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신검(11)
운호가 익힌 포원공(抱元功)은 느린 공부였다.
아주 오래 전, 천축의 달마가 내가 진기의 운용법을 갖고 중원에 도착한 이래, 중원의 무공은 눈부시게 발전해왔다. 그리고 그 발전의 형태는 어떻게 하면 더 ‘빠르게’ 더 ‘많은’ 진기를 모을 수 있느냐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포원공은 분명 시대에 뒤떨어진 공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공야찬은 운호에게 포원공을 전수했다.
또한 운호가 익히는 무공에 관하여는 이래저래 많이 상관하던 증무진인 역시 운호가 포원공을 익힌 것에 아무런 트집을 잡지 않았다.
공야찬은 어찌하여 운호에게 포원공을 전수하였는가.
사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공야찬의 사부가 그에게 익히라 권유했던 무공이 포원공이었고, 그렇기에 공야찬은 검종의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포원공이 가장 최적이라 알고 있었다.
공야찬의 재능은 수재의 영역에는 걸쳐 있었으나 그 가운데서도 특출난다고 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공야찬의 사부였던 굉무자 주벽양은 달랐다.
현재 화산파의 굉자배는 화산이라는 명성에 비해 그 무공의 수준이 부족하다. 물론 절정 고수의 숫자는 적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초절정 고수는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라 해도, 그들의 나이가 이제 슬슬 예순을 넘어 일흔을 향해 가는 상황에서 초절정 고수가 하나도 나오지 못했다는 것은 그리 썩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만약 굉무가 살아있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강호에 불혹을 넘긴 고수라면 대부분 그 말에 동의할 것이다.
현재 굉자배 최고의 고수로 꼽히는 굉명이나 굉원도 그 성취는 감히 굉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 천재가 선택한 무공이 바로 포원공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수백 년 전.
모두가 축기의 속도를 고민할 때, 같은 양의 기운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고민하던 사람이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결국 무공이란 인간을 초월하기 위한 길이다. 목표가 아닌 길에 노력을 투자하는 어리석음이라니.
그리고 포원공은 그 어리석음의 결과물이었다.
진기의 총량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빠르게 회전하던 운호의 진기가 임계점을 넘어서던 바로 그 순간.
진기의 성질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극적인 변화였다. 빙점이 생기기 전의 물은 그저 물일 뿐이다. 빙점이 생기는 것은 그야말로 한 순간. 하지만 물이 그 빙점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시간이 필요했을까.
운호의 진기 역시 이와 같았다. 변화는 순식간에 이뤄졌다. 이전까지는 별다른 징조를 보이지 않던 그것이 일순간에 돌변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운호를 상대하던 광비검이었다.
크게 휘두른 일검을 놀라운 기예로 파훼하는 것까지는 그저 이전에 보여주던 모습의 연장이었다. 매우 까다롭지만 그래도 힘의 총량으로 밀어붙이면 어찌 됐건 패배는 염두에 두지 않아도 괜찮다. 결국 승리하는 것은 병조량 자신이 될 것이다. 운호와 광비검 병조량 사이에는 그만한 격차가 존재했다.
하지만 그 직후.
그의 가슴을 향해 쇄도하는 일 검에서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졌다.
‘깨달음?’
가끔 그런 일들이 있다.
치열한 싸움 중에 고민하던 화두를 넘어 무언가 깨달음을 얻는 일. 흔한 일은 아니지만, 무림인의 숫자는 수십 만이고 그들이 매일 하는 일이 칼을 맞대는 일이니 아주 희귀한 일도 아니다.
광비검 역시 그런 깨달음을 얻었네. 하는 인간들을 썰어본 경험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무언가를 깨달았다면 그것을 수련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는 과정이 필요하다. 개념을 깨우쳤다고 그것을 바로 실전에 능숙하게 활용한다면 세상에 무공수련이 대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 운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마치 한순간에 계단을 뛰어넘은 것 같은 기세.
