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누구의 잘못인가(2)
“니미, 내가 더러워서 부대를 옮기든지, 아니면 중앙으로 가든지 해야지.”
“마음에도 없는 소리 그만하고 술이나 더 잡숴. 어차피 부대장들 오면 한번씩 다들 하는 거잖어. 왜 그리 예민하게 구실까. 우리 선임 백인장님께서.”
“선임 백인장은 개뿔. 아니, 막말로 절정 찍고 일 년이나 오백인장으로 승진 못 하는 놈. 나 말고 또 있음 어디 나와보라 그래. 아니, 윗대가리가 지가 멍청해서 사지로 기어들어가 죽은 걸, 왜 우리 공로를 깎냐 이거야.”
“워워, 당이 자네 너무 많이 마신 것 같군. 이제 그만 하지.”
“많이 마시기는 개뿔.”
장당이 어린아이 머리만 한 술 단지를 그대로 움켜쥐고 꿀꺽꿀꺽 호쾌하게 들이켰다. 사천에서 들여온 백주답게 독하기 이를 데 없는 술이었던 만큼 말술인 장당이라고 해도 한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진정하게. 그래도 이번에 새로 온 대장은 중원에서도 소문난 고수 아닌가. 게다가 최근 혼자서 인급의 마두를 무려 열넷이나 참살했다고 소문이 아주 자자하더군. 그만한 고수 아래라면 공을 세우기도 좋은 환경 아닌가.”
“인급의 마두 열넷. 그래 좋지. 아주 좋아. 그런데 말이야. 그 아이 나이가 이제 고작 열여덟이라더군. 크크크. 열여덟.”
“아니, 나이가 무에 중요한가. 어디 칼이 나이 보고 피해간다던가?”
“그렇지. 칼은 나이 보고 피해 가지 않지. 하지만 생각을 좀 해봐. 열여덟에 절정에 오른 것만도 대단한데, 이름난 인급의 마두 열넷을 썰어버렸다고? 게다가 뭐라더라? 한 번에 여섯이 합공하는 걸 베었다고?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내가 무식한 놈이라 그런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군. 그만한 무위는 종장군님도 보여주기 힘들 것 같은데?”
“그래서 네 생각은 뭔데?”
“군문에 아무런 공이 없던 사람이 우리 천인대에 장으로 오려면 얼마나 대단한 공이 필요할까? 인급 마두 한 열댓은 썰어버려야 가능하지 않을까?”
장당과 이야기를 나누던 사내가 인상을 굳혔다.
“그러니까 공로가 조작됐다?”
“그거야 모르지. 하지만 난 열여덟이 인급 마인 여섯의 합공을 이겨냈다는 것보단 그게 더 설득력있게 느껴지는군.”
“하지만 그거 종장군님과 그 직속 부하들이 봤잖아.”
“아니지. 종장군님이 봤다고 하는 걸 그 직속부하들이 들은 거지. 내가 거기에 백가 놈과 이야기를 좀 해봤는데 걔들은 번 영감님과 대두귀 하나 잡았고, 그리고 합류했을 때는 이미 시체가 가득했고, 종장군님 검에도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고 하더군.”
“종장군님이 합공을 마두들을 잡고 공로를 몰아주셨다?”
“그래, 게다가 나머지 여덟이야 전리품만 보여줬을 뿐, 딱히 증거도 없었고 말이지.”
그럴싸하다.
확실히 소문은 무성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지켜본 이는 없다.
“하지만 굳이 위에서 그런 걸 조작할 이유가······.”
“이유야 있지. 어찌 됐건 열여덟에 절정 고수잖아. 미래도 창창하고. 그만한 고수가 오는 건데 그 정도 밀어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런가? 근데 그러면 그 밀어주는 사람 밑에 일하는 우리는 노난 거 아니야?”
“노는 무슨. 퉤. 생각을 해봐. 그렇게 밀어지려면 공로가 필요하겠지. 근데 공로는 어디 그냥 나오나? 밑에서 일하는 우리들만 아주 죽어나가는 거지.”
-꿀꺽꿀꺽.
장당이 이미 잔뜩 취해 벌게진 얼굴로 술을 한 동이 더 들이켰다.
