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보물(19)
-부웅
거대한 도끼(大斧)가 날아든다. 그 기세가 말할 수 없이 위맹하다.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양평후(陽平侯) 서공명(徐公明)의 대부가 이러할까.
감히 검을 맞댈 엄두를 내지 않았다. 그저 그 흐름을 따라간다.
그리하여 일합.
-쾅!!
실로 무시무시한 괴력이다. 그저 흘려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경력이 검을 타고 흐른다. 운호의 몸이 크게 뒤로 밀려났다. 안 그래도 균형이 나가있던 검이 완전히 틀어졌다. 이제 운호의 손에 든 것은 검이라기보다는 고철에 가깝다.
“호오. 그 앳된 얼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고강한 무위. 네 녀석이 바로 그 소신검이라는 녀석이로구나.”
“저를 아십니까?”
“글쎄, 굳이 알고 싶지 않아도 워낙에 이야기 많이 들려와서 말이다. 과연 광서성 한구석까지 소문이 날 법한 무위로구나. 나이를 초월한 무공이 실로 놀라운 수준이다. 그야말로 천하를 논할만한 재능이로구나. 그러니 참으로 안타깝다.”
안타깝다말하는 궁익의 얼굴에 진심이 가득했다.
“아직 제대로 익지도 못한 벼를 수확해야 하는 농부의 마음이 이러할까. 삼십 년. 아니, 이십 년만 더 있었더라도 참으로 재밌는 상대가 됐을 것을.”
“글쎄,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얼마 전에 마교의 대제사장이라는 작자도 그와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 여기 멀쩡히 서 있지 않겠습니까.”
“고놈 참. 무공 솜씨만큼이나 그 입담도 일품이로구나.”
궁익이 운호의 검을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헌데 검이 그 모양 그 꼴인데 괜찮겠느냐? 하긴, 어떤 검을 들건 어차피 결과는 같을 테니 최소한 저승에 가서 검 때문에 죽었습니다. 하고 변명할 거리는 만들 수 있겠구나.”
궁익의 비아냥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근처에 있던 남궁철이 자신의 검을 운호에게 던졌다. 이미 지난번 명정과의 싸움 이후로 자신의 검을 주겠노라 했었지만, 운호가 거절을 해왔었는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까지 거절을 할 도리는 없었다.
-좋은 검이구나.
남궁세가는 천하에서도 손에 꼽히는 상단인 한상의 실질적인 주인이다. 그 부유함이 가히 북방의 모용세가에 비길만하다. 그런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남궁철이다. 그런 남궁철이 사용하는 검이 범상할 리 없다. 아마도 파검이 그 가격을 알았더라면 단순히 좋은 검이라고 넘어갈 수 없을 만큼 비싼 가격을 자랑한다.
-우웅.
운호의 진기와 감응한 검이 스스로 울음을 터트린다. 그 민감한 반응에 운호 역시 감탄했다. 지금까지 화산에서 지급했던 검의 품질 역시 상등품이라고 할 만하지만, 이 검은 그것을 뛰어넘는다. 그야말로 명품이라 부를만하다.
“이제는 변명거리도 사라졌으니 참으로 안타깝게 됐구나.”
궁익이 도끼를 휘둘렀다.
어디론가 벗어 던진 웃통이 온통 허점투성이다. 하지만 압도적인 속도와 힘이 그 허점을 무위로 만든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방어뿐.
운호의 검이 궁익의 대부를 비껴냈다.
-탁
궁익의 눈썹이 꿈틀했다.
고작 검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반응이 달라졌다. 간신히 공격을 받아내던 녀석이 제법 능숙하게 흘려낸다.
어디 그렇다면 이것도 한번 흘려 봐라.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라고 했다.
궁익이 익힌 굉파패력공(轟破覇力功)의 오의가 바로 그것이다.
불가 계통의 외공들과는 다르다. 소림에서 시작된 역근의 외공이 어떤 경우에도 깨어지지 않는 불괴의 육신을 목표로 한다면 군부에서 전해오는 외공의 오의는 산을 옮길 용력에 있다.
팔십이근짜리 대부가 불을 뿜었다.
연의에 나오는 관운장의 팔십이근 청룡언월도는 작금의 무게로 환산하면 30근 남짓이다.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무게의 무기. 통상적인 검의 무게가 한 근을 조금 넘어가는 수준임을 고려하면 산술적으로 같은 속도로 부딪혔을 때 그 파괴력은 여든두 곱절에 달한다는 뜻이 된다. 물론 내공의 힘, 궁익의 도끼를 다루는 기술. 그리고 한순간 증폭되는 굉파패력공의 근력 등을 고려하면 그 파괴력은 고작 여든두 곱절에 그치지 않는다.
