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신검(14)
“재밌군.”
영무결의 안광이 번뜩였다.
호안(虎眼)이라는 말이 있다.
무림의 고수가 아닌 한에는, 아니 설사 일류의 고수라고 해도 산군(山君)이라고 할만한 호랑이를 만나면 살아남기 힘들다. 개중에 영물이라고 할만한 녀석들은 절정의 고수와도 비길만하다.
실제로 광서대장군부, 남로군을 이끌었던 궁익이 몸에 감고 다니던 호랑이 가죽 같은 경우 창칼에 상하지 않는 기물이었다.
영무결의 눈이 그러했다.
마치 칠흑 같은 밤.
깊은 산속에서 타오르는 시퍼런 귀화를 보는 것 같다.
-사술이다!!
파검의 외침과 동시에 정답이 -우우웅 검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순간에 그 어두운 세상이 깨졌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방안. 영씨 부인은 여전히 문 손잡이를 잡은 채 그래도 다과가 부족하지 않은지를 걱정하고 있다.
“부인, 정말 괜찮습니다. 장군께서 저에게 긴히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으니 잠시만 자리를 양보해주시죠.”
영씨 부인이 두 사람을 힐끔 한번 바라보고는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한순간 또 다시 방의 분위기가 변했다. 조금 전의 그 안광은 아니었다.
“예민하군. 안심해라. 그저 기막으로 주변의 소리를 차단했을 뿐이니. 아, 내가 그쪽보다 한 30년쯤 더 살았고 이래 봬도 꽤 높은 사람이니 말은 놓도록 하겠다. 뭐, 굳이 나에게 공대를 받고 싶거든 적어도 회시 정도는 합격하고 오도록 해라.”
“뭐였습니까?”
“만마앙복(萬魔仰伏). 잡기라고 하기에는 꽤나 유용하고, 그렇다고 신공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잡스러운 기술이다. 하지만 그래도 보통은 쉽게 깨부수지 못하는 기술인데······.”
영무결의 시선이 운호의 등에 매달려 있는 정답으로 향했다.
예의 그 호안이 번뜩인다.
-우우웅
“스스로 검명(劍鳴)을 일으키는 검이라. 그렇다고 기운이 잡스럽지도 않으니 귀검은 아닐 터. 소신검(小神劍), 소신검 하더니. 정말로 신검을 들고 다니고 있었구나.”
“그저 연이 닿았을 뿐입니다. 헌데 좌장군이시라면?”
“아, 내가 소개를 깜빡했군. 워낙에 이야기를 많이 들었더니 알고 있는 사이라 착각을 해버렸구나. 이곳 청해 대장군부의 좌장군인 영무결이라고 한다. 강호의 무부들에게는 굴불신마(屈佛神魔)라는 이름으로도 제법 알려져 있지.”
-굴불신마!! 과연 저만한 기도를 보여주려면 그 정도는 돼야지.
운호 역시 그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포달랍궁의 활불이라면 마교의 대제사장이나 달단의 살리답과 함께 중원을 위협하는 가장 강대한 대적이다. 그런 이를 패퇴시킨 이름이다.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하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누군지는 잘 알고 있는 것 같고. 나도 너를 잘 알고 있으니. 이 정도면 우리는 서로 잘 아는 사이라고 봐도 무방하겠군.”
-헛소리도 저렇게 뻔뻔하게 하니 뭔가 그럴싸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게요.’
영무결이 그 어처구니없는 헛소리를 이어갔다.
“자명이에게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검강(劍罡)을 사용했다고? 뭐, 이야기로만 들었을 때는 그 녀석과 마찬가지로 무언가 특별한 꼼수를 사용한 것인가 했었는데. 그게 아니로구나. 참으로 재밌는 몸이로다.”
“무슨 의미입니까?”
“너도 이미 잘 알 텐데.”
영무결이 씨익 웃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스르릉
운호의 등에서 검이 삐죽 솟구친다.
