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보물(20)
모두가 그 광경을 보았다.
해랑검 공조도 혈운검 좌하랑도 안수해원검 남궁철도 그리고 강아현까지도. 하지만 아무도 운호를 도우러 갈 수 없었다.
궁익을 따라 온 광서대장군부의 전력은 궁익 그 자신을 제외한다고 해도 해룡방과 그를 따르는 낭인들. 그리고 종자명을 따라온 청해대장군부의 전력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참으로 아쉽고 또 아깝구나.”
궁익이 탄식했다.
“천하에 둘도 없는 귀한 과실을 채 익기도 전에 따먹어야 하는 심정이라니. 나 광서대장군부 좌장군 궁익. 먼 훗날까지 소신검 백운호라는 이름을 기억해주겠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궁 장군이 늙어 죽을 때까지 강호에 널리 퍼질 것 같으니까요.”
“누구냐!!”
실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간직한 외팔의 복면인이었다.
놀라운 점은 이 자리의 누구도 그 복면인이 거기까지 접근하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는데 그것은 궁익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전력으로 운호에게 공격을 내리치던 상황이었던 만큼 주변에 신경을 돌리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초절정.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고수다. 보통 사람이 어찌 그의 이목을 피할 수 있으랴.
-망할 계집 같으니. 더 빨리 올 수도 있었으면서 늑장 부리기는.
외팔 복면인의 정체는 당연하게도 명현신니였다. 이 근처에, 아니 어쩌면 중원 전체에 팔이 한 쪽 없는 초절정의 고수가 또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파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운호에게 전할 가르침이 남아있었던 만큼 명현이 그를 쫓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무위를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명현이다. 그녀가 나설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운호가 반쯤 부러진 검을 움켜쥔 채 여전히 궁익을 노려보고 있었다.
명현 신니가 사뿐히 걸어 운호와 궁익 사이에 섰다. 그 걸음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본래 명현의 위치가 그래야 한다고 느껴질 것 같은 걸음이었다.
“지나가던 사람입니다. 어른이 아이를 핍박하는 것이 영 보기 불편하네요.”
“지나가던 사람? 허, 웃기지도 않는군. 하긴, 저만한 기재를 아무런 보호조치 없이 세상에 내놨다고는 믿지 않았다. 화산인가?”
“글쎄요.”
명현이 내심 쾌재를 불렀다.
알아서 자신의 정체를 착각해주는데 그녀로서는 나쁠 것도 없다. 다만 운호가 워낙에 궁익을 상대로 잘 버티기에 실전 경험 하는 셈 치고 조금 오래 지켜 본 것이 마음에 걸릴 뿐이다.
-잘 버텼다. 이제 나에게 맡기고 잠시 몸을 추슬러라.
명현 신니의 전음에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정말 몸속의 마지막 기력 한 방울까지 모조리 쥐어짜낸 탓이다.
호흡을 골라보지만 쉽지 않다. 아궁이에 새로운 장작을 넣어준다고 해도 기존의 불씨가 있는 것과 새롭게 불씨를 피워올리는 것은 그 난이도가 다르다.
현재 운호의 상태는 불씨가 모조리 꺼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다시 피워올릴 한 줌 불쏘시개마저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파검이 말했다.
-천천히 호흡하거라. 네가 익힌 그 포원공이라는 쓰레기 같은 무공은 그래도 이런 순간만큼은 네게 힘이 될 테니까.
운호가 다시 한번 크게 호흡했다.
궁익이 자신의 대부를 굳게 움켜쥐었다.
외팔의 초절정이라니. 들어본 적도 없는 미지의 고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질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느껴지는 기도는 대단하다.
‘하지만 외팔이지.’
궁익이 과감하게 팔십이근 대부를 휘둘렀다. 상대는 아직 검도 제대로 뽑지 않았다. 과연 외팔로 어떻게 등에 멘 검을 뽑을까? 어검술?
-톡
명현의 발꿈치가 검집의 끝을 건드렸다. 자연스럽게 뽑혀 나오는 검.
“곡마단에서나 볼법한 기예로구나.”
“아ㅁ······.”
습관적으로 아미타불을 내뱉으려던 명현이 말을 삼켰다. 하지만 나아가는 검은 멈추지 않는다.
잠깐의 공방.
궁익이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역시 화산에서 나온 계집이로구나. 청자배 노괴들 말고도 초절정의 고수가 또 숨어있었다니. 과연 천하제일문을 자처할만하다.”
운호가 종자명을 상대하던 검술과 똑같았다.
