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보물(21)
아무리 온 신경이 명현에게 쏠려있다고 해도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접근하여 심지어 칼까지 찔러 넣다니. 게다가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난 것인지 영물인 대호의 가죽을 뚫고 허벅지 근육에 상처까지 만들었다. 뼈까지 닿는 상처는 아니었다고 해도 작지 않은 상처다.
궁익이 본능적으로 운호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명백한 실책이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지금 상대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잊어서는 안 됐다.
외팔의 비구니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고통과 슬픔, 분노와 좌절을 지나 마침내 희미하게 비치는 저 언덕(彼岸).
누군가는 고개만 돌리면 도달한다는 그곳을 보기까지 명현은 실로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찬제(羼提)와 비리(毘梨)를 거쳐 선나(禪那)에서 반야(般若)까지.
그 길었던 바라밀(波羅蜜)의 과정들.
야양낭(惹孃曩)은 커녕 오파야(烏波野)에도 아직 제대로 다다르지 못했다. 반야의 지혜란 얼마나 넓고도 깊은지.
하지만 그 부족함을 알고 있기에, 그저 부족한 만큼.
반야검(般若劍) 명현식(明賢式)
도피안검(到彼岸劍)
명현의 검이 궁익의 가슴을 향했다.
핏줄이 솟구쳐있는 두툼한 대흉근.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외공의 고수다. 비록 그 형질이 금강불괴와는 다를지라도 그 강도는 어지간한 강철의 갑주에 비길만하다.
궁익은 자신이 그 일검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전신의 진기를 가슴으로 집중했다. 대흉근의 세포질 하나하나에 막대한 진기가 스며드는 모습이 장관이다. 안그래도 두텁고 단단하던 가슴이 이제는 그야말로 철벽과도 같다. 그야말로 서해의 소청윤왕 오흠이 미후왕에게 뺏겼던 쇄자황금갑(鎖子黄金甲)이 저러할까?
하지만 상관없다.
차안(此岸)의 갑주는 피안(彼岸)의 검을 막아설 수 없으니.
명현의 의념이 그와 같았고, 그 검 역시 그 의념을 오롯하게 담아냈다.
그리하여
-탁
초절정 고수의 절초와 최선의 방어가 부딪혔음에도 거대한 충돌음 따위는 없었다. 그것은 그저 가벼운 타격음이었다. 마치 저자의 아낙네가 가볍게 휘두른 손바닥과도 같은 무게감.
하지만 그 결과는 달랐다.
마치 풍선에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명현 신니의 검이 닿은 곳부터 궁익의 무공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진기로 부풀었던 근육이 본래의 그것으로 돌아간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본래 궁익의 몸 자체가 강건하고 거대하다. 하지만 10척을 넘어서던 핏줄이 울룩불룩한 근육질의 거인은 더 이상 없었다.
“이······, 이게 무슨!!”
궁익이 크게 당황했다.
통증은 없었다. 기해혈의 진기 역시 그대로 느껴졌다. 하지만 기의 운용이, 기맥이 미동도 하지 않는다.
“검기점혈(劍氣點穴)? 아니 의념봉맥(疑念封脈)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겠군요.”
“의념봉맥?”
운호가 감탄했다.
저것이야 말로 반야검 명현식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이자 불살생계(不殺生戒)에 대한 명현 신니의 답안이다.
-제법이로구나. 내 천하(天下)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저것 역시 마음의 공부다. 기껏해야 몸만 무식하게 키운 저딴 놈과는 차원이 다르지.
궁익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진기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틀은 정양해야 할 겁니다. 그것도 아주 푹 쉬어야 하지요.”
“지금 나를 막는다고 너희들이 무사할 수 있을 성싶은가?”
주변의 상황은 이미 일방적이었다.
명현신니가 잠시 우물쭈물 망설인다. 확실히 강호경험이 없는 것이 티가 난다. 승기를 잡고도 망설임이라니.
운호가 전신을 타고 올라오는 통증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낭인들과 해룡방 모두의 목숨과 당신의 목숨. 아니, 오소감의 명령을 완수하는 일과 당신의 목숨. 어느 것이 더 귀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구나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은 자신의 목숨이다.