그 기세를 앞에 둔 병조량이 판단했다.
좋지 않다!!
이성이 아니었다.
본능.
병조량이 전신의 마기를 폭발시키며 뒤로 크게 물러났다.
-콰과과과과과광!!
어마어마한 충격량.
그의 예감처럼 운호의 검에 실린 경력은 지금까지 그가 보여줬던 것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전력을 다하면 강기(罡氣)까지 형성하는 마기다. 비록 집중된 기운이 아니었다지만 쉽게 볼 수 없는 그것을 운호의 검은 마치 무 베듯 자르고 들어와 병조량의 가슴팍에 커다란 자상을 만들어냈다.
한순간 폭발하듯 솟구치던 운호의 기세가 잠잠해졌다.
지친 것일까?
병조량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물론 여전히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이길 수 있다. 저 불가사의한 기교에 일순간의 출력이 더해진다고 해도 힘의 총량 자체는 여전히 자신이 압도적이다.
다만······.
“드디어 지친 건가?”
“제법 잘 버틴다 싶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지마를 상대로는······.”
“그래도 저 어린 나이에 절정. 게다가 절정이 지마를 상대로 저만큼이나 버틴 걸 보면 그 가능성이 과연 갑급 명단에 오를만한 것 같긴 하외다.”
저 뒤의 늙은이들이 호시탐탐 눈을 빛내고 있었고 무엇보다······.
병조량이 운호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나에게 피를 보게 하다니 제법이로구나.”
“더 제법인 걸 구경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가?”
“네가? 큭큭큭, 아서라. 아직 멀었다. 하지만 그래도 미래가 제법 기대가 되긴 하는구나. 아무래도 오늘 꺾어버리기에는 영 기분이 내키지 않는구나. 내 조만간 다시 한번 찾아오겠다. 그때까지 그 목 위의 것 잘 간수하고 있도록 해라.”
이해할 수 없는 말.
-저건 또 무슨 개수작이지? 운호야 방심은 금물이다.
파검이 경고했다.
그 역시 운호의 진기가 변한 것을 느꼈다. 하지만 상대는 마교에서도 흔치 않은 지급의 마존이다. 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경고가 무색하게 병조량이 정말로 몸을 훌쩍 날렸다. 그를 따라온 마인들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늙은 마인들이 크게 당황했다. 너무 노골적으로 어부지리를 노려서인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도요새가 조개를 잡지 않고 그냥 날아 오르다니. 심지어 멀쩡한 상태라면 어부조차 잡아먹을 수 있을만큼 커다랗고 흉폭한 도요새가.
“정말 간 건가?”
“그런 것 같은데?”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군. 마기가 점점 멀어지고 있어.”
그리고 운호 역시 그것을 명확하게 느꼈다.
도요새가 어부 좋은 일을 해주는 대신, 어부와 조개가 다투는 사이 이득을 취하겠다는 생각인걸까? 아니면 마인의 종잡을 수 없는 정신상태로 정말 그냥 물러난 것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날개 달린 도요새야 어부를 피해 훌쩍 피할 수 있다지만 조개는 그럴 수 없다는 점. 그렇기에 운호는 저 일곱의 늙은 마인들을 상대로 한바탕 칼춤을 춰야만 한다는 점이었다.
-후우.
그렇기에 늙은 마인들이 당황하는 사이.
운호는 스스로의 내부를 가다듬었다.
삼단공.
확실하다.
이것은 포원공의 삼단공이었다. 실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성취다. 그가 포원공의 이단공에 오른 것은 불과 일 년전. 입문 이후 이단공에 오르기까지 근 4년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통상적으로 상승의 경지로 갈수록 그 경지를 높이기 위해서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실제로 운호에게 포원공을 전수한 공야찬조차도 30년에 가까운 긴 수련 기간에도 불구하고 아직 포원공의 삼단공에 머무를 뿐이다.
