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신검(3)
쾌찬문의 문주 조창벽은 소문주인 조유와는 달리 후덕한 인상의 호인이었다.
“실로 놀랍군. 이제 고작 열여덟에 절정이라니. 우리 쾌찬문도 고조부이신 단심쾌도협께서 절정의 고수셨었지. 부끄럽게도 이후로 절정의 고수를 배출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하, 나도 이래뵈도 젊을 때는 절정을 노릴만한 재능 소리를 꽤나 들었는데.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어······.”
“그러시군요.”
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본인의 이야기처럼 그도 어쩌면 젊었을 적에는 절정을 노릴만한 무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육순이 넘긴 지금에 와서는 그것도 모두 옛말에 불과했다. 느껴지는 무공 수위는 간신히 일류 언저리. 하지만 그것도 저 툭 튀어나온 배를 생각하면 실전에서는 그것에 한참 못 미치는 실력을 보여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여기 내 아들은 다르다네. 보면 알겠지만, 실력이 아주 대단해. 여기 공조현뿐만 아니라 감덕부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재능이야. 아마 대장군부, 아니 중원 어디를 가더라도 뒤지지 않는 재능일걸세. 어쩌면 우리 쾌찬문에서도 150년 만에 절정 고수가 다시 나올지 모를 일이지. 하하하하하.”
“과찬이십니다. 아버지.”
조창벽이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정작 칭찬을 듣는 조유의 표정에는 미동조차 없다. 조유가 운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보다 백 소협. 어찌하여 음식에 손도 대지 않으시는지? 워낙에 변방의 박주산채(薄酒山菜)인지라 입에 맞지 않아 그러신 건가 염려가 되는군요.”
“아, 아닙니다. 박주산채라니요. 실로 훌륭한 대접입니다. 그저 최근 제가 수련 때문에 벽곡단 외에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탓입니다. 경황이 없어 제가 미리 말씀을 못 드렸군요.”
“저런, 제가 듣기로는 도가나 불가의 문파도 아직 자라나야 하는 어린 아이에게는 화식은 물론이거니와 육식까지 허락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죄송합니다. 소협이 어린 아이라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흐음, 이 녀석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지금이라도 박차고 일어나는 건 어떠냐? 어차피 여기 모인 잡졸들쯤이야 별 것도 아닌데.
‘매일 그러고 다니셨으니 사파 소리를 들으신 겁니다. 그리고 저쪽도 애써 준비한 음식을 손도 대지 않으니 마음이 상할 만하지요. 미리 말하지 않은 제 실수입니다.’
-정파라고 뭐 특별히 다른 줄 아느냐? 게다가 저 자식은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트집을 잡고 싶어 죽겠다는 눈치구만 뭐.
운호가 파검의 말을 무시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신 부분이 맞습니다. 게다가 화산의 경우는 도가 가운데서도 관윤자이후 진단노조의 도통을 계승한지라 특별히 화식이나 육식을 금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것은 제 개인적인 수련입니다.”
조유의 시선이 운호를 훑었다.
“아직 성장도 다 끝나지 않으신 듯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 절정의 고수에게 주제 넘는 말이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검조차 예를 차리는 중원의 무림과 달리 한치 칼끝에 목숨이 오가는 변방 사람이다 보니 팔이 한치 길어지면 얼마나 더 유리해지는지 너무 절실하게 와닿아서요.”
-봐라. 저거 그냥 시비 거는 거라니까? 그냥 여기서는 멋지게 칼을 쫙 뽑아 들고 한치 짧은 팔이 얼마나 빠른지 한 번 보시겠소? 이런 말을 해줘야!!
운호가 고개를 저었다.
“중원 무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그저 우선순위의 문제일 뿐입니다. 팔이 한 치 길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거든요. 무엇보다 제가 워낙 어려 보여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이제 와 고기를 조금 더 먹는다고 팔이 한 치씩 길어질 수는 없는 나이라서요.”
-꿈틀
조유가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물론 식사 자리. 칼을 차고 오진 않았다. 그저 그것을 잊을 만큼 운호의 기세가 위압적이었다는 뜻이다.
