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신검(4)
“정말이네요······.”
종염이 놀란 표정으로 운호를 돌아봤다.
“대단하십니다. 어찌 그 먼 곳에서 사람의 기척을······. 역시 절정의 고수는 초인이라더니. 명불허전입니다.”
확실히 절정 고수를 볼 일이 드물다 보니 이런 재주조차도 매우 신기하게 여겨지는 듯 싶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종염의 놀람은 조금 과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원체 감정 표현이 풍부한 사람이라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별 것 아닙니다. 그보다 혹시 아는 분들입니까?”
운호의 질문에 조유가 대신 삐딱하게 답했다.
“왜? 이런 촌구석은 마을 몇 개 건넌 사람들끼리도 안면이 익고 막 그럴 것 같은가?”-하여간 저 녀석은 이상한 지점에서 항상 꼬투리를 잡는단 말이지.
운호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냥 마을 사람이라면 힘들겠지만 이렇게 길을 오가는 사람이라면 또 모르는 일이지요. 게다가 지금까지 이 마을 저 마을 종 무사님이 인사를 건넨 사람의 숫자가 적지 않았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물어 본 겁니다.”
운호의 말에 종염이 눈가를 찌푸려가며 저 멀리 보이는 사람들을 자세히 훑었다.
“아, 저거 황가촌 이장댁에 형제들 같은데요?”
“황가촌이면?”
“관도 근처에 있는 마을은 아니고, 살짝 산 안쪽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입니다. 약초꾼 마을이죠. 뭐, 좋은 약초라도 캐서 팔러 나온 게 아닐까요?”
“약초꾼이라고요? 무공을 익힌 것 같은데요?”
“그야 아무래도 워낙에 외지다 보니. 무공을 익히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는 환경이지요. 실제로 황가촌의 황이장님 같은 경우는 저도 만만하게 보기 힘든 고수입니다. 아하하, 물론 소협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니겠지만, 이래 봬도 저도 인근에서는 제법 알아줍니다.”
어느새 쉼터의 사람들이 가까워졌다.
형제라는 종염의 이야기처럼 제법 닮은 두 사내였다. 나이는 이제 서른 중후반 즈음? 산을 타는 심마니치고는 체격이 상당했다.
“오, 이게 누군가. 쾌찬문의 종대협 아니십니까.”
“에헤이, 사람들이. 나 같은 졸자에게 대협은 무슨. 여기 내가 진짜 협객들을 소개해줄 테니 영광으로 생각하게나. 이분은 우리 쾌찬문의 소문주이신 조유 대협. 그리고 이쪽은 화산파의 소신검 백운호 소협이네. 황가촌의 황씨형제입니다.”
“아이고!! 정말 귀한 분들이셨군요. 어서 이쪽으로 앉으시죠. 저는 황일. 이쪽은 제 동생 황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뭐 그래 봐야 판자 몇 개 세워둔 길바닥이었지만, 그래도 불에 가까운 자리라 그런지 훈기가 제법 돌았다.
“헌데 자네들은 어쩐 일로 이렇게 나온 건가?”
“어휴, 어쩐 일은요. 저기 벽양현에 상단이 올 시기 아닙니까. 모아둔 약초를 팔아서 식량도 좀 사고 그럴 생각으로 내려왔지요.”
“그렇군.”
“헌데 종대협이야말로 정말 어쩐 일이십니까? 소문주님에 화산파의 협객님까지 모시고. 혹시 또 그 서장의 사악한 마귀들이 침공을 시작한 겁니까?”
서장 라마들을 사악한 마귀라 칭하는 그들의 얼굴에 강한 경멸이 감돌았다.
종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네. 그저 여기 이 백 소협이 대장군부에 볼 일이 있어, 길을 안내하던 중이었네.”
운호가 물었다.
“서장 라마들의 횡포가 심한 모양입니다?”
“어휴, 그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지요. 게다가 라마 놈들만이 아닙니다. 장족 놈들도 이 땅이 본래 자신의 땅이라며 악착같이 달려드는데, 라마들이야 곤륜과 공동. 대장군부에서 막아주신다지만, 장족 놈들은 그것도 아니니까요.”
“어째서입니까?”
조유가 코웃음을 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흥, 상식이 부족하군. 하긴 무공에만 전념을 했으니 지금의 그 무공을 얻을 수 있었겠지.”
“아니, 꼭 그게 상식이라고 하기엔······.”