“호오, 이기어검? 아니, 아니군. 신검의 공능이로구나. 놀랍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검강도 그 검의 도움 덕분이었던 건가?”
“확인해보시겠습니까?”
운호가 정답을 움켜쥐었다.
“영리하구나. 하지만 무모하다. 내가 너를 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하는 이야기겠지만, 절대자의 변덕이란 봄날의 날씨처럼 종잡을 수 없는 법이지. 굳이 이런 사소한 것에까지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물론 그렇게 살아왔으니 고작 그 나이에 그만한 성취를 얻은 것이겠지만······. 그건 너무 빠르다.”
“빨라서 나쁠 건 없지요.”
“그래, 물론 그렇지. 그것이 정상적인 일이라면 말이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모르는 척하기는. 너도 이미 알고 있지 않더냐. 지금 네 그 성취. 자신의 목숨을 연료로 사용하여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마공이 어찌하여 마공인가.
도가나 불가의 정통 무공은 거대한 탑과도 같다. 넓고 두텁게 토대를 쌓고 천천히 쌓아 올린다. 속가의 무공 역시 조금 다르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탑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더 빨리 쌓아 올리는 것에 집착하여 대성이 힘들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마공은 다르다.
그것은 일종의 나무다. 씨앗과 토양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여기서 씨앗은 익힌 마공. 그리고 토양은 개개인의 자질도 자질이지만 거기에 사용되는 자원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자원은 보통 다른 사람의 목숨이다.
“그래도 스스로의 목숨으로 연마하고 있으니 마공이라고 하기에는 어렵구나. 게다가 익히고 있는 무공 자체는 전형적인 명문 정파의 무공이니. 하지만 그 몸. 그야말로 톡 치면 부러질 때까지 그저 날카롭고 또 날카롭게 연마되는 유리검과도 같다. 아마 이대로라면 세상에 베어내지 못하는 것이 없는 날카로운 날붙이가 되겠지만, 그 날카로움만큼 수명 역시 짧겠지.”
“······.”
“내가 궁금한 것은 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만한 재능이라면 느긋하게 단련하고 연마한다면 한 삼십 년쯤 지나면 지금 나 보다도 오히려 더 대성할지도 모르는데?”
이해했다.
지금 영무결이 말하는 것은 운호가 섭취하는 벽곡단. 강진의 사문에 내려온다는 비전에 그가 개량했다는 금단(金丹)이다.
강진은 운호의 몸이 금단에 매우 반응성이 좋다고 이야기했었다.
선골(仙骨)
또한, 당시 증무진인 목운평은 강진의 금단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보통 사람도 이백 년쯤 꾸준히 장복하면 선계에 오를 수 있다. 뭐, 체질이 받쳐주고 운이 따른다면 한 육십 년 정도? 다만 워낙에 몸이 안 좋은 성분도 많고 해서 그거 먹어가면서 육십 년이나 사는 놈 보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지.’
최근 마인과의 격전을 거치면서 상태가 이상할 정도로 괜찮다고 느끼기는 했었다. 연이은 격전에도 육체에는 피로감이 있었지만 적어도 기맥과 경맥. 기혈과 경혈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회복됐다.
운호는 그것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상황이 그런 것을 생각할만한 상황이 아니기도했다. 연이은 격전 속에서 몸이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은데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저 최근에 먹었던 자소단이 정말 품질이 좋은 녀석이라 약효가 좀 오래 간다. 정도로 생각했을 뿐이다.
“표정을 보니 정말 몰랐던 모양이로군. 뭐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됐다. 뭐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그만하도록 해라. 정 불안하다면 이 내가 확실하게 이야기해주마. 삼십 년. 뭐 어쩌면 조금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르긴 하겠다만, 어쨌거나 네가 내 나이쯤 됐을 때 너는 적어도 나에게 버금가는. 뭐 운이 좋다면 나보다 더 대단한 성취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
거만하다. 하지만 그 말은 영무결이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이었다.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까닭이 뭡니까?”
“뭐, 재능 있는 어린 녀석을 보니 아끼는 마음이 들었다?”