운호의 검이 난풍검의 묘리대로 움직였다.
명현에게 반야검 명현식을 익히는 과정에서 운호의 난풍검은 한층 더 깊게 숙성됐다. 훌륭한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청어람 할 수 있는 재능의 만남이다. 운호가 명정 신니를 상대했던 것이 고작 일주일 전이었지만 이미 난풍검의 성취는 그때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쾅!!!
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했다.
초절정이 어찌하여 초절정인가. 절정이 인간 한계의 끄트머리라는 절벽에 선 사람이라면 초절정은 그 한계를 넘어 허공에 발을 디딘 초인이다.
절정의 극한에 다다랐다는 명정이 자신의 본원진기까지 사용해가며 휘두르던 석장을 막아냈던 난풍검이다. 아니, 이제는 그때보다 한층 더 깊어진 난풍검이었지만 궁익의 마음이 담긴 일격을 흘려내는 것은 무리였다.
고작 그 한 번의 공격에 경맥이 흔들렸다.
궁익의 공격이 이어진다.
-쾅!!쾅!!!콰아앙!!!
그가 휘두르는 일격 일격에 운호가 작정하고 휘둘렀던 광음검에 필적하는 위력이 담겨있다. 본래 운호가 사용하는 검술의 시작은 납매검이다. 가장 먼저 익혔기 때문이 아니다. 그 엄밀한 합리성이야 말로 운호의 성정에 가장 잘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의 공격이 이미 합리의 영역을 아득하게 벗어나 있다. 가장 엄정한 방어를 자랑하는 납매검이지만 궁익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는 무용지물이다. 합리가 파괴된 곳에서 효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매농검 역시 자연스럽게 선택지에서 사라진다.
그리하여 남은 것은 기교의 자운과 의념의 굉음. 그리고 흐름의 난풍뿐이다.
난풍검의 초식들로 궁익의 공격을 버텨낸다.
한 번 한 번의 공격들이 뼈를 울렸지만, 그럼에도 쓰러지지 않는다. 극한의 상황이 운호의 검술을 발전시켰다. 자운검을 익히며 쌓아 올린 기교가 난풍검에 스며든다. 그 압도적인 기교가 자신의 몸에 쌓여야 하는 충격량을 검에게 떠넘겼다.
-우우웅
같은 무게의 금화 열 곱절에 해당하는 남궁철의 명검이 비명을 내지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버텨낸다. 시골 대장간의 검이라면, 아니 설사 화산에서 수여받은 검이었다고해도 진즉에 뒤틀어졌을 공격들에도 남궁철의 검은 깨지거나 틀어지는 곳 하나 없이 멀쩡하게 버텨낸다.
정확하게 여덟 번.
남방에서 마교의 짐승들을 수도 없이 베어내며 마침내 초인의 경지에 한 걸음을 내디딘 초절정의 고수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아니, 지금에야 눈치챈 것 자체가 어쩌면 상대를 너무 낮춰보았기에, 혹은 스스로의 둔함때문임을 깨달았다.
검을 고철로 만들었던 첫 번째 공격.
그리고 남궁철에게 검을 전해 받은 이후 받아낸 두 번째 공격.
궁익은 단순히 검의 성능이 그토록 큰 차이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괴물이로구나.’
그의 대부를 받아내는 과정에서 저 어린놈은 ‘발전’하고 있었다.
명백히 상리를 벗어났다.
한 수 위의 고수를 상대하는 와중이다. 비록 이것이 그의 전력은 아니라 해도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도 급급함이 마땅하다. 헌데 발전이라니.
단순히 힘이 강해졌다든지, 진기가 강성해졌다면 오히려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잠력을 터트리거나, 영약. 혹은 격발 형식의 무공을 익혔다면 가능한 일들이니까.
하지만 운호는 명백히 궁익의 공격에 ‘적응’하고 있었다.
-쾅!
도끼와 검이 부딪혔다.
궁익의 손에 전해지는 충격이 한층 줄어들었다. 그가 약하게 도끼를 휘둘러서가 아니다. 저 아이의 검이 그만큼 더 부드럽게 궁익의 공격을 받아내고 흘려보냈다는 뜻이다.
너무 어처구니 없는 일을 맞닥뜨리면 분노보다는 헛웃음이 흘러나온다고 그랬던가?
