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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역대급 천재-155화 (155/288)
  • 155화

    누구의 잘못인가(3)

    “오늘 제군들을 보니 참으로 반갑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많겠지만 본관의 이름은 백운호. 화산파의 제자로 잠시 금의위 교위로 북진 총관의 부관직을 역임했었고 지금은 좌장군의 추천을 받아 이 자리에 섰다.”

    커다랗게 소리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선명한 목소리였다.

    이제 막 변성기를 지나 아직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정확하게 꽂혀 들어간다. 약간의 요령.

    -그래, 그런 식으로 기로 거대한 울림통을 만들어서 공명을 시키는 거다.

    병사들이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내심은 달랐다. 운호가 화산파의 제자인 것. 그리고 열넷이나 되는 인급의 마두를 제거했다는 것까지는 이미 소문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금의위의 교위라니. 금시초문이다.

    ‘진짜일까?’

    ‘다른거라면 몰라도 금의위로 사기를 칠 수는 없을테니······. 맙소사. 열여덟살짜리가 금의위에 교위직을 거쳐 여기로 왔다고?’

    사실 대장군부의 천인장과 금의위의 교위는 모두 종 5품의 관직으로 직급상으로는 동등하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중앙과 지방의 관직은 중앙의 관직을 반급은 높게 쳐주는 것이 관례다.

    즉, 본래 금의위 교위를 역임했던 운호에게 대장군부의 천인장은 벼락출세가 아닌 강등이나 다름없다.

    오백인장 왕효 역시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운호가 말을 이어갔다.

    “나는 제군들이 얼마나 훌륭한 인재인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대들에게 꼭 필요한 조각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확신한다.”

    잠깐의 침묵.

    그 침묵이 기대를 만든다.

    -그래, 잘한다.

    운호의 시선이 병사들을 훑었다.

    모두와 눈을 맞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운호의 시선 근처에 닿은 병사들은 마치 운호가 자신과 시선을 맞췄다는 착각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운호가 말을 이어갔다.

    “내가 바로 그 조각이다. 이 자리에서 약속하겠다. 위험에는 그 위험에 어울리는 성과를. 성과에는 그 성과에 어울리는 포상을.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가장 어려운 자리에 항상 함께하며 꼭 함께 돌아오겠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서른 줄에 접어든 노련한 일류 고수들이었다.

    오랜 기간 무공을 수련했고, 가장 위험한 전장을 넘나들며 경험 역시 만만치 않게 쌓아 올렸다. 물론 가장 위험한 곳을 드나드는 만큼 정신적으로 조금 불안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쉽게 누군가에게 선동될만큼 어리석지 않다.

    -짝······짝···짝짝짝!!!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도 운호의 말은 강력했다.

    지금까지 실질적으로 그들을 이끌던 오백인장 왕효와 선임백인장 장당을 빠르게 압도한것도 충격적이었지만, 그의 과거 행적이 범상치 않았다는 점. 그 행적에 비해 터무니 없이 어린 나이. 무엇보다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고강한 무공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결국 사내들의 세계는 서열이다.

    그리고 군대는 그것을 가장 원초적으로 보여준다. 더 높은 곳으로 가면 정치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자원으로 다투는 세상이 나온다지만 고작 천인대. 백여 명이 아웅다웅하는 세계는 조금 다르다. 떠돌이 늑대라도 우두머리를 완벽하게 제압할만한 힘을 보여준다면 무리의 정상에 오를 수 있다. 하물며 그 강력한 떠돌이 늑대가 그들이 가장 원하던 것을 주겠다는데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병사들의 박수 소리가 연병장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의 크기만큼 장당의 어깨가 점점 작아졌다. 아무리 어리석은 그라고 해도 지금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을 모를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태형에 감봉. 그리 두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으로 인해 왕효까지 피해를 본다는 것. 그리고 병사들이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것이 그를 위축시켰다.

    적당한 시간.

    운호가 손을 들었다.

    일순간의 정적.

    파검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예라고 하더니. 그래도 그 녀석이 완전히 거짓말만 한 건 아니로구나. 훌륭하다. 내가 머물렀던 북병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병에 이만한 군기라면 보기 드물지.

    운호가 그 조용함 속에서 왕효와 장당을 바라봤다.