또한 자신을 상대할 때 중간중간 보여주던 검로와도 흡사하다. 물론 운호의 검술과 지금 명현의 검술은 고양이와 호랑이만큼 차이가 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힘의 크기와 속도의 문제일 뿐이다.
운호는 화산의 문도다. 그렇다면 그런 운호와 비슷한 검술을 사용하는 이 외팔의 검사 역시 화산의 문도일 수밖에 없다. 아마도 무슨 사정으로 인해 화산에서도 정체를 감춘 고수겠지. 마치 지금 저기서 혹참가포 조충을 상대하는 은검귀조 박진문처럼 말이다.
* * *
부웅
박진문의 두꺼운 검이 조충의 이마를 스쳤다.
한순간 핏물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야말로 한순간이다. 마치 그런 적이 없던 것처럼 이마의 상처가 오므라들었다. 재생이라고 할 것 까진 아니다. 그저 신체를 제어하는 능력이 경지에 이른 증거다.
“빌어먹을 오랑캐 고자 놈이 여전히 힘 하나는 장사로구나.”“조가 네 놈은 이제 슬슬 기력이 달리는구나. 하긴 이제 무덤에 들어갈 나이인데 그렇게 발발거리고 기어 다녀서야 어디 쓰겠나. 내가 직접 무덤에 쳐넣어 주마.”
“무덤에 들어갈 나이는 네 놈이 죽어라 모시는 그 늙은 고자겠지. 젊어서는 색에 미친 계집을. 늙어서는 권력에 미친 고자를. 아주 네 놈도 주인 고르는 재주 하나는 대단하구나.”
“그래도 조가 네 놈을 피해간 걸 보면 내 주인 고르는 솜씨가 썩 나쁘지는 않구나. 어디보자. 네 놈을 주인으로 골랐던 놈들이 지금 죄다 어쩌고 있더라? 아, 그래 저기 보인다. 광서대장군부에서 나온 놈들에게 죽죽 썰려 나가고 있구나.”
본래라면 혹참가포 조충의 실력이 박진문에 비해 반수 정도 위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궁익의 참전이 그것을 바꿔놓았다. 조충은 이제 궁익이 그들의 싸움이 합류하기 전에 어떻게든 빠른 시간 내에 승부를 봐야 한다. 박진문은 정반대다. 궁익이 합류할 때까지 그저 버티기만 하면 된다. 빠르게 승부를 봐야하는 사람과 그저 버티기만 하면 되는 사람. 반 수의 차이는 그 앞에 커다란 의미를 갖기 힘들다.
“숨어서 사람 멱이나 따고 다니는 백정 놈 주제에 감히!! 하긴, 제 주인이 그딴 계집이었으니 종놈도 정상일리 만무하지.”
“그래, 그 사람 멱 따는 백정이 오늘은 특별히 늙은 개새끼 멱 한 번 따볼 생각이니 모가지나 쭉 내밀어 봐라.”
조충과 박진문.
궁익과 명현.
두쌍의 초절정 고수가 격렬하게 싸움을 이어갔다.
“과연 화산. 대단하다.”
궁익이 명현의 실력을 인정했다.
경지로만 따지면 확실히 자신보다 높다.
하지만 싸움이 어찌 무공의 경지 고하로만 결정이 난단 말인가.
-꽈아앙!!
압도적인 파괴력.
명현신니의 몸이 흔들린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의 검은 표홀히 날아들었다. 실로 심오하기 짝이 없는 검술이다.
다리를 들어 검을 받아냈다. 그의 몸을 감고 있는 호피는 십만대산에서도 실로 영물이라 할만한 대호를 쳐 죽이고 벗겨낸 가죽이다. 약간의 진기로 능히 도검을 막아낸다.
명현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외팔의 검객. 아마 산에서 지독하게 검술 수련만 했겠지. 재능과 천운이 모두 따랐기에 저런 장애를 안고도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아마 목검을 들고 검을 논했더라면 감히 저 검객을 따라잡을 수 없으리라. 하지만 지금 이것은 싸움이다. 영물의 가죽도, 병기의 이점도. 그리고······.
-부웅
“크, 아깝다.”
“멍청아. 좀 제대로 해. 잘못하다 대장이 맞겠다.”
“야, 어디 초절정이 쉬운 줄 알아? 그리고 대장은 거죽이 두꺼워서 이 정도는 맞아도 괜찮아.”
상황의 이점까지도.
그 모든 것이 싸움의 일부다.
-힐끔.
명현신니의 시선이 운호에게 향했다.
데리고 빠져나갈까?
