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신검(1)
정답.
파검이 유달리 관심을 가졌던 검이 운호의 손에 들어왔다.
사실 운호가 그 검에 눈길이 갔던 것은 파검이 주의를 기울였던 것도 기울였던 것인지만 그 검의 형상이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물건들과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최염의 응접실에 있던 물건들은 대부분이 한눈에 봐도 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형상들이었다. 금은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던지, 한눈에 봐도 명인의 솜씨로 섬세하게 세공이 되어 있는 명품들.
그러나 그 가운데 이 ‘정답’이라는 검은 조금 달랐다. 투박하며 다소 조악하다. 그저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아주 오래된 검. 어쩌면 수백 년 전에는 명검 소리를 들었을지 모르겠으나 야금술이 발달한 지금에 와서는 그것도 아닐 것 같은 그저 그런 검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검에는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이 검이 저 먼 구라파에서 이곳 제국까지 오게 된 것도, 그리고 지금 제국 최고의 권력자인 최염의 응접실을 장식하고 있던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검이라는 범주에 있을 뿐, 그 길이도 형상도 제국의 검과는 사뭇 다른 형태다.
두터운 검날은 아직 야금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의 유산이라 치부할 수 있지만, 고동부터 검파 그리고 검두까지의 형태가 매우 특이했다. 마치 두 팔과 두 다리를 뻗은 사람의 형상과 같다고 해야 할까?
-깡.
손가락 끝으로 검을 튕겼다.
비록 제국의 명장들이 만들어낸 검에 비하자면 부족하지만 강철이다. 겉보기와 달리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검인 것일까?
-적어도 천오백 년. 아니, 어쩌면 이천 년도 더 된 검이다.
이천 년?
지금으로부터 이천 년 전이라면 아직 일부 사람들은 철이 아닌 청동을 사용하던 시기다. 게다가 철이라고 해봐야 지금의 강철과는 완전 달라서 청동과 비교해도 그리 품질이 좋지도 못했다.
그 시기에 이만한 강철검이라니. 그야말로 전설의 신검 소리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검이다. 구라파에서도 아주 귀한 검이었을 텐데. 전조가 구라파 지역을 휩쓸면서 어찌어찌 건너온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거듭 말하지만 제철기술은 지난 이천 년 동안 눈부시게 발전했다. 당장 칠백년 전에는 최신의 기술로 만들었던 종남의 검이 지금은 낡고 고루한 시대에 뒤떨어진 검 평가를 받고 있다.
하물며 이천 년이다. 이제 이 검의 가치는 그저 골동품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 남궁형이 준 검과 부딪힌다면 단번에 두 토막 나지 않을까?
-이 검 참으로 묘하단 말이지······.
파검이 ‘정답’이라는 검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 검이 다른 일반적인 검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대체 무엇일까? 한편으로는 마치 운호가 그 혼원단이라는 것을 섭취하고 느꼈던 것과 흡사한 느낌 같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몽원경?
“네? 갑자기 그게 무슨?”
파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정답’의 손잡이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본래는 신의 영성이 거해야 하는 공간으로 파검의 백(魄)이 빨려 들어갔다. 아마 평범한 인간의 백이었다면 그 순간 소멸을 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파검은 우화등선을 통해 선인의 경지에 오른 인간이었고, 그의 백은 그만큼 특별한 존재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혼원단(混元丹).
아주 오랜 도가 연단사 일맥을 이은, 그 일맥 사상 최고의 천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인재가 만들어낸 영단이 파검의 백을 한차례 강화했다. 그 덕분에 파검의 백은 오래되어 영락한 신검의 영성을 충분히 감당하고 남을 만큼 굳건했다.
그리하여 아주 오래전, 구라파에서 오랜 신화를 써 내려갔던 신검(神劍)이 눈을 떴다.
정답.
이제는 잊혀버린 그 정확한 이름은 답하는 자. 그들의 언어에 따르자면 프라가라흐라고 했다.
* * *
“운호야 너 정말 괜찮겠어?”
“응, 장문인께는 이미 허락을 받아뒀어.”
“하지만······.”
“기껏해야 삼 년이야. 종화는 나보다 어린 나이에 강호를 떠돌았다고.”
“그거야 종화는 자기 사부와 함께 떠돌았었고. 너는 혼자잖아. 역시 나라도 따라 가는 편이······.”
