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신검(12)
-서걱
일곱의 늙은 마인 가운데 가장 오른쪽에 서 있던 마인은 그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웃는 모습 그대로 몸이 절반으로 갈려 나가는 데까지 촌각.
그 바로 옆에 있던 마인 역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서둘러 양손을 중앙으로 모으는 찰나. 마인의 몸을 가른 운호의 검이 그 모인 양손을 그대로 잘라냈다.
하지만 운호의 검은 아직 회수되지 않았다.
파죽지세.
양손이 잘린 마인을 두 번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대로 몸을 틀어 여전히 어버버하는 마인들에게 쇄도했다.
하지만 상대 역시 인급의 마존들이다.
중원의 단위로 따지자면 절정에 준하는 경지. 게 중에 가장 눈치 빠른 마인 하나가 반응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마인다운 반응이었다.
-허, 저 녀석이?
그 모습에 파검이 감탄했다.
-그래, 상대하기 힘들 것 같으면 도망가는 것도 좋은 선택이지.
세 번째와 네 번째의 판단은 조금 달랐다.
백열하는 칼날이 코앞까지 다가왔는데 등을 돌려 달아난다?
가능할 리가.
두 사람 모두 한순간에 힘을 뿜어냈다.
그리하여 자신이 펼쳐낼 수 있는 최고의 절초를!!
‘저 녀석이 저 놈의 발목을 잡은 직후에!!’
‘저 노괴가 잠깐이라도 버텨준다면!!’
정확하게 같은 생각.
그 선택이 두 사람의 목숨을 끊었다. 세월조차 가른다고 하여 광음검(光陰劍)이다. 자신의 비전 절초를 아낌없이 펼쳤다고 해도 살아남기 힘든 공격 앞에서 그것은 실로 멍청하기 짝이 없는 선택이었다.
일 검에 두 개의 목이 뎅겅 허공으로 떠올랐다.
다섯 번째.
노산(魯山)의 주인으로 개중에는 그래도 가장 강하다고 자부하던 마인이었다. 하류의 마인들 대부분이 익히는 불사계통의 저급한 마공이 아닌 건타(建陀)계통의 마공을 익힌 그가 양손을 휘둘렀다.
-우르릉. 마치 벼락과도 같은 굉음. 세 치 두께의 강철조차 박살 내는 절정의 수공으로 과거 공동의 복마검수의 모가지를 비틀었던 벽력수라는 수법이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검강(劍罡)이라 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사람의 힘이 아니다. 단순히 기운을 뭉쳐 그저 유사한 형태로 빗어낸 강기(剛氣)와는 차원이 다르다.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절대적인 힘.
-투두둑
물론 이전처럼 아무 느낌 없이 베어내지는 못했다. 검을 쥔 손아귀에 제법 거센 저항이 느껴졌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벼락과 같은 굉음을 내던 마인의 두 손부터 그의 어깨까지. 가로로 길게 잘려 나갔다.
그 모든 과정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촌각.
-털썩.
세 번째와 네 번째. 떠올랐던 머리통이 이제야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하여 마지막 여섯 번째.
그 압도적인 신위에 마인이 무릎을 꿇었다.
“사······, 살려 주시오. 살려만 준다면 내 뭐든지 다 하겠소.”
운호가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저 멀리서 달려온 누군가의 검이 운호의 답을 대신했다.
-서걱
인급에 올라선 마두치고는 너무나도 싱거운 최후였다.
“내가 놀러 오라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청해대장군부의 천인장인 벽안검귀 종자명. 사상의 일인인 청해대장군 영보의 막내 제자이자 얼마 전 동창의 꼬임에 넘어가 운호를 습격했다가 곧바로 칼을 바꿔 쥐었던 인물이었다.
운호가 남궁 세가를 들러 다시 북경으로 돌아갈 때, 그는 곧바로 청해 대장군부로 귀환했었다. 비록 커다란 사고를 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동창에게 빚을 지웠던 만큼 딱히 별다른 문책은 없을 것이라 했었는데, 이렇게 멀쩡히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그 말대로인 듯싶었다.
“여긴 어떻게?”
“네가 보낸 녀석을 만났다. 사형이 정해준 범위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읏쌰!! 뭐 그래도 이만한 수확이라면 사형도 별말은 하지 않겠지.”