“비록 서장의 땅이 척박하다고는 하지만 제국에서 국경으로 삼고 있는 청해성 영토의 네 배에 달한다. 감숙성의 병력까지 끌어온다고 해도 라마 놈들을 막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 일이야. 그러니 저 높은 곳의 분들은 높은 곳의 분들끼리. 바닥을 기는 우리들은 우리들끼리 싸우는 것이지.”
“그렇군요. 헌데 그렇게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장족이 왜 굳이 청해성을 치려고 하는 겁니까? 그렇게 번번이 패배해서 쫒겨나면서요.”
“글쎄, 그건 나도 그들에게 묻고 싶군. 물론 그들이야 이 땅이 본래 자신들의 땅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지만, 그게 벌써 천 년 전 일이야. 전조도 아니고 그 전도 아니고, 무려 전전전전대의 왕조에서 개척을 했던 땅이라는 이야기지.”
천 년.
실로 까마득하다.
현재 화산의 기틀을 세웠던 진단노조(陳摶老祖) 진희이 선생이 오백 년 전 인물이다. 그 두배에 달하는 세월이라는 뜻이다.
“자자, 머리 아픈 이야기들은 그만 하시고. 이거 한잔들 어떠십니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저희가 대접하겠습니다.”
황씨 형제가 호리병을 하나 살랑살랑 흔들었다. 은은하게 알싸한 향이 풍겨오는 것이 약초꾼이라고 하더니 약초를 넣고 숙성시킨 약주인 듯 싶었다.
운호가 고개 저으며 거절하려는 찰나. 종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여기 백 소협은 수행 때문에 곡기를 완전히 끊으셔서 말이지. 물과 벽곡단 말고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으신다네. 그야말로 인세의 신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 그래?”
사람이 벽곡단과 물만 먹고 살아간다는 이야기가 그토록 놀라웠던 탓일까? 황씨 형제의 얼굴에 당혹감이 엿보였다.
“나도 여행 중에 음주는 그리 내키지 않는군.”
조유가 냉막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잠시 쭈뻣거리던 두 사람이 다시 표정을 풀고 말했다.
“참으로 아쉽군요. 몸에 좋은 약주인데 말입니다.”
“허허허, 뭘 아쉬워하고 그러나. 여기 술이라면 말로 들이 부어도 멀쩡한 입이 하나 떡 하니 있는데 말이야.”
“종염.”
조유가 고개를 저었다.
종염이 아쉬운 표정으로 쩝쩝 입맛을 다셨다.
“이런, 아쉽군요. 하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그냥 넘기기는 섭섭하지요. 술이 조금 그러시다면 차는 어떻습니까? 아, 혹시 차도 못 드시는 겁니까? 좋은 약초로 내린 차인데요.”
“성의는 감사합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운호가 거듭 사양했다.
그들이 한 번 더 권했다. 하지만 운호가 그 권유를 거절했다.
“싫다는 사람 붙잡고 그러지 말고 그 차 나에게나 주게. 술이라면 몰라도 차라면야.”
“여기 있습니다.”
-쪼르륵
맑은 찻물.
조금 전 주향과 비슷한 향기가 확 퍼져 나왔다.
황일이 물었다.
“어떻게 종대협도 한 잔?”
“에이, 난 됐네. 쩝, 술도 아니고. 괜히 그거 마셔봐야 술 생각만 더 나지.”
“흐흐, 그건 그렇지요.”
종염이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조유가 찻잔을 받아들었다.
파검이 물었다.
-설마 지금 움직이려고?
‘왜요?’
-아니, 뭐가 됐건 저 자식 영 재수 없는 건 사실인데. 이왕이면 그냥 내버려 뒀다가 움직이는 건 어떠냐?
‘정파의 협객이 어찌 그러겠습니까.’
-하여간, 내가 그래서 협객 같은 거 싫어한다니까.
운호의 생각이 움직였다.
-쨍그랑!!
자리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귀, 귀신?”
종염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귀신이라······.
뭐 어떻게 보면 그럴 수도 있다. 가만히 있던 검이 스스로 날아올라 입가까지 가져간 찻잔을 날려버리는 일은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심지어 그렇게 날아오른 검이 그 자리에 둥둥 떠 있는 광경은 귀신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조유의 눈썹이 꿈틀했다.