    “항명에는 태형. 그리고 사적인 싸움질에는 감봉 삼 개월이라고 했던가?”

    “네, 그렇습니다.”

    “태형은 이십 대. 오늘 즉시 시행한다. 왕 부관 자네가 책임지고 처리하도록. 삼 개월의 감봉 역시 이달부터 적용하고. 추가로 장 백인장. 너는 오늘부터 내 허락이 있을 때까지 금주다.”

    장당이 잠시 머뭇거리며 입을 열려는 찰나.

    왕효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네, 명하신 대로 이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하······, 하지만 형님!!”

    “조용히 해라!!”

    운호가 그들에게서 눈을 돌렸다.

    왕효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장당을 전음으로 꾸짖었다.

    파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군율은 본래 엄정해야 하는 법이다. 다행히 왕가라는 놈이 눈치가 있긴 하다만 오히려 저런 놈을 더 조심해야 한다. 눈치가 없는 놈은 눈치가 없어서 문제지만, 눈치가 빠른 놈은 그 빠른 눈치로 슬슬 기어오를 구석을 살피기 마련이거든. 저런 놈은 아예 여지를 주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경험입니까?’

    -크흠, 경험은 무슨!! 나는 북방에 있을 때, 모범적인 사람으로 소문이 아주 자자했다.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그런 부하를 경험해본 적이 있냐는 질문이었습니다만······. 일단 잘 알겠습니다.’

    운호가 등을 돌려 세 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짐짓 깜빡했다는 태도로 가볍게 등을 돌려 병사들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오늘 점심은 특식이다. 내 한 달 녹봉을 탈탈 털었으니 다들 맛있게 먹길 바란다. 이상.”

    -잘했다. 그래. 군대라는 게 원래 먹을 거 잘 챙겨주는 게 최고거든.

    파검의 말이 옳았다.

    운호의 연설은 병사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물론 원래 지휘관이 그럴싸한 말을 하면 박수를 치도록 유도하는 것이 중간관리자들이라지만, 지금은 그 중간관리자. 부대의 실세들이 영혼까지 털리던 상황이었다. 분명 운호의 연설 말미에 나왔던 박수는 병사들의 진심이었다.

    하지만 특식이라는 단어는 수준이 달랐다.

    환호와 박수 갈채.

    사실 병사들의 녹봉은 그리 적지 않았다. 일류의 고수들이고 특수한 임무를 띈 병사들이다. 녹봉이 적을 수가 없다. 하지만 설사 내가 은자 한 냥을 월봉으로 받는다고 해도 남이 사는 닷 푼짜리 공짜 밥이 싫을 수는 없다.

    그것도 오늘 처음 부임한 지휘관이 무려 자신의 한달 녹봉을 탈탈 털어 부대원 전원에게 밥을 사겠다는 데야 환호성이 안 나올 수가 없다.

    “야, 이거 새파란 애송이가 장군으로 온다고 해서 지난번처럼 공로에 눈이 멀어 미친짓 하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하는 짓 보니까 그럴 리 없겠는데?”

    “야, 금의위 교위 출신이래잖냐. 거긴 애당초 병사들 사찰하고 그런 곳인데. 이런 문화야 빤히 알겠지.”

    “한 달 녹봉을 회식비로 그냥 쏘는 걸 보면 집도 제법 사는 것 같지?”

    “당연하지. 얼굴 좀 봐라. 귀티가 줄줄 흐르는 것이 딱 봐도 명문가 자제님이다. 게다가 중앙이랑 끈도 있으니 뒷배도 탄탄할 테고. 우린 이제 노 난 거야.”

    * * *

    운호에 대한 소문은 금방 퍼져나갔다.

    당연한 일이다. 열여덟 살. 절정. 그리고 마두들을 참살한 공로로 임관과 동시에 천인장에 올랐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기에 한 가지 소문이 더 추가됐다. 그리고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금의위 교위? 아, 그러고보니 그러네. 나랑 절강에서 마주쳤을 때 분명 금의를 입고 있었어. 아마, 북진 총관인 혹참가포 조충의 부관이었지?”

    청해성은 변방이다.

    그들이 중원, 그러니까 중앙 지역에 갖는 마음은 조금 묘한 구석이 있었다. 그것이 자의였는지 혹은 타의였는지를 떠나 그들의 선조는 개척자였다. 그리고 그 개척은 분명 의미가 있었다.