이전보다 무겁고 빡빡한 기운이 경맥을 타고 움직인다.
이전에 포원공이 일단공에서 이단공으로 올라갈 때, 마치 수증기가 물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그 이상이다. 그 끈적함이 마치 밀납과 같다. 기운의 수발이 이전보다 어려워졌다. 하지만 한 번에 몰아치는 힘의 크기는 비교할 수 없이 막대하다.
마두들은 여전히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운호가 정답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좋구나.
정답의 무게 자체는 이미 박살난 남궁철의 선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껏해야 다섯 냥 정도쯤 차이 날까. 다만 그 특유의 무게중심 덕분에 느껴지는 무게는 거의 두 배에 가깝다.
기본적으로 검은 찌르기와 베기를 모두 사용한다. 특히나 운호의 검술은 기예에 가깝다. 그 어마어마한 기교를 모두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검이 더 편리하다.
하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다.
광음검.
그 세월을 베어내는 쾌속의 참격 만큼은 이 도끼와 같은 무게 균형을 가진 기형검이 어울린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증무진인이 보여줬던 것처럼 궁극에 이르러 개념까지 파괴하는 경지는 아니다. 그만한 의념을 갖기 위해서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끈적하기 짝이 없는 기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총량은 같되 밀도는 다르다. 운호의 마음이 그 진기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됐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구름과 같은 기운은 그 순환조차 구름과 같다. 하지만 이토록 뚜렷하게 무게감을 가진 기운은 그 순환 역시 뚜렷한 무게감을 갖는다.
몰아치는 기운이 그 스스로의 속도에 속도를 더한다. 운호의 의념은 이제 그 속도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것을 제어하는 데 집중된다.
그 와중에도 운호의 기세는 여전히 고요했다.
마공이었다면, 아니 설사 정파의 무공이더라도 조금 더 발전적인 형태의 무공이었다면 이토록 거대한 힘이 이토록 고요하게 흐르지 못했을 것이다.
“뭐가 어찌 됐건 어차피 우리는 저 어린 놈의 모가지를 따가긴 따가야해. 여기까지 와서 공을 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하지만 괜히 그러다가 그 괴물에게 습격이라도 받는다면······.”
“그거야 우리끼리 똘똘 뭉쳐야겠지. 뭐, 마지막의 마지막이야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에이, 아주 골치 아프군. 고민은 그냥 나중에 하고 저 어린놈 모가지부터 따고 보세나. 저 어린놈 저기서 숨죽이고 호흡 고르는 꼴을 보니 상태도 정상이 아닌 것 같군.”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시선이 운호에게 향하던 바로 그 순간.
-번쩍.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가 풀려나는 것처럼.
운호의 몸속을 끊임없이 순환하던 포원공의 기운이 일순간에 폭발했다.
-좋구나!!
그 속도가.
그 위력이.
그 방향성이.
파검이 그 모든 것에 흡족하게 웃었다. 운호는 뛰어난 검사였지만 생각이 너무 많았다. 그렇기에 그의 검은 너무 번잡스럽다. 반면 이 일 검은 딱 그의 취향이다.
그렇기에 휘둘러지는 검의 마음이 휘두르는 운호의 마음과 일치했다.
그리하여 한계를 넘어선 기운이 검극을 타고 흐른다.
사람의 의념일까? 아니면 인간계를 떠나 저 높은 차원으로 떠나간 영혼이 남긴 흔적의 의념일까?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폭발하는 기운이 강력한 마음으로 제어된다.
그리하여 사람의 몸을 넘어, 몸과 하나 된 검을 넘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는 기운조차 그 의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늘은 그것을 인세에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의 기운을 휘두르는 인간의 굳은 마음은 하늘이 정한 법칙을 넘어 저 하늘 위에 반짝이는 별의 힘을 자신의 검에 담았다.
검강(劍罡)
마침내 운호의 검이 자연의 이치를 넘어서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