하지만 궁익의 경우는 단순히 나 자신의 목숨이기에 가장 귀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그가 초절정 고수이기 때문이다.
궁익은 광서대장군부의 좌장군이다. 전쟁에서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일상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목숨이란 일종의 자원과 같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설사 그것이 자신의 목숨이라도 그렇게 계량하도록 훈련받아왔다.
그런 그에게 초절정 고수의 가치란 어떠한가.
오소감의 부탁을 완수하여 최태감의 호의를 사고 광서대장군부에 재정적 풍요를 가져오기 위하여 소비할 만큼 하찮은가?
천만에
초절정 고수는 국지적인 전투를 바꿔놓을 수 있는 비대칭전력이며 그가 한 번 전장에 합류하는 것으로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의 목숨이 살아난다.
물론 재정적으로 여유가 생겨나면 더 좋은 장비를 갖춘 병사들의 생존률이 올라가고 그 가운데 더 정예한 병사가 나올 확률 역시 높아지겠지. 하지만 그런 모든 과정을 거쳐 실낱같은 구멍을 통과한 사람이 바로 궁익 자신이다.
단언하건대 궁익 자신의 몸무게만큼 황금을 쌓아 올린다 해도 그 목숨값에 비하자면 하찮다.
“빌어먹을.”
궁익이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틀 동안 정양하면 몸이 회복한다는 것을 어떻게 믿지? 무공을 잃어버린 전직 초절정 고수의 목숨값은 딱히 가치가 없다.”
운호의 시선이 명현에게 향했다.
“천리를 깨달아 하늘에 올라간 파검과 같은 이라면 또 모를까. 사람의 의념은 무한하지 않아요.”
“들으셨죠? 그렇다고 하는군요.”
“젠장, 그래 좋다. 어이!! 다들 검 치워라. 오늘 공쳤다.”
딱히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본래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병사들과 해룡방, 낭인들의 싸움은 소강상태였다.
궁익의 철수 명령에 병사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무기를 회수했다.
“니미럴. 어쩐지 느낌이 안 좋더라니. 내가 이래서 고자 놈들 의뢰는 받지 말자고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본래 싸우고 있던 동창의 창위 중 하나가 크게 소리쳤다.
“아니, 궁 장군!! 이러는 법이 어딨소.”
“어딨기는. 여깄지. 애당초 정보 자체가 틀려먹었잖느냐. 초절정 고수는 조충 영감 하나일거라더니. 네 눈에는 저 외팔이는 초절정도 아닌 것 같으냐?”
“하지만 그것은······.”
“이래서야 동창의 저의가 의심스럽구나. 왜? 일석이조가 아니라 일석삼조라도 노린 것이냐?”
“오 소감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네가 아주 죽여달라고 고사를 지내는구나. 왜? 나한테 살인멸구 해달라고 부탁이라도 하지 그러냐?”
소리를 높이던 창위가 뒤로 주춤 물러났다.
“얘들아. 돌아가자. 젠장. 돌아가면 내가 마누라를 팔아서라도 실컷 먹고 마시게 해줄 테니 불평들 좀 그만하고.”
“장군이 팔아치울 마누라가 어딨습니까.”
“그래, 그래서 내가 결혼을 안한 거 아니냐. 아무튼지 간에 뒤진 놈들 유해는 잘 수습하고. 우리는 이만 물러난다.”
궁익이 조금의 미련도 없이 전장에서 이탈했다.
이로써 당황스러워진 것은 동창의 창위들. 그리고 조충과 싸움을 이어가던 박진문이었다. 이미 한차례 배신당한 종자명과 청해대장군부 무사들의 기세가 흉흉하다.
“이쯤 합시다.”
“뭐라고? 자기가 유리할 때는 죽어라 달려들더니, 빠르게 발을 빼시겠다?”
“어차피 조 총관도 최종적으로는 어르신과 협상할 요량 아니요. 오늘 여기서 있었던 대화는 모두 없던 일로 해줄 테니 그만합시다. 여기서 끝까지 가봤자 조 총관도 좋을 것은 없으니까.”
“흥, 조가놈 조가놈 하더니. 똥줄이 타기는 타는 모양이로구나. 조 총관이라니 말이다.”
