르는 부드러운 동작 따윈 조금도 없었다.

    -좋다!!

    파검이 그것을 이해했다.

    육신은 이미 한계에 가깝다. 절정이란 그러한 경지다. 하늘이 인간에게 허락한 한계다. 그렇다면 초절정이란 무엇인가? 대체 무엇이 사람을 초월하게 하는 것인가? 그것이 무엇이기에 사람의 몸으로 사람의 한계를 벗어나는가.

    마음. 오직 마음뿐이다.

    굴불신마. 자칭 천마는 이렇게 말했다. 심기체는 하나이고, 그것은 언제나 균형을 맞추려 한다고.

    한계를 벗어난 마음과

    한계를 벗어난 기운이

    한계에 갇힌 육신을 강제로 성장시킨다.

    화산은 무당산과 같은 부드러움을 품지 못했다. 그저 꼿꼿하게 서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꼿꼿한 화산에 기대어 살아가는 저 다양한 사람들을 보라.

    운호의 검이 움직였다.

    누군가가 꽃나무 하나 찾아보기 힘든 그 황량한 돌산을 화산(花山)이라 했다.

    그 삐죽삐죽한 돌산들을 대체 무슨 이유로 화산이라 하였는가. 운호의 검술이 그 질문에 답했다.

    여전히 운호의 몸을 보호하는 기운은 없었다.

    운호를 돕는 파검의 마음은 이 빛나는 별빛을 잡아두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운호의 모든 기운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괜찮았다.

    운호의 검이 한 송이의 아름다운 꽃을 그렸다. 그것은 경계를 넘기에 충분했을까? 파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부족하다. 삼단공에 이른 포원공은 단단하게 압축됐지만, 그로 인하여 그 양이 충분하지 못한 탓이다.

    한계를 벗어난 마음과

    한계에 갇힌 육체.

    경계를 넘지 못하는 기운이 어우러진 한 송이의 불완전한 꽃.

    텐진의 사자후가 운호의 주변을 휩쓸었다.

    하지만 그것은 수십 번의 검격이 만들어낸 꽃송이를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날아드는 공격을 방패로 막아선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러했다면 이 불완전한 꽃송이는 저 압도적인 힘의 격류 앞에 산산이 깨졌으리라. 이것은 단지 만마를 굴복하는 사자의 외침을 흘려 보낸 것뿐이다.

    오-오-옴.

    영원과 같은 삼 음절의 단어 끝.

    천지를 격동하는 힘의 격류가 멈춰선 그 찰나의 순간.

    이제는 희미하게 그 빛을 잃어가는 ‘정답’이 한줄기 섬광처럼 텐진의 몸을 찔러 들어왔다. 오로지 베기를 위하여 태어난 자신의 형상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공격. 하지만 지금 상황에 가장 적절한 공격이기도 했다.

    텐진이 그 강력한 공격을 무리해서 펼친 탓이었을까? 아니면 맹렬한 힘의 격류가 그의 감각을 흐트러트린 탓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운호가 펼쳐낸 그 불완전한 한 송이 꽃이 만들어낸 공능이었을지도 모른다.

    텐진은 자신의 공격이 운호를 제거했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그 확신은 곧 방심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덕분에 텐진은 운호의 검이 자욱한 흙먼지를 뚫고 자신의 몸 근처까지 와서야 그것을 인지했다.

    늦었다.

    검극에 서린 별빛은 아직 희미하지만 완전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텐진의 판단은 빨랐다. 그가 자신의 다친 왼팔을 쭉 내밀었다. 만약 운호가 내지른 ‘정답’이 보통의 검이었다면 아마 그 왼팔을 피해 텐진의 심장을 찌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운호의 검이 텐진의 왼팔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절대적인 파괴의 힘인 검강이 초절정 고수의 육체를 사정없이 갈랐다. -퍼버벅. 순식간에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텐진의 왼팔.

    그 압도적인 고통이 텐진의 뇌리를 새하얗게 불태웠다.

    하지만 그 역시 한계를 넘어선 무인이다. 수만, 아니 어쩌면 수십만 번 수련으로 몸에 새겨넣은 초식이 자연스럽게 발현됐다.

    오른팔에 감겨있는 월륜이 소리 없이 운호의 몸을 향해 발출됐다.

    “여기까지.”

    그리고 정확히 그 순간.

    오직 텐진 자신과 저 애송이밖에 없던 공간에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대체 어째서 이런 존재를 지금까지 감지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에게서 시작된 막대한 기도가 천지간의 기운을 짓눌렀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포달랍궁을 핍박해온 최악의 적.

    청해대장군 영보.

    텐진의 오른팔에서 발출된 월륜이 -웅웅 거리며 그의 손아귀 주변을 맴돌았다. 그것도 잠시. -우드득. 강철의 월륜이 영보의 손에 닿지도 않았음에도 마치 종이조각처럼 구겨졌다.

