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신검(15)
제국의 군사 조직은 전조(前朝)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당연한 일이다. 비록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쫓겨나긴 했지만, 전조는 전성기에 세계제국(世界帝國)에 근접했던 대제국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은 강대한 군사력이었고, 그 강대한 군사력은 그들 개개인의 무력도 무력이지만 그 효율적인 체계가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던 일인만큼,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체계 속에서 ‘장군’이라는 호칭을 사용 가능한 최소 범위는 천인장부터라고 볼 수 있었다. 사실 고대의 전쟁에서 천명의 병사는 그리 썩 의미가 있는 숫자는 아니었다. 기록에 따르자면 국가의 운명을 건 전쟁에서는 백만 단위. 심지어 비전투 병력을 제외하고 순수 전투 인원으로만 백만 단위의 병력을 동원했다는 기록도 왕왕 존재한다. 물론 사서 자체가 과장이 섞였을 확률이 높긴 하지만, 어쨌거나 수십만 단위의 병력이 동원된 것은 사실이라는 뜻이다.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일이지. 백만이라니.”
“하지만 지금 우리 제국도 총병력을 다하면 백만쯤 되잖아요. 그 왜, 백만 금군 이라는 표현도 쓰고 있고요. 가능한 일 아닌가요?”
“멍청하기는 그때랑 지금이랑 인구가 다르잖아. 게다가 백만 금군이라고 해봐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거 동원하는 건 진짜 제국 망하기 직전에나 할 법한 일이라고.”
“네?”
“자, 봐라. 지금 우리 대장군부에 병력이 총 사만이야. 근데 이거 유지하는데 일 년에 얼마나 들어가는 거 같냐? 사병들 녹봉에 병장기에 식량까지. 적어도 이백만 명한테는 세금을 걷어야 이 병력이 유지 가능할 거야. 그러면 병력이 백만 명이면 그게 얼마냐? 게다가 우리는 그래도 국경을 지키는 병력이고, 세금이며 보급까지 체계가 잘 짜여 있으니 효율이 괜찮은 편이지. 무엇보다 그 병력들은 다 뭐다?”
눈만 끔뻑끔뻑 거리는 후임의 표정에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휴, 그래 내가 뭘 바라겠냐. 잘 들어. 그 병력들이 결국 다 논밭에서 가장 열심히 일할 생산인력이다. 그 사람들이 다 빠지면 당장 생산 효율도 쭉 떨어지고, 심지어 우리처럼 평소에 무공을 갈고 닦은 병력도 아니니 교전비도 형편 없을 테지. 괜히 제국이 우리 같은 직업군인들을 양성하는 게 아니에요.”
“아니, 형님은 그 작은 머리로 평소에 이런 걸 어떻게 다 생각하고 사시는 겁니까? 소제는 지금 이 이야기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습니다.”
“너도 이제 슬슬 알아둬야 한다. 지금부터 이 위로는 무공만으로 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야. 이걸 써야 해. 이걸.”
사내가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번 영감님을 좀 봐라. 그만한 무위에 그만한 공을 세우고도 여전히 부관 노릇이나 하고 있잖냐. 이제 슬슬 은퇴할 나이가 다 되어 가는데 말이다.”
“에이, 그래도 그 영감님 자기 나름대로 만족하고 사시잖습니까. 게다가 어디 우리 같은 놈이 머리 좀 쓴다고 위로 올려나 준답니까? 보십쇼. 이번에도 그냥 위에서 내리꽂아 버리는 거. 하여간. 어디 이번에도 뒤져 나가도 또 내리 꽂아 버릴지······.”
-짝!!
사내의 손바닥이 후임의 뺨을 후려갈겼다.
“멍청한 놈. 내가 말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죄송합니다.”
“명심해라. 만약 그 일이 들통나면 우리는!!”
사내가 말을 멈췄다.
저 먼곳 희미하게 느껴지는 기감.
누군가가 접근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기가 수색 3대인가요?”
해사한 얼굴.
그것은 도무지 변방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기운이 물씬 풍기는 젊은, 아니. 아직 어리다는 표현이 더 적합한 소년이었다.
“누구?”