“하, 당이 자네. 이제 보니 굉장히 똑똑했구만.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왕 형님을 졸졸 따라다니더니 자네도 굉장히 똑똑해졌어.”
“똑똑은 무슨. 그냥 기본이지. 원래 저 위로 올라가려면 다 생각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 법이야. 생각. 그냥 무식하게 무공만 연마해서 되는 게 아니라고.”
* * *
오백인장 왕효가 이를 악물었다.
“장당, 이 망할 자식.”
그리 이르지 않은 아침.
수색 3대의 전원이 모이는 사열에 장당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급하게 부하 하나를 시켜 그를 데려오라고 보냈지만 늦다.
뒤편으로는 안색이 그리 좋지 않은 백인장 하나가 서성였다. 어제 장당과 함께 술을 마신 녀석이다. 그래도 이 녀석은 정신이 완전 나간 것은 아니었는지 늦지 않게 나오기는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어린 녀석이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오는 사람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약속에 조금 일찍 나오는 것이 사람에게는 좋은 버릇이지만, 상사로서는 그리 좋은 버릇이 아니다. 본디 상사란 정각, 혹은 정각에서 몇 분 정도는 늦어주는 것이 하급자에게 좋은 상사다.
왕효가 감각을 곤두세웠다.
저 먼 곳까지.
단순히 기감 만이 아니다. 소리, 공기의 움직임, 냄새, 땅의 진동. 그 모든 것이 그의 감각을 자극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한적한 지역에서 펼치는 것과, 복잡한 대장군부의 복판에서 펼치는 것은 역시 차원이 다르다. 그를 혼란하게 만드는 수많은 감각들이 정보가 되어 폭포수처럼 밀려온다.
그 가운데 그에게 필요한 정보만을 걸러냈다.
아쉽게도 여전히 장당 녀석은 그의 감각에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의 새로운 상급자인 백운호 역시 그의 감각에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둘 중 누가 더 먼저 감각에 잡힐 것인가.
그리고 바로 그 때.
그 감각의 끄트머리. 제법 강렬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백운호? 장당?
장당이다. 기운의 크기로 구분한 것은 아니었다. 속도다. 백운호라면 지금 굳이 저렇게 부리나케 달려올 이유가 없었다. 이건 지각으로 달려오는 장당 쪽이다.
“휴, 다행이군. 늦진 않겠어.”
“당연하지. 무려 백일곱 명과의 약속인데. 늦을 수야 없지. 안 그런가?”
-오싹.
순간 전신의 솜털이 바싹 치솟았다.
대체 어떻게!! 코앞에 올 때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기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소리도, 공기의 움직임은 물론이거니와 땅의 진동조차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왕효 자신이 익힌 기공의 특수함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오······, 오셨습니까.”
왕효가 일그러질뻔한 얼굴 표정을 수습했다. 등줄기로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인급의 마두 열넷을 홀로 처리했다고 했던가? 사실 어느 정도 공적을 밀어주기 위한 조작이 있지 않았나 의심했었다. 당연하다. 고작 열여덟의 나이에 절정에 이른 것도 이상하거늘, 그만한 무력이라니. 하지만 이만한 무공이라면 어쩌면 그게 정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상식은 아득히 벗어난다.
하지만 고작 이 나이에 천지간에 자신을 숨기는 경지에 이른 것부터가 정상은 아니다. 이건 아주 옛날 그가 어렸던 시절. 사문의 대장로님도 보여주지 못했던 경지다.
운호의 시선이 좌중을 훑었다.
“사람이 안 보이는데?”
그래, 당연하다. 그냥 넘어갈 리가. 장당은 바로 어제 만났던 얼굴이다. 게다가 왕효의 뒤를 이어 부대의 삼인자다. 그가 안 보이는 것을 놓칠 리 만무하다.
“그······, 그게. 선임 백인장 장당이 조금 늦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운호의 되물음에 왕효가 다시 한번 놀랐다.
물론 절정에 이르른 고수의 안력은 초월적이고 그 사고의 속도는 범인을 아득히 웃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그저 한번 훑어보는 것으로 전체 인원이 백일곱인지 백다섯인지를 꿰뚫는다고?
