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누구의 잘못인가(6)
많은 어른들은 아이들이 순수하다고 생각한다. 그래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아이들은 순진무구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들은 착각한다. 순수, 순진무구가 선(善)할 것이라고.
아니다. 순수는 절대 선의 동의어가 아니다. 순수는 무지의 다른 말이며, 그렇기에 그것은 누구보다 잔혹하고, 누구보다 악(惡)해질 수 있다.
영현의 나이는 올해로 열네 살.
제국의 처녀가 보통 혼인을 치르는 나이는 열여덟 전후다. 또한, 무림인의 경우 그것보다 훨씬 늦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열네 살에 맞선이란 어염에서는 절대 흔한 경우가 아니었다. 하지만 또 권세가들의 경우를 생각한다면 그리 드문 일도 아니다. 그들에게 결혼이란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고, 심한 경우 이제 열 살 내외의 어린 아이들까지 혼사에 동원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운호를 처음 본 소감은 그저 감탄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뽀얀 얼굴이다. 분명 무인이라고 들었는데 대체 어떻게 피부가 저렇게 뽀얄 수 있는 것일까? 피부에 좋다는 온갖 것들을 구해다 찍어 바르는 자신보다 오히려 더 뽀얘 보인다. 혹시 분이라도 바르고 나온 건 아닐까? 괜히 눈에 힘을 줘봤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찍어 바르지 않은 맨피부 그대로다.
그녀의 모자란 오라비 놈은 사내라면 그저 두툼하고 거대한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검객이라고 했던가? 저것을 좀 보라. 길고 늘씬한 몸에 쭉 뻗은 팔다리. 완벽하게 균형 잡힌 저 몸을 보면 아마 그 모질이도 생각이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어린 시절 그녀의 오라비는 종종 그녀를 향해 실로 저열한 형태의 표현을 사용해왔다. 그 대부분은 주로 그녀의 얼굴에 치중된 표현들이었는데 어느 날엔가는 어머니께 그것을 들키고 종아리가 터질 때까지 회초리를 맞았더랬다.
물론 그 종아리를 터트린 회초리가 그 망할 오라비의 성질머리를 고쳐놓았다면 참 좋았을 것을 아쉽게도 그 회초리가 해낸 것은 오라비의 놀림이 더 음습한 형태로 바꿔놓는 것뿐이었다.
사실, 오라비의 놀림 정도는 뭐, 괜찮았다.
그녀의 오라비는 어린 그녀가 보기에도 참으로 한심했다. 부친의 외모를 쏙 빼닮았지만, 그래도 부친이 조부의 능력을 십분지 일 정도는 물려받은 것에 비해, 그의 오라비는 할머니의 훤칠한 외모와 함께 그 품성과 재능까지 쏙 빼닮았으니까. 그에게 들이닥치는 수많은 압박감을 이런 저열한 방식으로 해소하겠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조금 더 어른스러운 그녀가 참아야지.
다만 참기 어려운 것은 그런 공공연한 놀림이 아닌, 그녀의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의 태도였다. 앞에서 입으로는 사탕발림하면서도 뒤에서는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는 인간들.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가족과 친척들. 무엇보다 외모가 전부가 아니라 이야기하면서도 사실은 그것이 실로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까지.
그렇기에 그녀에게 저 무표정함은 차라리 나았다.
“화산파 삼대 제자. 청해대장군부 수색 3대 천인장 백운호입니다.”
“영가 현이라고 합니다.”
파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색은 3년을 가지만 박색은 평생을 간다고 했다. 지금까지 운호의 곁에 잠시라도 머물렀던 여인들 가운데 가장 못생긴 여인은 종남의 그 어린 검후였다. 하지만 그녀조차도 평범보다는 나은 외모였다.
하지만 이 여아는 글렀다. 얼굴은 새까맣고 눈의 쌍꺼풀은 너무 진했으며 입술은 너무 두툼하다. 그나마 봐줄만한 것은 생기 넘치는 눈 정도다. 물론 그것도 생기 때문은 아니고 그나마 눈동자의 흑백대비가 분명해서다.
“영현 소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설마 제가 마음에 안 드신다는 말씀이신가요?”
운호가 잠시 말을 멈췄다.
어떻게 해야할까. 물론 여기서 그냥 긍정을 한다면 쉽다. 하지만 지금 운호가 여인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단순히 여인의 호불호가 아니다. 그에게 지금 여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면 이 자리는 파할 수 있겠지만 앞으로 이런 자리가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분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그게 아닙니다.”
“굳이 변명하실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세요. 야심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밤에 품고 자기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좋겠지요. 하지만 혼인은 밤에 품고 잘 여인과 하는 것이 아니에요. 무릇 사내가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집안에서 잡음이 나오지 않아야 하는 법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허, 이것 참 맹랑한 계집이로구나.
“저는 시서화는 물론이거니와 어머님께 큰 집안을 이끄는 법을 완벽하게 배웠습니다. 그저 곁에 두고 즐거운 여인이 아닌 그대의 삶을 든든하게 바쳐줄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저 한 고조의 여후처럼요.”“여후라니······. 그건 너무 거창한 것 같군요.”
“글쎄요······. 물론 황제까지는 아니어도 대장군부. 아니, 그대라는 사람이 소문의 절반이라도 된다면 어쩌면 서평왕가의 시조가 될 분인데 그리 거창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군요.”
물론 운호 역시 자신에 대하여 떠도는 이야기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워낙에 소문이 무섭게 번지는지라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이 여자애를 보니 아무래도 그 걱정이 현실이 된 것 같았다.
이미 저 계집애의 머릿속에서 운호 자신은 대장군가를 한입에 꿀꺽하려는 대단한 야심가인 듯 싶다.
