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보물(17)
“어떻게 눈치챈 것이냐?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딱히 않았는데 말이다.”
“초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이인자도 아쉬워하는 사람이 삼인자 자리에 만족할 리가요. 제가 본 혹참가포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쉬운 길로 이인자가 되기보다는 어렵더라도 최고가 될 수 있는 길을 택하는 사람이었죠.”
조금 전, 자신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운호의 발언에 조충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참으로 재밌구나. 고작 반 시진 남짓하게 이야기를 나눈 네 녀석조차 나를 그렇게 파악하고 있거늘······.”
그 말에는 은은한 분노가 느껴졌다.
비록 권력의 이전투구에서 패배했다고는 하지만 자신에게 그런 굴욕적인 제안을 해놓고 마치 은혜를 베풀었노라 하는 표정을 짓던 그 어린 고자의 역겨운 얼굴이 떠오른 탓이다.
“어쨌거나 수고했다. 미리 했던 약속대로 무공은 준비해뒀겠지?”
“네. 어차피 해룡방에서도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각오는 각오일 뿐. 사람은 본래 일을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기 마련이지.”
“지금 해룡방은 볼일을 다 본 상태가 아니지요. 이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여전히 측간에 머무르는 셈 아니겠습니까.”
“그래, 부디 저자들도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 좋겠구나.”
조충의 시선이 검을 뽑아 들고 나는 듯 달려오는 해랑검과 혈운검에게 향했다.
그 뒤를 따라 남궁철과 강아현 역시 한 발 듣게 달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 상관이 장난을 좀 치셨습니다.”
“상관?”
운호의 말에도 두 절정 고수는 뽑아든 검을 움켜쥔 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상대는 무시무시한 고수다. 이자에 비하자면 얼마 전 그들의 합공을 이겨냈던 명정신니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금의위 북진 총관 조충이라고 한다.”
“혹참가포!!”
그랬다. 분명 화산의 소신검은 스스로를 금의위 북진 교위라고 했다. 그러니 그의 상관이라면 응당 금의위 북진 총관일 수밖에. 하지만 어찌 금의위의 총관이 저런 면포를 입고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백교위에게는 이미 말을 전해들었을 것이다. 둘 중 누가 나와 함께 갈 생각이더냐.”
해랑검이 조심스럽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흐음, 해랑검인가? 그래, 뭐. 이왕이면 아무래도 사내 쪽이 조금 더 낫겠지.”
“하오나 대인. 미리 듣기로는 분명 남궁세가로 모두 이동한 다음 헤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달라졌다. 어린 고자 놈이 상당히 과격한 수를 쓰더구나. 내가 기지를 발휘해 거기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네놈들이 보고 있는 것은 나의 인자한 얼굴이 아니라 복면을 쓴 흉신악살들이었을 것이다.”
그때 운호의 시야에 무언가가 잡혔다.
“설마 그 흉신악살들이 저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응?”
* * *
“잠깐만.”
“네?”
오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수하를 불러세웠다.
“아니지. 아니야. 결국 문제는 소신검과 남궁의 그 아이가 아니라 금의위에서 밀려난 주제에 아직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그 빌어먹을 영감이잖아.”
“그러니 그를 휘하로 넣으시면······.”
“글쎄. 그 영감이 순순히 말을 들을까?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상황이 상황이니까. 하지만 그 늙은이는 언제든지 이를 드러낼 인간이야.”
“그렇다면 일단 쓰시고 이를 드러내려 할 때······.”
오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땐 늦지. 게다가 굳이 그럴 이유도 없지.”
“그렇다면?”
“어정쩡하게 찔끔찔끔 자원을 소비하느니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 * *
“그래······. 나도 참 늙긴 늙었나 보군. 감이 많이 떨어졌어. 고작 한 시진을 이야기한 네가 나를 그렇게 파악했는데 오가 놈이 나를 몰랐을 리가 없지.”
혹참가포가 자신의 손가락을 우두둑 풀어가며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그 녀석. 아무래도 내가 어떻게 맨손으로 금의위 북진 총관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는지는 제대로 몰랐던 것 같구나.”
“그럴 리가. 혁이가 아직 많이 어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태감 어른께서 중히 쓰시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나.”
“박태감? 네 놈이 어떻게 여기를?”
머리에는 강차모(鋼叉帽)를. 누런 비단 수건이 옷깃 밖으로 슬쩍 드러난다.
환관. 그중에서도 고위직인 태감이다. 이런 자리에 나타나 혹참가포에게 하대를 한다면 그 정체는 어렵지 않다.
동창의 고수다.