종자명이 묵직한 비검을 뽑아 양손을 잃어버린 채 슬금슬금 멀어지는 마인의 뒷통수를 정확하게 -푸욱 꽂아 넣었다.
“그건 그렇고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군. 내 눈으로 봤는데도 믿기 힘들어. 방금 그거 검강 맞나?”
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보통이 아니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검강이라니······.”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빠져나간 자들이 있습니다.”
“그건 안 그래도 내 부하들이 처리할테니 걱정하지 마라. 인급의 마두 하나 정도야 별 피해 없이 충분히 요리 가능하니까.”
“하나가 아닙니다. 인급도 아니고요.”
“뭐라고?”
종자명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말의 맥락을 따져봤을 때 인급이 아니라는 말이 설마 그 미만이라는 말일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지급의 마존이라는 뜻인데, 지급의 마존이라면 종자명 본인과 그 직속 부대가 모조리 달라붙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적이다.
“자신을 내열비당의 부당주 광비검 병조량이라고 하더군요.”
“광비검 병조량?”
“누군지 아십니까?”
“아니, 처음 듣는 이름이로군. 하지만 대장군부에는 이런 것들을 따로 기록해두는 곳이 있으니 아마 찾을 수 있을거다. 어쨌거나 마교의 부당주라면 지급의 마존이 확실하겠군.”
“네, 마치 아량이라도 베푸는 것처럼 굴고 물러났는데, 아무래도 장군이 오는 걸 눈치채고 그런 것 같습니다.”
운호가 새삼 그 마인과 자신의 차이를 실감했다.
광비검이라는 마인은 자신과 한참 격전을 벌이던 와중에 종자명의 접근을 눈치챘다. 그 격전의 와중에도 주변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뜻이다.
심지어 운호는 그 마인이 한참을 떠들고 물러날 때까지도 종자명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종자명의 접근을 눈치챈 것은 광음검을 준비하던 순간에서였다.
물론 이번에 얻은 깨달음이 적지 않으니 그것을 잘 수습한다면 그 차이는 확연하게 줄어들 것이다. 운호의 가장 큰 문제점인 내공 부분도 총량은 여전히 크게 부족하지만, 한순간의 출력만큼은 포원공이 삼단공에 올라서며 어느 정도 해결됐으니 검을 맞댄다면 오히려 압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긴······. 눈치가 있는 마인이라면 감히 대장군부 근처에서 오래 싸울 수는 없겠지. 지급의 마존 정도 되면 대사형이 직접 나설 수도 있으니 말이야. 아니, 그보다 검강 이야기나 더 해보자. 설마 경지에 오른 건가?”
종자명의 그 말에 파검이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하하하
“아뇨. 아직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 검강은······.”
운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허어······. 운, 운으로 검강을 썼다라······.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이지만. 열여덟에 검강을 썼다는 이야기 쪽이 훨씬 어처구니가 없으니 뭐라 말하기도 그렇군.”
종자명이 쓰게 웃었다.
종자명 본인도 천살을 이뤄 그 자신도 검강과 유사한 것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검강이 얼마나 드높은 경지인지. 그것이 어찌하여 초절정 고수의 상징과도 같은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장군!!”
저 멀리 종자명의 부하들이 가장 빠르게 도망쳤던 마인의 목을 들고 다가왔다. 총 서른여섯. 그 가운데 하나는 절정. 나머지는 모두 일류다. 하지만 일류라고 해도 얼마 전 지나왔던 쾌찬문의 문주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단순한 무공의 높이 문제가 아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창칼을 휘두를 것처럼 잘 짜여진 몸. 그리고 진법의 일종일까? 밟고 선 위치 또한 범상치 않다. 게다가 하나하나의 장비 역시 무림인과는 다르다.
“잘왔습니다. 얼른 여기 정리 하고 돌아가죠. 아, 그리고 이쪽은 내가 몇 번 말했던 그 소신검 백운호입니다.”
“아, 그 화산파의!! 반갑습니다. 전 대장군부의 오백인장 번오라고 합니다. 여기 종장군의 부관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서른여섯의 병사 가운데 유일하게 절정의 경지로 보이던 늙은 병사가 먼저 운호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부탁드립니다. 화산파의 백운호라고 합니다.”