    “그······, 그대가 어찌 이곳에!!”

    “글쎄, 내가 너무 오래 조용히 있어서 그랬는지 아무도 내가 움직이는 것을 신경 쓰지 않더군. 마치 네 놈의 존재감이 너무 미미하여 우리 쪽 사람들이 아무도 네 놈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야.”

    영보의 말에 텐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실제로 그의 무공은 다수의 적들을 쓸어버리기에는 적합했지만, 하나의 초절정 고수를 상대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다.

    텐진이 뒤로 크게 물러났다.

    동시에 그의 손에 감겨있던 월륜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발출됐다. 물론 영보를 노리는 것이 아니었다.

    월륜이 노리는 것은 마지막 일검을 내뻗고 탈진한 운호였다.

    “쯧, 하여간 졸렬하기는.”

    영보가 한 걸음 걸어 나와 손을 휘저었다.

    아무렇지 않은 손짓이었지만 그것이 만들어낸 영향은 굉장했다. 자유자재로 허공을 휘젓던 월륜들이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것처럼, 그 손짓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했던 건가? 흐음······, 뭔가 좀 달랐던 것 같은데. 뭐였지?”

    눈앞의 텐진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광오한 모습.

    텐진이 크게 호흡했다.

    “그래, 어디 한 번 마음껏 해봐라. 그래도 명색의 고수인데 가는 길에 아무것도 못해보고 가면 너무 허망하지 않겠느냐.”

    앞선 운호의 경우와는 또 달랐다.

    보통 사람이 스무 번쯤 호흡할만한 시간. 거기서 끝이 아니다. 피둥피둥 살이 올라있던 텐진의 몸이 빠르게 쪼그라들었다.

    지난 십여 년의 적공을 단박에 내던지는 한 수.

    “오-오-옴!!!”

    그렇게 삼 음절의 사자후가 영보를 덮쳤다.

    양손으로 만들어낸 공기의 흐름으로 월륜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영보는 여전히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영보가 그저 평범하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영보의 한 걸음에 대지를 타고 돌아나가는 지맥의 기운이 들끓었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내려와 허공을 떠다니는 기운이 그것에 반응했다.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청해대장군 영보를 상징하는 성명절기가 이 자리에 펼쳐졌다.

    천지를 파멸시킬 기세로 몰려오던 삼 음절의 사자후가 그 한 걸음 앞에 따스한 봄날의 미풍으로 돌변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에잉, 참으로 모자란 놈이로구나. 석년 활불의 사자후에 비하자면 이것은 그저 고양이의 울음도 되지 못하겠다. 차라리 뭔지 전혀 모르겠는 이 어린 아이의 무공이 훨씬 낫구나.”

    “이!! 이 망할 마귀ㄱ······.”

    -퍼버버버벅

    더 이상의 대화도 귀찮다는 것일까? 아무렇지 않게 휘저은 영보의 손짓을 따라 텐진 본인의 월륜들이 그의 몸에 차례로 틀어박혔다.

    처음 운호와 마주쳤을 때의 퉁퉁함은 찾아볼 수 없는, 마치 목내이처럼 바짝 마른 텐진이 풀썩 쓰러졌다. 하지만 이미 영보의 시선은 그곳에 없었다.

    어느새 탈진하여 실신한 운호에게 다가간 그가 손가락을 들어 운호의 몸 여기저기 쿡쿡 찔러댔다.

    “이런 일을 경험했는데 아직도 경지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이것 참, 이건 신기해도 너무 신기한데?”

    특별히 다친 곳은 보이지 않는다.

    “이 검 때문인가? 아니지. 아니야. 확실히 신검이라고 할만하기는 한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기껏해야 영락한 간장이나 막야 수준이나 될까. 황룡검에는 감히 비할 바가 아니란 말이지.”

    -우우웅

    “항의해봐야 소용없다.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느냐?. 그래도 영성은 팔팔한 걸 보니 공 늙은이가 손을 좀 보면 더 괜찮아질 것 같기도 하고······. 음, 이건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해줘야겠군.”

    영보의 시선이 저 먼 곳을 내다봤다.

    “뭐, 그러면 이 늙은이는 이제 슬슬 숨어야겠구나. 군의 사기를 위해서도 늙은이가 나선 것보다는 젊은 신성이 직접 처리한 것이 더 좋은 일이겠지.”

    말을 끝낸 영보의 몸이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희미하게 사라졌다.

    ***

    “뭐라고? 다시 말해보거라. 지금 대체 뭐라고 한 거냐.”

    “사······, 삼장로님께서 영멸하셨습니다. 흉수는 대장군부의 새로운 천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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