분노일까? 아니면 그저 상대가 슬쩍 흘린 기세에 깜짝 놀란 것에 대한 부끄러움일까.
조유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감히?’
똥개도 자기 집 안방에서는 한 수 먹고 들어가는 법이다. 아무리 절정의 고수라고 해도 감히 쾌찬문의 안방에서 소문주를 위협하다니. 다른 사람들도 이 일은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조유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허허허, 과연 절정의 고수쯤 되면 더 오묘한 세계가 있기 마련이지. 우리 고조부도 그러셨다네. 당시 단심쾌도하면 감숙에서는 세 살짜리 아이도 다 아는 이름이었다고 하더군.”
“아, 본래 감숙에서 활동하시던 고수셨나보군요. 헌데 어쩌다 청해에?”
“달자들이 지배하던 전조 아래 서장의 라마들이 얼마나 분탕을 벌였는지는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닌가. 특히 서장과 맞닿은 이곳 청해성에서 부렸던 패악질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고 하더군. 고조부께서는 이 지역 민초들을 위하여 기꺼이 일신의 영달을 포기한 채 여기 쾌찬문을 열고 자리를 잡으셨던 것이지.”
-흥, 가진 돈이 딱 그것뿐이었으니 그랬겠지. 포장하기는.
하지만 조유의 기대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지금 운호와 조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비로써 조유는 눈앞의 저 젊은, 아니 어린 소년이 절정의 고수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운호가 조유를 향해 빙긋 웃었다.
“물맛이 참으로 훌륭하군요. 중원에서는 쉽게 맛보기 힘든 맛입니다.”
“허허, 공조현의 자랑이지. 저 고할랍산의 정상의 만년설이 녹으며 내려오는 지하수인데 덕분에 이 마을 최고의 특산품도 이 물로 빗어낸 술이라네.”
조유를 대신하여 쾌찬문주가 답했다.
“그렇군요. 기련산맥과 이어진 산 같은데 영기가 범상치 않은 듯합니다. 저 정도면 중원의 명산들과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겠군요. 쾌찬문의 성세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성세는 무슨. 허허허.”
-아주 좋아 죽으려고 그러는군.
‘뭐, 아주 틀린 말도 아니잖습니까. 이만하면 화산의 속가 가운데서도 꽤나 상위권에 속하는 수준일 것 같은데요? 쾌찬문주의 말처럼 저 조유라는 사람이 절정의 경지에 오른다면 인근의 패자 행세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흥, 절정은 무슨. 하는 꼬라지를 보니 절정은커녕 30년 뒤에는 저 문주라는 작자와 마찬가지로 배 내밀고 허허거릴 것 같구나.
운호의 이야기들이 마음에 들었던 덕분일까?
“돈은 무슨. 그럴 필요 없네. 저 멀리 중원에서 여기까지 사악한 라마들과 싸우러 온 협객 아닌가. 마치 우리 고조부님처럼 말이지. 그런 협객에게 돈이라니. 강호의 동도들이 알면 모두 크게 비웃을 일이야.”
“하지만······.”
“어허!! 사양도 과하면 비례인 법이야. 어차피 자네가 타고 온 말도 긴 여정에 조금 쇠약해졌을 뿐, 어디 병이 든 것도 아니고. 비록 명마는 아니지만 내 마굿간에서 가장 좋은 말을 내줄 터이니 타고 가도록 하게. 내 마음 같아서는 가는 길에 식량이라도 싸주고 싶지만 음식은 먹지 않는다고 하니 참으로 아쉽군.”
쾌찬문주가 흔쾌히 쇠약해진 운호의 말을 대신하여 건강한 말을 내주겠노라 나섰다.
옆에 함께 있던 조유가 쾌찬문주의 말에 한 마디를 보탰다.