운호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야 물론 좋지. 하지만 넌 나와 다르잖아. 너도 이번 여행을 통해 얻은 것이 적지 않을 텐데 본산에서 수련해서 그걸 녹여내야지. 안 그래?”
“하지만······.”
“이십 년.”
“응?”
“마교 대제사장이 다시 돌아올 날까지 남은 시간이야. 아니, 아니지. 이제 그중에 일 년이 거의 다 지나갔으니 십구 년이겠다. 게다가 무림맹의 계획대로라면 어쩌면 그 시간이 되기 전에 싸움이 일어날지도 몰라. 설마 그때 뒤에서 발 동동 구르며 지켜볼 생각 하는 건 아니지?”
강아현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나는 도움이 안 된다는 이야기로구나.”
“아니, 너뿐만이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야. 고작 이 정도로는 그 싸움에 아무런 보탬이 될 수 없어.”
운호의 목소리가 묵직했다. 아마도 그 무게감은 그 자리에서 스러졌던 많은 목숨의 무게겠지. 그것은 그 자리에 없었던 아현은 알지 못하는. 아니, 평생 알 수 없는 무게였다.
“그래, 좋아. 십구 년이라고 그랬지? 그러면 얼추 엄마 나이 정도라는 소리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계속 살아나가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러면 벽곡단은 미리 말한 대로 청해 대장군부로 보내둘게. 혹시라도 무슨 변동사항 생기면 사문에 연락하는 거 잊지 말고.”
“알겠어. 고마워.”
강아현이 화산을 떠났다.
약간의 아쉬움.
-멍청한 놈. 본래 오는 여자는 안 막고 가는 여자는 한 번 잡는 것이 영웅의 미덕이거늘.
운호의 등에 대롱대롱 매달린 신검이 웅웅 검명을 토해냈다.
“아, 거 조용히 좀 말씀하시라니까. 누가 보면 귀신들린 검인 줄 알잖습니까. 뭐, 귀신 들린 검이 맞긴 하지만. 어쨌거나 아현이랑은 그런 거 아닙니다. 잘 알지도 못하시면서.”
-알지도 못하기는. 내가 소싯적에 만났던 여자가 몇 명인데.
“그러면 뭐합니까. 자식이라고는 딸 하나가 전부에. 듣자하니 사모님 집안 재산 홀라당 날려 먹어서 평생 구박 받고 사셨다면서요.”
-아······, 아니 그건······.
파검이 당황과 함께 신검의 검명이 더 커졌다.
“자꾸 이렇게 티 내시면 진짜 어디 인적 없는 산속 깊은 곳에 깊숙이 파묻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끄응.
신검의 울림이 잦아들었다.
좌부원이 ‘정답’에 손을 대던 그 순간, 그의 백은 신검의 핵에 빨려 들어갔다. 그 공간은 마치 몽원경의 그것과 흡사했는데, 크게 달랐던 점은 몽원경이 운호의 심상에 존재하는 무언가라면 정답은 현실에 존재하는 실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몽원경으로 다시 옮겨 오시는 건 어려운 거죠?”
-그게 뭔가 조금만 여기 익숙해지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이 정답이라는 검이 생각보다 커서. 본래 여기 머물던 존재가 어지간히 큰 놈이었던 것 같다. 넓어도 너무 넓구나.
덕분에 매일 밤 이어지던 몽원경에서의 비무가 뚝 끊어져 버렸다. 오 년 넘게 이어지던 한밤의 비무가 사라진 것이다.
물론 밤이 되면 운호는 몽원경에 들어선다. 하지만 그곳은 이제 더 이상 흩날리는 꽃잎도, 몰아치는 파도도 없는 텅 빈 공간에 불과했다.
홀로 검술을 수련할 수는 있지만 단지 그뿐이다. 운호는 몽원경에서 있었던 그 비무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됐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속이 터지는 점은 파검이 정답에 들어간 이후, 도움이 되는 점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처음 좌부원이 정답에 들어가 검명을 낼 때만 하더라도 운호는 스스로 날아다니며 살아생전 파검의 절초를 뽐내는 신검을 기대했다. 옛 이야기에 나오는 귀신들린 검이란 본래 그런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파검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지금처럼 -웅웅 하고 울어대는 것뿐이었다. 뭐 그것 역시 본인 말에 의하자면 적응되면 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하는데 글쎄······.