    “어디 중원에서 보통 사람이 이렇게 풍족하게 먹고 살 수 있다던가? 거긴 일년내내 땅을 파봤자 지주에게 지대 내고, 나라에 세금 내면 딱 굶어 죽지 않을 만큼 남는 거 아닌가.”

    실제로 청해성의 평균적인 가정의 재정 상태는 중원의 평균보다 훨씬 나았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땅을 가진 자작농이었고, 청해성 동쪽 땅은 옥토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미흡했으니 그래도 박토라고 할 정도는 아닌 훌륭한 땅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한 편으로는 중원의 발달한 문화. 그리고 안전한 삶에 대한 부러움 역시 함께 갖고 있었다.

    “거 이번에 장씨가 감숙성으로 간다고 하더군.”

    “응? 장씨가? 무슨 돈이 있어서?”

    “막내 아들이 상단에 취직해서 큰돈을 벌었다잖아. 여기 땅은 큰 아들내미 물려주고 막내 아들에게 봉양 받으러 간다고 하더군. 그러기에 내가 뭐라고 그랬나. 장씨가 혜안이 있다고 했잖아. 사람은 역시 배워야 해.”

    “혜안은 무슨. 먹고 뒤질 돈도 없는데 막내놈 글자 가르치는 거 그거 돈지랄이라고, 가서 기술이나 배우게 하라고 해놓고는.”

    “크흠, 거 이 사람. 내가 언제 그랬다고.”

    천인장.

    절정.

    열여덟살.

    이미 충분히 어려운 단어들이다.

    그리고 거기에 중앙의 고위직 중 하나인 금의위 교위 출신이라는 단어까지 추가됐다. 덕분에 수색단의 다른 천인장들도 운호에게 쉽게 접근해오지 못했다.

    운호 역시 굳이 다른 천인장들과 친해지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는 업무의 많은 부분을 왕효에게 맡기고 거의 대부분 시간을 무공 수련에 힘썼다.

    그리고 보통 상관이 그럴 경우 부관은 이래저래 해먹기가 좋은 것이 일반적이다.

    “이건 조금 이상한데?”

    “네? 잠시 확인을······. 죄, 죄송합니다. 그 부분은 계산 착오가 있었습니다.”

    “그래? 흐음, 그 부분은 잠시 뒤에 창고에 직접 나가보는 걸로 하고. 일단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지만 아쉽게도 운호는 조금 달랐다. 그 놀라운 오성은 그 짧은 시간 서류를 훑는 것만으로도 대부분 오류를 잡아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운호의 오성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파검의 도움 역시 만만치 않았다. 비록 그가 인간 지표급으로 투자에 실패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그는 숫자에 밝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해룡방이라는 문파를 개파하여 지역의 중견문파로까지 키워낸 전력도 있었다.

    고작 이만한 부대의 운영 정도야 그에게는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숫자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라고.

    파검이 슬쩍 잘난 척을 했다.

    ‘그런데 그런거 치고는 그 진실만 말하는 숫자에 너무 자주, 크게 당하신······.

    -크흠,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사람의 욕망은 종종 사실을 곡해하는 법이지······.

    파검이 턱을 긁적였다.

    기본적으로 이 시대. 그 숫자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물론 운호나 파검이라고 해도 남궁철만큼 학문을 공부하고 전문적으로 산학을 익힌 이가 작정하고 분식을 하려 했다면 찾아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변방. 일선 부대에 그만한 인재가 배치될 리 만무하다. 왕효는 제법 똘똘한 사람이었지만 그 역시 평생 무공을 익힌 무인이지, 전문적인 학자는 아니었다. 숨길 수 있을리 만무하다.

    그리고 대장군부의 이인자. 좌장군 영무결은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호오······. 이거 기대한 것보다 훨씬 대단한데?’

    열여덟에 절정.

    엄마 뱃속부터 무공에만 매진했다고 해도 믿기 힘든 성취다. 헌데 행정에도 이만한 재능을 보인다? 터무니 없다. 하지만 그 터무니 없는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으니 또 믿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역시 탐이 난다.

    영무결이 자신의 딸들을 불러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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