지금이라면 아직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운호가 반항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의 이야기다. 과연 저 아이가 자신의 동료와 의형을 두고 떠날 아이인가.
그럴 리가.
만약 그런 아이였다면 명현은 자신의 검을 전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처음 검을 들고 나설 때만 하더라도 쉬운 일일 줄 알았다. 지금 저기서 도끼를 휘두르는 근육질의 장한은 분명 명현 자신보다 부족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산에서 홀로 쌓은 검의 경지라는 것이 참으로 허망하다.
-탁!!
천근 거력을 싣고 날아드는 대부를 떨어지는 이파리처럼 받아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날아드는 화살을 튕겨낸다.
비합리적인 현상.
대부에 담겨있던 천근의 거력이 다섯 치짜리 화살에 담겼다.
-콰아앙!!
낄낄거리며 활을 재던 병사 셋이 순식간에 피떡이 되어 쓰러졌다. 하지만 여전히 숨돌릴 틈은 없었다. 궁익의 몸이 한층 더 크게 부풀어 올랐다. 이제는 피부 밖으로 울룩불룩 솟구친 핏줄이 징그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그만큼 그의 완력은 더 거대해졌다. 초나라 항우의 역발산기개세 그대로다.
-쾅!!
대부를 받아내는 왼손 손목이 시큰하다.
한계를 넘어서는 완력이 더 높은 경지의 명현을 몰아붙인다.
-우드득
궁익의 몸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 고통에 궁익이 어금니를 드러내며 크게 웃는다. 고통을 담보로 승리를 받아낼 수 있다면 그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쓰레기 같은 놈이 어딜 감히 끼어드느냐!!”
-뻐억
조용히 달려들던 청해대장군부 벽안마검 종자명이 발길질 한 방에 나가 떨어졌다. 살기가 응축된 검강? 웃기지도 않는다. 경지를 넘어서지 못한 이가 만들어낸 허섭스레기 따위가 어찌 의념으로 단련된 육체를 뚫을 수 있겠는가.
궁익이 크게 포효했다.
* * *
운호가 호흡했다.
기해혈 깊숙한 곳.
이제 대부분 소화되어 내공이 되거나, 내상을 회복하는 데 사용되고 남은 자소단의 아주 작은 흔적이 느껴진다.
그것을 시작으로 천천히 불을 붙여 나간다.
모든 것을 내뿜은 진기가 기진맥진한 채 널브러져 있다. 오늘은 이제 꼼짝 않고 쉬어야 한다 말하는 그것을 살살 달래 일으킨다.
기혈과 기맥 역시 엉망이다. 당연하다. 초절정 고수의 전력을 다한 일격을 막아낸 몸이다. 내상을 입지 않은 것이 용하다.
포원공 덕분이다.
그 축적은 느리지만 성질이 안정적이며 움직임은 민활하다.
본래라면 진기로 화했어야 하는 자소단의 남은 조각을 불태웠다.
그 기운이 기진맥진한 진기들을 일깨운다. 내공 모으는 것이 보통 사람보다 배는 어려운만큼 이 작은 조각조차 아깝기 짝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내부의 기운을 달래는 와중에도 두 눈은 쉬지 않는다.
초절정 고수와 초절정 고수의 싸움이다.
마교의 대제사장과 파검, 그리고 다른 천무십칠성의 싸움은 너무 수준이 높았다. 받아들이기 버겁다.
하지만 지금은 딱 좋다. 무엇보다 저 무식한 괴물을 상대하는 명현신니의 검술은 운호 본인도 익힌 검술이 아니던가. 자신이 익힌 검술의 극한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보는 것은 매우 좋은 공부다.
‘아!!’
천근의 거력을 움직여 다섯치짜리 화살에 담는 장면이 눈에 새겨졌다.
이해되지 않던 부분이 이해된다.
희미하게 잡힐 듯 잡히지 않던 무언가가 조금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깨달음의 단상이 다가온다.
또한, 저 치열한 싸움 와중에도 잠시만 정신을 놓으면 놓쳐버릴 것 같은 명현 신니의 자연스러움. 물론 저것은 운호 자신이 추구하는 것과는 방향성이 다르다.
하지만 단순히 저 동작을 흉내 내는 정도라면?
이미 반야검의 명현식은 알고 있다.
그 움직임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도 이해가 될 것 같다.
이렇게?
그러니까 저렇게?
아하, 그래서 이런 식으로 -푸욱?
“이 버러지 같은 놈이 언제?”
만신창이의 운호가 자연스럽게 부러진 검을 궁익의 허벅지에 찔러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