하지만 그 놀람과 무관하게 왕효의 입은 운호의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장 백인장이 늦는 것 같아 제가 병사 하나를 보냈습니다.”
“그렇군. 그러면 함께 오는 병사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뜻이겠군.”
함께 오는 병사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꿀꺽.
왕효가 그 말의 의미를 완벽하게 파악했다. 오싹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고작 열여덟 살짜리 아이에게 압도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답은 간단했다. 그가 전력으로 기공을 운영했건만 그것을 뚫고 그의 앞에 선 순간부터다. 내심 자신의 무공이라면 설사 활불이나 대장군이라도 백 보 안쪽에서는 감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늘······.
“죄송합니다. 좀 늦었습니다.”
풀어헤친 의복.
뻗친 머리.
퉁퉁 부은 얼굴.
그리고 고약한 냄새까지.
“내가 바로 어제 코앞에서 이야기했었으니, 오늘 사열이 있다는 이야기를 못 들었던 것은 아닐 테고. 이유나 좀 들어볼까?”
“······.”
장광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불편한 공기가 맴돈다.
그를 데려온 병사가 주뼛주뼛 어쩔 줄 모르는 자세로 왕효의 눈치를 살폈다.
운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왕효가 빠르게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운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장군. 제가 더 제대로 단속을 해야 했던 것인데. 제 실책입니다.”
“형님······.”
“장광!! 형님이라니!! 이곳은 공석이다. 얼른 장군께 백배 사죄드리지 않고 뭘 하는 것이냐!!”
-저 자식 눈치 하나는 빠르군. 어쩔 생각이냐?
운호가 피식 웃었다.
‘본인 눈치만 빨라서 뭘 합니까. 동생이라는 녀석이 저 모양인데요.’
마지못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는 장광을 바라보며 운호가 말했다.
“그래, 네 실책이지. 나는 분명 너희에게 오늘 사열이 있을 것이라 말했고 그걸 너에게 맡겼다. 헌데 선임 백인장이라는 녀석은 밤새 술을 처마시느라 주독도 제대로 빠지지 않아 엉망인 채로 지각을 하고 오백인장이라는 녀석은 부하 하나 제대로 제어를 못 해서 쩔쩔매는구나. 분명 좌장군이 나에게 최전방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정예부대에 보내주겠다하여 온 것인데. 그야말로 오합지졸 그 자체이니. 이것 참. 나도 여기 있다가는 까마귀 새끼가 되는 것 아닌가 걱정이로구나.”
운호의 비아냥에 왕효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려는 찰나.
아직 술이 덜 깬 불퉁한 목소리가 한발 빨랐다. 장광이었다.
“그게 그렇게 무서우면 좌장군께 말씀드려 돌아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장광!!!”
왕효의 높아진 언성에도 불구하고 장효의 불퉁한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그 순간, 왕효는 고민했다. 지금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사태를 이대로 잘 봉합할 수 있을까?
답은 간단했다.
‘미안하다.’
왕효의 주먹이 장광의 얼굴을 향했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절정 고수의 손길. 그 예상하지 못했던 공격에 장광이 반응하지 못했다.
-따악!!
하지만 운호는 달랐다. 그의 검집이 왕효의 팔목을 두들겼다. 좌중의 그 누구도 인지하지 못했던 일격.
“쯧쯧쯧, 이거 아주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군. 항명에, 주먹질에. 왕효!!”
“네, 장군.”
“항명, 그리고 사적인 싸움질. 군법에 따르면 어떤 처벌을 받나.”
자신의 팔목을 움켜쥔 왕효가 그 질문에 답했다.
“항명은 그 경중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가 태형 이십 대. 그리고 싸움질의 경우 석 달 감봉입니다.”
-꿀꺽.
연병장에 모인 병졸들 역시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들이 부동자세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제 장광과 함께 술을 마셨던 백인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오, 저 멍청한 놈. 무공이 뭐 어쩌고 저째?’
딱히 대단한 싸움질도 없었다.
하지만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저 저 칼질 한 번에 부대에서 가장 강력한 저 두 사람이 완벽하게 제압됐다는 것을.
격이 다르다.
운호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