-아니, 평생을 두손 두발로 움직였는데 갑자기 철덩이에 들어가 그걸 움직이는 게 어디 쉽다더냐. 갓 태어난 어린아이도 몸을 한번 뒤집는데 백일은 족히 걸리고 기는데는 그 두 배의 시간이 걸린다. 하물며 나는 기거나 걷는 것도 아니고 날아다니는 일 아니냐. 그 열 배가 걸리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실로 뻔뻔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또 사리에 완전히 어긋나는 말은 아니니 뭐라 트집을 잡기도 그랬다.
결과적으로 운호는 등에는 -웅웅 우는 것 말고는 딱히 아무런 능력도, 그렇다고 강도가 대단한 것도 아닌 신검을 등에 쥐고, 허리에는 남궁철이 선물한 명검을 차고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목적지는 청해성.
곤륜과 공동. 그리고 제국의 사상 중 하나인 영보의 청해대장군부가 저 서장의 포달랍궁과 활불을 상대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곳이었다.
* * *
천하의 명산에는 모두 그 나름의 기운이라는 것이 존재 한다.
태산여좌(泰山如坐), 화산여립(華山如立), 숭산여와(嵩山如臥), 형산여비(衡山如飛), 항산여행(恒山如行)으로 대표되는 중원의 오악(五岳)에는 그에 어울리는 기운이 있으며 남존무당이라 불리는 무당산 역시 무당파에 어울리는 기운을 품고 있다.
그렇다면 저 남쪽.
마교의 본산이라는 십만 대산은 어떠한가.
십만 개의 대산을 품고 있다는 그 이름처럼 그곳은 길이로만 650리. 면적으로 따지자면 어지간한 소국을 능가하는 광활함을 자랑한다.
그곳의 기운은 본래는 음한 성질을 띄고 있었는데 덕분에 음한지공을 익히기에 아주 좋은 성질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마공과 음한지공은 그 궤가 완전히 다르다. 양기와 음기는 본래 존재하는 자연의 섭리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십만 대산의 음기는 점차 어둡고 혼탁한 기운을 띄기 시작했는데 근래에 와서는 그 기운의 크기가 더욱 커져 마치 그 지역 전체가 거대한 사형장이나 수십만의 사람이 몰살당한 전장을 방불케 할 만큼 혼탁해졌다.
그야말로 마공을 익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환경을 띄게 된 것이다.
그런 십만 대산의 가장 깊숙한 곳.
어지간한 정파의 무인이라면 기운을 운용하는 것만으로도 대경실색할만큼 혼탁함으로 가득한 그곳에 한 노인이 번쩍 눈을 떴다. 몸의 반신이 거대한 힘에 의해 뭉개진 형상이 실로 참혹했다. 저런 몸을 하고도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수준이다.
하지만 노인의 무공이 하늘의 이치마저 속이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감안한다면 사실 그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노인이 깨어나는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더 신기한 일이다.
“존자!! 존자께서는 무사하신가?”
“네, 다행히······. 목숨에 지장은 없으십니다. 다만 힘을 되찾으시려면 적어도 이십 년은 족히 요양을 하셔야······.”
“그렇구나······. 거짓된 천리와 현혹하는 부처가 이번에도 존자의 앞길을 막았구나. 나는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느냐.”
“아라한께서 존자님을 모시고 온지 팔개월이 흘렀습니다.”
“팔개월!! 맙소사.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안 그래도 대진을 전개했고, 북에서도 버러지들이 잔뜩 내려왔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십 년 정도는 끄덕 없을 겁니다.”
“그게 아니다!! 아미타의 아바타!! 아미타의 아바타를 찾았다. 이번의 거짓된 천리가 허겁저깁 준비한 대적자가 채 익지 못했던 그 얼치기라면. 아미타의 아바타야 말로 천리가 준비한 존자의 대적자가 분명하다.”
“아미타불의 아바타라고요?”
“그래!! 화산의 그 어린놈. 설마 화산에서 그런 놈이 자라고 있었을 줄이야. 지금이 기회다. 아미타의 아바타라고는 하지만 아직 애송이에 불과하다. 더 피기 전에 짓밟아야 한다.”
남궁혜의 원수.
채찍을 휘두르던 천급의 마인.
운호의 몸에 기거하던 증무진인을 눈치챈 자.
마교 팔대제사장의 두 번째인 프라타파나.
중원의 사람들이 부르기를 편마(鞭魔)가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