“허허허······.”
지금 궁익이 그러했다.
본래는 여기를 빠르게 정리하고 저 너머에서 싸우고 있는 혹참가포 조충과 은검귀조(隱劍鬼爪) 박진문의 싸움에 합류할 생각이었다.
경지에 이른 광파패력공은 말 그대로 산을 뽑아 던질 만큼 막대한 완력을 안겨준다. 하지만 사람의 몸으로 산을 뽑아 던진다는 것이 어찌 쉬울까.
역근에서 유래된 외공들이 완성됐을 때, 그 육체의 강건함에 비해 위력에 아쉬움이 있는 것과는 반대로 광파패력공은 그 신체가 위력을 버텨내지 못한다.
그러한 이유로 운호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버텨내던 공격들이 궁익에게는 그저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휘두른 공격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궁익은 이 기이한 애송이가 ‘위험’하다고 느꼈다.
물론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대로 공격을 이어가는 것만으로 머지않아 파탄을 보이고 쓰러질 것이 명확했다. 아무리 공격을 흘려낸다고 해도, 그것이 점점 능숙해지고 있다고 해도 몸에 쌓이는 충격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궁익은 자신의 본능이 합리적 이성을 넘어선 예지의 영역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신의 근섬유가 올올이 일어났다. 설사 강철을 꼬아 만들어도 이보다 단단할 수 있을까.
또한 그 힘의 크기는 어떠한가. 본래라면 이 한 번을 움직이기 위해 황소 두세 마리는 족히 섭취 해야 할 만큼 거대한 힘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쌓아 올린 막대한 진기가 그 거대한 힘을 대신했다.
-큰 게 온다!!
파검의 조언은 필요 없었다.
저릿하게 느껴지는 기파만으로도 궁익의 공격이 지금까지와는 다르리라는 것을 짐작게 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희미하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운호가 생각했다.
어쩌면 그 무언가야말로 난풍검의 오의가 아닐까?
그 희미한 무엇을 잡아낸다면 어쩌면 저 산을 쪼갤 것 같은 도끼조차 아무렇지 않게 흘려 넘겨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깨달음에 대한 갈망.
상승의 경지를 향한 욕망.
궁익의 팔십이근 도끼가 폭발하듯 움직였다.
그것은 압도적인 완력이 만들어낸 기적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마치 공간과 공간이 접힌 것처럼. 소리의 속도를 아득하게 넘어 그 앞을 가로막는 공기조차 파괴하며 날아드는 일격.
그의 시선이 운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역시.
궁익 자신의 예감이 옳았다.
그가 지금까지 싸워온 수많은 상대들이, 혹은 궁익 자신이.
생사를 오가는 싸움 가운데 종종 저런 순간에 접어들었었다. 찰랑거리는 물잔이 넘쳐나는 것처럼, 꽉 막혀있던 둑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 저런 순간을 넘어선 이들은 일순간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한다.
하지만 동시에 궁익은 알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깨달음이라는 것에 집착하여 저 순간을 넘어서지 못하고 죽어가는지를.
지금 궁익의 도끼질은 저 운호라는 아이에게 죽음을 선물하기에 충분했다.
설사 설익은 깨달음의 검을 펼치더라도.
깨달음을 앞둔 그 찰나의 시간.
운호가 납매검의 오의를 깨달았던 그 첫 번째 사건을 떠올렸다.
당시 증무 진인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싸움 도중에 깨달음을 얻어? 그래 물론 그럴 수야 있지. 나도 소싯적에는 그런 경우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너처럼 멍청한 짓을 한 적은 없었다. 한참 싸우는 와중에 분에 넘치는 짓을 시도해? 그것도 무려 두 번이나? 이번이 단순한 비무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진짜 싸움이었다면 넌 그 깨달음을 얻은 대가로 목숨을 내놔야 했을 거다.’
그래, 지금은 목운평이 말했던 바로 그 ‘진짜 싸움’이다.
운호의 눈동자에 선명한 빛이 돌아왔다.
그리하여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막연한 무언가를 쫓는 대신 초절정 고수의 전력을 다한 피할 수 없는 일격을 향해 현재의 자신이 펼쳐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초식을 펼쳐냈다.
-쿠과과과광!!!
부러진 검.
찢겨 날아가는 무복.
입과 코에서 터져 나오는 핏물과 부어올라 욱신거리는 관절들.
하지만 아직 운호의 두 발은 대지를 굳건히 밟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