“아, 이번에 새롭게 천인장으로 임명된 백운호라고 합니다.”
* * *
“대사형!! 그게 정말 사실입니까?”
“갑자기 난데없이 들이닥쳐서는 대체 무슨 소리냐.”
“아니, 백소협 말입니다. 천인장으로 보내셨다면서요!!”
“아아, 그래. 그랬지. 인급 마두를 단독으로 열넷이나 잡았으니 응당 그 정도 보상은 따라야지. 게다가 본인의 무공도 그것을 감당하기에 충분하지 않더냐.”
“아니, 누가 천인장 되기에 공로가 적다고 그랬습니까? 그 녀석이 우리 대장군부에 임관한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죠. 하지만 수색 3대!! 수색 3대가 문제 아닙니까. 그놈들 그 흉흉한 소문이 도는 놈들이잖습니까. 몰랐다고는 하지 마십쇼. 사형이 그걸 모르셨을 리 만무하니까요.”
전장에서 금지된 행동은 참으로 다양하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금기시 되는 것을 꼽아보자면 탈영, 그리고 항명이다. 당연한 일이다. 패배에는 많은 요인이 존재하지만 그 두 가지야 말로 패배의 으뜸가는 원인들이기 때문이다. 탈영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항명 역시 마찬가지다.
전쟁이란 본래 시작부터가 불합리성에서 출발하다. 당연히 그 과정 역시 불합리의 연속이다. 그 가운데 상관의 불합리해 보이는 명령은 드문 일이 아니고, 그 가운데 상당수는 전술적 불합리성이 전략적 합리성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왕왕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그때마다 항명을 한다면 결국 그 전쟁은 패배로 직결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항명의 가장 높은 단계는 무엇일까?
그것 역시 두말할 것도 없다. 명령을 내린 자를 제거하는 것. 즉 상관 살해다. 그리고 수색 3대는 그 상관 살해의 혐의를 아주 진하게 받는 부대였다. 물론 증거는 없었다. 그저 심증과 떠도는 소문뿐이다. 보통이라면 그만한 소문과 심증이 떠돈다면 부대를 해산할 법도 한데, 그러기도 힘든 것이 수색 3대가 만들어내는 전과 자체는 발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느 수색대들이 그렇듯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적진을 살피고 빠져나온다. 그 과정에서 얻는 정보의 품질은 물론이거니와 생환율 역시 압도적이다. 다만 항상 부대에 사상자가 크게 발생할 때마다 그 가운데는 부대장이 꼭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사실 이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일반적으로 천인장 정도 되면 그 부대에 가장 강력한 전력인 동시에 마지막까지 보호를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 소문이라면 잘 알고 있다. 상관 살해에 관한 이야기지. 하지만 동시에 수색 3대라면 가장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부대이기도 하다.”
“무공은 뛰어나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 아이입니다. 그러니 찬찬히 포섭하고 키워낸다면 대장군부에 엄청난 전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권유를 했고. 하지만 거절하더구나.”
“아니!! 지금 거절하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래도 화산이라면 명문 중에 명문인데!! 천천히 포섭을 시도해야죠. 그거 거절 좀 당했다고 죽여버리는 게 말이 됩니까?”
영무결이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웃음일까? 만약 저것이 웃음이라면 저것은 세상에서 가장 사납고 무서운 웃음이리라.
그 표정에 종자명이 흠칫 놀랐다. 워낙에 충격적인 일이라 잊고 있었지만, 지금 그가 앞에서 대거리질을 하고 있는 상대는 그의 대사형. 좌장군 영무결이다.
“그 어린 녀석이 확실히 매력이 있긴 한 모양이로구나. 자명이 네가 나에게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다니 말이다.”
“아니, 제 말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래······. 그러니 나도 그 매력에 빠졌지. 뭐, 당연한 일이다. 나 같은 늙은이가 자신의 생명마저 깎아가며 성장하는 그 눈부신 어린 재능에 어찌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래서 기회를 준 것이다.”
“기회요?”
“그래. 기회. 동시에 네가 말한 것처럼 우리도 그 아이를 천천히 포섭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천천히 포섭할 기회? 상관 살해를 일삼는 최전방 부대에 부대장으로 내보내놓고는 천천히 포섭할 기회라고?