“아버님, 그렇다면 식량은 그렇다고 치고 길을 안내할 사람이라도 붙여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대장군부까지는 거리가 제법 될 터이고 마을만 몇 개를 지나쳐야 할 터인데 이번에는 종염이 단번에 백소협을 알아봐서 다행이었지만, 그게 아니라면 번거로운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세상에는 멀쩡히 눈을 달고도 고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작자들이 있기 마련이니. 그런 무지렁이들에게는 그래도 얼굴이 익숙한 우리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 좋겠지. 그렇다면 누굴 붙여주는 것이 좋을까······.”
운호가 사양하려는 찰나.
조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종염과 함께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응? 네가 직접? 하지만······.”
“안 그래도 대장군부에 다녀온 지도 오래됐고 저도 이번 기회에 중원의 젊은 영웅과 함께하면서 견문을 넓혀두는 것이 여러모로 좋지 않겠습니까.”
-저 자식, 저거. 너무 노골적으로 뭔가 시커먼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데?
운호가 파검의 말에 공감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시비를 걸던 인간이 중원의 젊은 영웅과 함께 하면서 견문을 넓히겠다고? 하지만 쾌찬문주는 아들의 그런 말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무릎까지 탁!! 내려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옳다. 여기 백소협은 그야말로 전도가 유망한 젊은 영웅이지. 그런 영웅과 교분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그리 자주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
이쯤되면 운호로서는 차마 거절하기 힘든 상황이다.
애초에 말을 내주겠다는 것도 그들의 호의였고, 사람을 붙여주겠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호의다.
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 * *
확실히 혼자 길을 떠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쾌적한 여정이었다.
사람이 셋이 되면서 일손은 세 배로 늘었지만, 해야 하는 일은 세 배로 늘지 않은 까닭이다.
“아이고!! 소협. 그냥 두십쇼. 제가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혼자 고생하시게 둘 수는 없지요.”
여정에서 잡다한 일을 하는 것은 익숙했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뒷짐을 지고 있는 쪽이 더 어색하다. 하지만 조유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거슬리는 부분이었다.
아랫 사람으로 부리기 위해 데리고 온 종염이 일을 하도록 그냥 내버려두면 될 것을, 운호가 뭔가를 하겠다고 팔을 걷고 나서는 순간 조유 혼자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종염이 속삭였다.
“너무 언짢아하지 마십쇼. 귀하게 자라셔서 그렇지, 그래도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가요?”
“그러믄요. 저희 처제가 산달이 지났는데도 해산하지 못해 몸이 아플 때 그걸 기억하고 약재까지 내려줄 만큼 아랫사람들을 챙겨주는 분이십니다.”
확실히 그 정도면 상관으로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종염의 상관으로 나쁘지 않다고 해서 운호 자신에게도 좋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헌데 길이 상당히 험하군요.”
“서쪽으로 갈수록 지대가 높아져서 그렇습니다. 전조 때, 달자들이 한인들 수만의 목숨으로 만든 길이지요. 뭐, 덕분에 지금은 저희가 아주 유용하게 잘 쓰고 있지만요.”
“그렇군요.”
묘한 동행.
운호와의 교분을 나누겠노라 이야기했던 것과 달리 조유는 딱히 운호와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누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운호는 이 여정을 통해 종염과 더 친해졌다. 이제는 종염 본인의 신상명세는 물론이거니와 그 가족들의 숟가락 숫자까지 훤히 꿸 지경이다.
“아쉽지만 오늘은 마을에서 쉬어가기 힘듭니다.”
“그러면 노숙을 해야겠군요.”
“네, 하지만 조금만 더 가면 사람이 머물기 괜찮게 꾸며둔 공터가 하나 있으니 거기서 쉬어가면 될 겁니다. 양쪽 마을에서 꾸준히 관리를 해주는 터라 제법 쉴 만 할 겁니다.”
그저 길이었음에도 화산의 높은 봉우리에 올랐을 때처럼 공기가 가벼웠다. 청해의 환경이 척박하다더니 아마 이런 요소도 그 척박함에 한 몫을 한 것이 분명하다.
“혹시 쉼터가 저기 저쪽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게 벌써 보이시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그저 선객이 있는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