“백 소협. 이게 무슨 짓이요. 호의를 원한으로 갚겠다. 뭐 그런 이야기요? 중원의 명문은 모두 다 이런 식인가?”
“네? 백 소협이라고요?”
황일과 황이가 대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부웅!!
조유를 향해 둥둥 떠 있던 검이 순식간에 황씨 형제에게 날아들었다.
기습적인 공격.
그 이해할 수 없는 공격에 조유가 소리쳤다.
“백소협!!!”
“마인입니다.”
“마인?”
-쾅!!!
대답은 필요 없었다.
운호의 검을 막아낸 황일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마기가 솟구쳤다. 하지만 기습이 통하긴 통했다. 운호의 검을 막아낸 댓가로 그의 왼팔이 절반쯤 잘려 나가 핏물이 흥건했다.
“어떻게 알았지?”
“약초꾼이라기에는 몸이 과했지. 게다가 그 약주며 약차 한 병이면 거기 뒤에 싸짊어지고 온 약초 전부의 가격에 필적하는데. 그걸 의심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지. 무엇보다 강한 향으로 독을 숨기는 수법은 너무 식상해서 이제는 동네 양아치들도 안 써먹는 수법 아닌가.”
“크윽.”
-그냥 처음부터 마기 냄새 맡고 알아챘으면서. 허세는.
‘이렇게 해둬야 앞으로 또 이런 멍청한 접근을 할 것 아닙니까.’
종염이 대경실색했다.
“아니!! 황씨 형제가 마인이었다고요? 그렇다면 설마 황가촌의 사람들이 전부 마인이라는 말입니까?”
“후······.”
운호의 한숨에 종염이 혀를 차고는 빠르게 황씨 형제 쪽으로 물러났다.
“빌어먹을. 내가 이래서 제대로 첩자 교육 안 받은 놈들과는 일을 같이 하기 싫었거늘.”
“젠장, 우리가 이래서 그냥 이런 귀찮은 짓 하지 말고 때려잡자고 그랬잖아. 기껏해야 절정 하나에 일류 하나인데. 뭐가 무서워서.”
“멍청한!! 절정에도 급이라는 게 있다고. 저 녀석은 인급을 넘어 거의 지급에 다다른 녀석이야.”
“흥, 고작 약관도 안 된 녀석이 지급이라니. 그야말로 개가 웃을 소리로군.”
황일이 코웃음을 쳤다.
절반쯤 잘려 나갔던 그의 왼팔은 어느새 꾸물꾸물 붙어나가고 있다.
운호가 황일의 왼팔을 가르고 돌아온 자신의 검을 움켜쥐었다.
시간을 줄 필요가 없다.
“보호해줄 여력은 없으니 자기 몸은 알아서 지키도록 하십쇼.”
조유가 뭐라 떠들려는 찰나.
운호의 몸이 빠르게 쏘아졌다.
마인들의 수준은 낮지 않았다.
그들 하나하나가 5년 전, 운호가 서안부에서 마주쳤던 마인들에게 필적한다. 당시 운호는 그 마인을 상대로 그저 버티기에 급급할 뿐이었다. 아마 공야찬이 아니었다면 운호의 명줄도 거기서 끝나지 않았었을까?
생각이 일어나니 몸이 움직였고 그 몸을 따라 기운이 약동한다.
그렇기에 굳이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심기체의 합일이 자연스럽다.
남궁철이 내어준 명검이 공기를 갈랐다.
황일은 그 서슬 퍼런 기색을 감히 경시하지 못했다. 그가 서둘러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부족하다. 운호의 검이 마치 그가 맞서지 않고 피할 것을 예측했다는 것처럼 쑤욱 밀고 들어온다.
어느새 손에 강철 수투를 낀 황이가 운호의 빈틈을 노렸다. 굳이 형제를 구하기보다는 형제가 어디 하나 상하더라도 그저 운호를 잡겠다는 의도. 과연 마인다운 심성이다.
그렇기에 그 역시 뻔했다.
쥐고 있던 검에 진기를 실어 그대로 쏘아 보냈다.
조금 전, 독잔을 들이키던 조유를 구한 이기어검의 한 수.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운호가 달려가던 기세 그대로 자신의 몸을 작게 숙였다.
-우우웅
어느새 검을 내던진 오른손이 등 뒤의 또다른 검을 움켜쥐었다.
저 먼 구라파에서 건너 온 전설의 신검.
‘정답’이 황이의 몸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