종자명이 되물었다.
“대체 그게 어디가 천천히 포섭할 기회입니까.”
“쯧쯧쯧. 멍청하기는. 너는 아직도 그 아이를 제대로 모르는구나. 그 아이는 일 년 동안 다른 사람의 오 년, 십 년을 살아가는 아이다. 비유적으로도. 그리고 물리적으로도. 그렇다면 그 아이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속도를 맞춰줘야 하는 것이 온당하겠지.”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영무결의 이야기에 종자명이 눈을 끔뻑끔뻑했다.
그 모습에 영무결이 가볍게 혀를 찼다. 뭐 어쩔 수 없겠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자신과 같은 눈높이를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 * *
화산파의 삼대 제자. 소신검 백운호.
영무결은 운호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신검(小神劍). 그래 나쁘지 않다. 아직 어린 나이에는 제법 어울리는 이름이지. 과거에도 많았고 지금도 많다. 소천마(小天魔)니 소검후(小劍后)니 소권왕(小拳王)이니 하는 이름들 말이다. 하지만 그것 아느냐? 그 가운데 이름에서 소(小)자를 떼어낸 이는 백분지 일도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떠냐. 나를 믿고 따른다면 3년. 3년 안에 그 이름에서 소(小)자를 떼어 내주겠다.”
“좌장군님을 믿고 따른다고요?”
영무결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다.
천마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작금에 이르러서는 천급의 마존. 그 끓어오르는 마기가 하늘과 땅의 기운마저 굴복시킬 만큼 압도적인 경지에 이른 마인들을 칭하는 단어로 사용 된다. 도가나 불가. 중원의 경지로 따지자면 초절정에 비견되는 경지다.
하지만 본래는 그렇지 않다.
동시대에 적게는 열에서 많게는 스물 이상.
어찌 천마가 그토록 흔할까.
천마. 마라 파피야스.
다른 말로 하자면 천자마(天子魔).
아주 오래전 붓다가 마지막으로 법을 얻던 시절부터 모든 법을 얻으려는 자들의 반대편에 존재해온 상징적 존재.
이 시대의 유일한 천마(天魔) 영무결이 선언했다.
“그래, 네가 원하는 것이 그 십구 년이라는 시간 안에 우화등선을 해낸 파검도 끝내 어찌하지 못했던 마교의 대제사장을 따라잡는 일이라면. 천하에 그것을 도울 수 있는 이는 오직 나 뿐이다.”
* * *
몽원경은 마공에 반응한다.
증무진인 목운평은 과거에 이렇게 말했었다.
그것이 나에게 허락된 일이니까. 아니, 허락이라기보다는 의무이지.
마인이야말로 이곳 몽원경의 목적이며 이렇게 너와 내가 마주 보는 이유다.
하지만 스스로를 천마라 칭하던 영무결을 만난 이후로도 꿈속의 몽원경은 여전히 황량했다. 그곳에는 흩날리는 꽃잎도, 휘몰아치는 파도도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황폐한 광야뿐이다.
그 광야에서 운호는 검을 휘둘렀다.
그가 처음 익혔던 납매검부터 매농을 거쳐 자운과 광음. 그리고 난풍까지.
목운평이 남겼던 검술들이 그의 손끝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곧바로 반야검이 이어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검술들.
그 가운데 운호는 고민했다.
대체 목운평이 남긴 검술들과 반야검의 차이는 무엇인가.
나는 난풍검의 오의를 얻었을까? 그리고 화산파에 남은 마지막 검술. 무형(無形)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를 천마라 칭하던 영무결은 말했다.
금단(金丹)은 운호의 수명을 갉아가며 그를 한 자루의 날카로운 검으로 벼려내고 있다고.
그리고 운호는 생각했다.
과연 그것이 금단만의 효과일까?
힘들게 하루를 살고, 그 모든 짐을 벗어던지는 소중한 밤.
그 꿈의 세계에서 운호는 오늘도 그렇게 홀로 검을 휘둘렀다. 다른 사람들의 하루 만큼. 아니, 어쩌면 그 하루의 몇 배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