운호가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는 솔직히 거짓말이고. 알다시피 여긴 인재가 항상 부족해서 말이다. 자명이 그 녀석도 영 지지부진한데, 심지어 내 자식놈들은 자명이 놈만도 못하니. 쯧쯧. 재능있는 이는 그처럼 귀하다. 우리 청해 대장군부에 들어와라. 거듭 말하지만 삼십 년쯤 후에는 나의 후계자 자리도 진지하게 노려볼 수 있을 테니. 다행히 나에겐 너와 얼추 나이가 맞는 딸도 몇 있다. 제 어미들을 닮아 아주 미인들이지.”
삼십 년.
영무결의 이야기가 운호의 머릿속에 피떡이 되어 무너지던 남궁혜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운호가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가 않아서요.”
“흐음······. 왜지? 네 무공이라면 이미 또래 가운데는 당할 자가 없다. 게다가 수명을 조금 깎아 먹었다고 해도 이제 고작 열여덟. 지금 떵떵거리는 늙은이들이 죄다 나가떨어져도 이립이나 될까. 대체 뭐가 그리 급한 것이냐.”
“마교의 대제사장. 이제 십구 년이면 그가 다시 강호에 출두할 겁니다.”
“대제사장?”
영무결이 눈썹을 꿈틀 거렸다.
“확실히 소문은 들었다. 천무십칠성 가운데 여섯. 거기에 초절정의 고수 둘. 살아 남은 건 고작 둘이었다지? 하지만 분명 그 자리에는 대제사장뿐만 아니라 제사장들도 함께 왔다고 들었었는데. 그가 그렇게 위협적이더냐? 네 생명을 갈아 넣으면서까지 무공을 갈고 닦아야 할 만큼?”
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절정 고수 여섯이 합공을 했고, 그 과정에서 다섯이 죽었습니다. 파검 어른은 그를 상대하다 우화등선을 했고요. 그러고도 고작 이십 년. 신선의 경지로도 제거할 수 없었던 상대입니다.”
“우화등선이라······. 바로 곁에서 지켜본 사람까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그게 마냥 헛소문만은 아니었나 보군.”
영무결이 잠시 고민했다.
사실 그는 무한에서 있었던 혈사와 마교의 대제사장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강호의 무부들이 천무십칠성이니 뭐니 떠들기는 하지만, 그는 그와는 차원이 다른. 마교의 대제사장과 악명을 나란히 하던 포달랍궁의 활불을 패퇴시킨 인물이었으니까. 그저 강호의 뜬소문들이 그렇듯 크게 과장된 이야기겠거니 했었다.
하지만 고작 열여덟에 이만한 성취를 얻은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우화등선을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자신의 수명을 깎아서라도 빠르게 성취를 얻어야 한다고 한다.
어느정도 진지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굳이 재능있는 이의 수명을 깎을 필요가 뭐가 있느냐. 내가 도와주마.”
“도움이요?”
“그래, 마공을 익혀라. 이곳이라면 어차피 재료는 널려있다. 어차피 한인도 아닌 짐승만도 못한 장족의 목숨 아니더냐. 그것으로 네가 강해진다면 그 짐승만도 못한 것들도 태어난 보람을 느낄만한 일이겠지.”
-이놈도 미친놈이로구나.
운호가 일고의 가치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굳이 마공을 익히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쯧,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참으로 까다로운 녀석이로다.”
참으로 탐이 났다. 계속 거절만 하는 미운 놈이지만 이상하게 그 거절이 더해질수록 더 갖고 싶어진다.
그의 아비인 청해대장군 영보는 늙었다. 무공을 익힌 고수는 특히 경지에 오른 고수는 나이를 먹어도 기량의 퇴보가 매우 늦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성기에 비하자면 분명 기량은 퇴보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자신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후계에 대한 걱정은 항상 있었다. 호랑이의 자식들은 호랑이라는 말을 믿고 참으로 많은 아이를 낳았지만, 그 가운데 자신과 같은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래, 좋다.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