번오가 병사들을 지휘하여 현장을 정리했다.
“어? 이 마인은 노산귀마 아닙니까?”
“노산귀마? 십칠 년 전에 공동파의 복마검수 모가지를 따서 추살령에 이름 올렸던 그 노산귀마?”
“맞는 것 같은데요. 여기 볼에 사마귀랑 복부에 검상.”
“여기 이 녀석도 벽악산의 흑혈마인데요?”
운호에게 순식간에 당해버리기는 했지만 각자가 사십 년에서 오십 년 가깝게 악명을 떨치던 마두들이다. 현장을 정리하던 병사들이 그곳에 쓰러진 여섯의 마두 가운데 몇몇을 알아보았다.
“잠깐만. 그러면 설마 여기 있는 놈들 전부다 인급의 마존들인거야?”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인급의 마존 일곱을 상대로 여섯을 베고 하나는 도망을 쳤다고?”
“근데 맞는 것 같은데?”
“이거 그러면 우리 여기까지 뭐 빠지게 뛰어올 필요 없던 거 아니야?”
병사들의 수군거림이 커졌다.
“자자, 반각 준다. 주변 정리 빠르게 끝내고. 마두놈들은 모가지만 따서 챙겨라. 소지품은 혹시라도 빼돌릴 생각 하지 말고.”
* * *
대장군부로 가는 길목.
나무 그루터기에 조유가 앉아 있었다.
종자명을 비롯한 병사들을 만났을 때 그는 이미 더는 달릴 수 없을 만큼 탈진한 상태였다. 종자명은 몇몇 병사들에게 그의 호위를 맡기려 했지만 조유 본인이 그것을 거절했다. 지금 더 위험한 것은 운호라고.
그리고 종자명 역시 조유의 그 말을 받아들였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듣자 하니 종장군과 청해 대장군부의 병사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다 끝내버렸다고 하던데.”
조유에게 그리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그저 그가 있어봤자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고 그러니 지원이라도 요청하는 것이 가능성을 더 높일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조유는 저 불퉁한 말투와는 달리 생각보다 훨씬 신의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거의 탈진할 지경이 될 때까지 달렸고, 그 끝에서 간신히 종자명을 만나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고 했다. 물론 조유의 입에서 백운호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바짓가랑이를 잡았더라도 종자명이 달려오지는 않았겠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종자명을 만난 것 자체가 조유의 노력 덕분이었다.
“아닙니다. 아주 큰 도움이 됐습니다.”
“흥,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고맙군. 뭐, 나도 이번 기회에 참으로 많은 걸 느꼈어.”
과거의 그 일 이후.
조유는 최선을 다하여 무공을 수련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라면 절정의 경지에 올라 쾌찬문의 전성기를 열어젖힐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며칠. 운호를 보면서 느꼈다. 그의 최선은 진정한 최선이 아니었다는 것을.
운호는 분명 조유가 지금껏 만났던 사람 가운데 가장 무공에 재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고작 열여덟에 절정에 이른 것은 그 놀라운 재능 때문만은 아니었다.
운호는 인간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인 식사를 제한했다. 또한 연이어 마인들을 상대하는 생사의 갈림길조차도 그에게는 무공 수련의 과정이었다. 생명보다도 무공의 상승이 더 우선이다.
“뭐, 나도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네?”
“아니, 아닐세. 그래, 그러면 이대로 저들을 따라 대장군부로 가면 되겠군.”
“안 가실 겁니까?”
“나야 뭐······. 애초에 길 안내가 목적이었으니 이제 가문으로 돌아가야지.”
조유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찌 안 그럴까. 장차 무림에 전설로 남을지 모르는 열여덟 살 절정 고수의 곁을 떠나 시골 문파의 소문주로 돌아가는 것인데.
운호가 인사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여기서 돌아가야 했다. 며칠 동안 경험하지 않았던가. 저 어린 고수는 저 터무니없는 실력에 걸맞은 천명을 안고 살아간다. 자신과 같은 범인이 감히 낄 자리가 아니다.
조유가 진심을 담아 운호에게 포권했다.
“백 소협. 부디 무운을.”
* * *
“호오, 검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