박진문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그의 입장에서 조충은 사지를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원수였다. 하지만 원한이라는 것도 결국 갚을 수 있어야 의미가 있는 법. 지금은 때가 아니다. 다시 기회를 노릴 수밖에.
“뭐, 좋다. 네 말처럼 네 놈 멱을 잡아 뜯어봤자 최 태감 노기만 쌓일 뿐이겠지. 하지만 그래도 이대로 물러나는 것은······.”
말끝을 흐리는 조충을 노려보던 박진문이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주머니에서 작은 단환 하나를 꺼내 삼키고는 나머지를 -툭 조충에게 던졌다.
“청해에서 얻은 물건이요. 오늘 일을 잊기에는 충분할거요.”
“흐음, 향기를 보니 제법 괜찮은 물건이로구나.”
“서장 포달랍궁의 대라마가 들고 다니던 약이요. 이름은 모르겠지만 내상에 탁월하고 조금이지만 내력증진의 효과도 있소.”
“좋다. 저기 동창의 떨거지들도 다 데리고 썩 물러나거라. 이왕이면 청해로 돌아가서 영영 안 돌아오면 더 좋겠구나.”
마침내 동창의 창위들까지 모조리 물러났다.
남은 것은 상처 입은 해룡방의 무인들과 낭인들. 몇 안되는 금의위. 그리고 청해대장군부의 무사들이었다.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배를 탄 것 같은데. 어쩌겠소?”
싸움의 흉험함을 말해주듯 전신이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남궁철이 궁익의 발길질에 늑골이 부러져 신음하는 벽안검마 종자명을 바라봤다.
“참고로 말해주자면 남궁 세가의 배삯은 상당히, 아니 아주 몹시 비싸다오.”
* * *
“좋은 검인 것 같았는데. 미안합니다. 제 무위가 부족하여······.”
“어휴, 아니다. 아니야. 신외지물이 뭐가 중요하단 말이냐. 금자 사백 냥이야 또 벌면 그만이다. 그걸로 네가 조금이라도 덜 다쳤다면 그것으로 됐다.”
-잠깐만. 금자 사백 냥?
파검이 기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일의 발단은 결국 해룡방의 파산이다. 그리고 해룡방을 파산으로 몰아넣은 금액이 금자 사천 냥이었다. 즉 이번 싸움에서 운호가 부러트린 검 열 자루면 애당초 이런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놀란 것은 파검만이 아니었다. 금자 사백 냥이라는 말에 운호 역시 크게 놀랐다.
금자 사백 냥이면 한적한 시골에 작은 장원 한 채 값이다. 어쩐지 손에 쥐는 순간부터 검명을 -웅웅 내뱉는 것이, 손에 장원 한 채를 쥐고 휘둘렀으니 그만한 위력이 나오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금액이었다.
“아차차. 조 대인께서 형님도 이걸 하나 드시라고 보내주셨습니다.”
“이게 뭐냐?”
“포달랍궁에서 흘러나온 요상단이라고 하는데 약간의 내공상승 효과도 있다고 합니다. 조대인이 직접 검사해봤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고요.”
“혹시 운호 너도 복용하였느냐?”
“아니요. 아직······.”
남궁철이 잘됐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배를 타고 있는 동안은 안전할 것이고, 도착을 하면 남궁세가의 권역이니 더욱 안전할 것이다. 일단 그 약은 먹지 말도록 해라. 혹참가포의 호의라니. 영 찝찝하구나. 차라리 안휘에 도착하면 내가 약을 하나 구해줄 테니 그걸 먹거라. 아, 그 약은 너희 본산에 화산금정에게 가져다주면 되겠구나.”
“아뇨, 굳이 그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사양하면 내가 너무 미안하니 절대 사양하지 말고. 이 모든 것이 다 나 때문에 생긴 일 아니더냐. 그 정도는 내가 해야지. 아, 그리고 가는 길에 검도 하나 챙겨주마. 이번에 부러진 녀석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녀석을 만들던 과정에서 나온 실패작들 가운데 가장 좋은 녀석이다.”
-받아라. 받아야 한다.
파검의 말이 아니더라도 운호 역시 이번 일로 좋은 검의 필요성을 실감하고 있었던 만큼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 할 일이지. 아, 그러고보니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네,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조금 남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