-이거 아무래도 이 맹랑한 계집애가 단단히 착각한 것 같구나.
‘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요.’
운호가 입을 열었다.
“우선 제가 드리고 싶던 말씀은 그대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제가 아직 혼사에 생각이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혼사에 생각이 없다고요? 실례지만 이제 관례를 올릴 때까지 이년도 채 남지 않으신 것 아닙니까?”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일반적으로 무림인의 혼인은 그보다는 조금 더 늦어지는 편입니다.”
“무림인이요?”
영현이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전직 금의위 교위. 현직 대장군가의 천인장. 정식으로 장군의 직위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통상적으로 장군 소리를 듣는 위치다. 헌데 스스로를 무림인이라고? 그러고 보니 확실히 자신을 소개할 때, 가장 앞에 화산파의 삼대 제자를 내세우기는 했었다.
“이것 참······. 변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빈약하여 오히려 더 신뢰가 가는 말이네요.”
“그렇습니까?”
영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질구질, 길게 말을 끌지는 않겠습니다. 사실 남녀의 만남에서 한쪽이 싫다는데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다만 오늘 말이 거짓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만약 오늘 말이 그저 빈약하기 짝이 없는 순간을 벗어나기 위한 거짓이었다면 공자께서는 대장군 자리에 오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것을 방해할 적을 하나 얻으신 거니까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겁니다. 소저와 같은 적을 감당하기에 저는 이미 적이 충분히 많은 사람이라서요.”
* * *
처음 백가려는 크게 분노했다.
물론 그녀도 자신이, 그리고 자신의 딸이 얼마나 박색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첫 만남에서 그렇게 칼 같이 거절해버리다니. 심지어 그 만남의 명목도 맞선이 아닌 그저 교분을 나누는 자리였다. 그녀가 생각할 때 이것은 실로 터무니 없는 무례함이었다.
하지만 며칠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백가려의 분노는 봄날 눈 녹듯이 스르륵 가라앉았다. 놀랍게도 백운호는 그 스스로의 이야기처럼 정말로 혼사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화룡점정은 대장군부 최고의 미녀로 소문난 영휘현을 단번에 거절한 것이었다. 그녀는 평소 자신이 부탁하는 것을 거절하는 남자는 없다 자신하고 있었는데, 물론 그것은 대장군부의 영애라는 그녀의 신분도 신분이지만 남자의 마음을 녹여버리는 그녀의 미모 역시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쩝······, 고 마지막 계집애는 참으로 아깝던데. 어떠냐?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려먹는 것이? 장담하건대 중원 전체를 뒤져봐도 그만한 미색은 찾기 힘들 것이다. 내 칠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칠봉이니 오화니 하는 것들도 수두룩하게 봤지만, 그 계집애에 비하자면 다들 한 수씩 쳐진다.
‘뭐, 확실히 예쁘기는 하더군요. 그래봤자 혜매에 비하자면 조금 촌스러웠지만.’
-뭐? 지금 뭐라고 했느냐? 물론 남궁가의 그 꼬맹이도 뭐 안휘제일화니 뭐니 하면서 제법 소문이 나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휘현인가 하는 계집애에 비할 바는 아니지. 아무래도 네가 눈이 고장 났든지, 아니면 기억이 고장 난 것 같구나.
운호가 피식 웃었다.
고장이라······.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한창 피 끓는 청춘이다. 오래전 운호는 아현이에게도 마음이 갔었고, 몰라보게 예뻐진 종화에게도 눈이 갔었다. 하지만 남궁혜가 그렇게 비명에 간 이후. 운호는 여인에게 마음이 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고장 난 것은 눈이나 기억이 아닌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
파검이 입을 다물었다.
이제 고작 열여덟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에 대체 뭐라 답을 해야 할까. 그리고 바로 그 때였다.
‘응?’
운호의 집무실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일류와 이류의 경계. 제법 고강한 내공. 거침없는 발걸음. 기억에 있다.
“어쩐 일이십니까 영현 소저.”
이제 막 문손잡이를 향해 손을 움직이던 영현이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고수라고 하더니.
과연, 참으로 실감이 된다. 침을 한번 꼴깍 삼킨 그녀가 그대로 당당하게 문을 밀어젖혔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저희는 적이 아니겠군요.”
운호가 빙그레 웃었다.
영현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그······, 그래요. 적은 아니네요.”
-쯧쯧
파검이 혀를 찼다.
이놈 이거, 마음이 고장 났네 어쩌네 하더니. 하는 짓 좀 봐라. 아니, 근데 왜 하필 이 못생긴 계집애란 말인가. 이왕이면 엊그제 만났던 그 천하절색에게 이러면 좀 좋을까.
“허면 여긴 어쩐 일이신 겁니까?”
“궁금해서요.”
“궁금이요?”
“네, 대장군 자리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면 전직 금의위 교위가 대체 무슨 목적으로 여기까지 온 것인지가요. 물론 어머니께서는 그저 몸값을 높이기 위한 수작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전 공자의 말을 믿어보고 싶어졌거든요.”
운호가 곤란한 표정으로 턱을 긁적였다.
“목적이라······.”
“왜요? 말하기 어려운 부분인가요?”
“아뇨, 사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입으로 이야기하자니 조금 민망해서요.”
“민망하기로는 어디 지금 저만할까요. 바로 며칠 전에 맞선에서 까인 상대에게 찾아와 이유를 묻고 있는데요.”
“그것도 확실히 그렇군요. 그게 그러니까 제 목적은······.”
“목적은?”
목적.
그것은 무림인들이라면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대장군부. 무공을 익혔지만, 무림인이 아니고, 무공을 익혔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닌 곳이다.
그렇기에 운호는 말했다.
이 대장군부에 오직 저 굴불신마 영무결만이 이해할 수 있는 답변을.
“무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