“마침 서쪽의 일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어서 말이지. 본래라면 잠시 쉬어줘야 하는 시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가 네 놈 목을 따는 일이라는데 나서지 않을 도리가 없지.”
“고작 네 녀석 혼자 내 목을 따겠다고? 박태감 네 놈이 서쪽 촌구석에서 잠시 왕 노릇을 하더니 주제를 잊었나보구나.”
“주제? 주제를 잊은 것은 조가 네 놈이겠지. 다 늙어 힘도 빠지고 권력도 잃어버린 늙은이가 추하게 발버둥이나 치고 말이야.”
“추한 발버둥?”
“그래, 추한 발버둥. 이런 말 듣기 싫었으면 대우해 줄 때 조용히 은퇴했어야지. 하긴, 뭐 그랬더라면 네 모가지를 따는 행운이 나에게 돌아오긴 힘들었을 테니 나에겐 네 추한 발버둥이 큰 도움이 되긴 했구나.”
박태감이라는 자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누군가 했더니 동창의 그 어린 오랑캐 고자 놈이로구나. 설마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을 줄이야.
“흥, 네 놈이 모시던 그 오랑캐 계집이 죽은 것을 아직도 원망하고 있나 보구나. 하지만 어디 그것이 나 때문이더냐?”
“그래, 그건 어디까지나 아씨의 욕심 때문이었지. 하지만 누구보다 존귀한 분이셨다. 그 마지막 역시 존귀하심이 옳았다. 너는 감히 그분께 그렇게 해서는 안 됐다.”
“흥, 존귀? 그래봤자 똥오줌을 지리던 오랑캐 계집에 불과했다. 아직도 기억나는군. 그 추한 마지막이. 이대로 편히 죽여준다면 내 밑이라도 핥겠다고 사정했었다지?”
-으드득
“이 육시럴 놈이 감히!! 내 오늘 네 입에서 그와 똑같은 말이 나오도록 만들어주마.”
크게 노한 태감이 포탄처럼 쏘아졌다.
혹참가포 조충이 비릿하게 웃었다.
-쾅!!
힘과 힘의 충돌.
초절정 고수 간의 상리를 넘어선 싸움이 시작됐다.
“자, 그러면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싸우도록 좀 내버려 두고. 우리는 우리끼리의 일을 해결해야겠지요?”
“당신은?”
“백무사. 참 유감입니다. 굳이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죠.”
“종 장군? 아니 종장군이 여긴 어떻게.”
“글쎄요. 그냥 오 소감이 생각보다 꼼꼼했다고밖에는 말씀드릴 게 없군요.”
옅은 갈색 머리에 벽안. 서역인의 피가 진하게 흐르는 중년의 무장이 씁쓸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일전에 활불의 일로 이야기를 나눴던 청대대장군 영보의 막내제자 종자명이었다.
그가 말을 이어갔다.
“제안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물러난다면 백무사와 강무사. 그리고 남궁세가의 소가주는 보내드리겠습니다.”
-흥
남궁철이 코웃음을 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냥 보내지 않는다면 어쩔 생각인가? 설마 조정의 관원들이 남궁세가의 소가주이자 거인(擧人)인 나를 해치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혹시 나의 당숙이 누구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인가?”
“압니다. 산서의 제형안찰사이신 남궁순 대인이시지요. 게다가 숙부께서는 이번에 내각 시독학사로 영전하신 남궁분 대인이시고요.”
“그걸 알면서도 감히 나의 목숨을 운운한다고?”
“그러니 그나마 이러는 겁니다. 소가주도 아시잖습니까. 사람 여기 달린 것을 다물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지를요.”
종자명이 자신의 입을 톡톡 두들겼다.
“살인멸구(殺人滅口)······.”
“하지만 해룡방은 이미 남궁세가와 사돈을 맺었다.”
“아니, 그거야 언제든 무를 수 있는 상태 아닙니까. 어차피 혼인을 올린 것도 아니고요. 게다가 오소감도 아주 경우가 없지는 않더군요. 이미 남궁세가에 계신 아가씨까지는 손을 대지 않겠노라 했으니 이쯤에서 좋게좋게 물러나시죠.”
남궁철이 신음했다.
자신의 목숨이야 얼마든지 걸 수 있다. 하지만 동생과 아현까지?
그의 시선이 종자명 뒤로 합류하기 시작하는 무사들을 향했다. 동창? 혹은 청해대장군부? 하나하나가 정예하기 짝이 없다.
물론 혹참가포 조충을 따라온 금으위의 무사들 역시 만만치 않았지만, 그 숫자에서 너무 큰 차이가 난다.
그런 남궁철의 고민을 운호가 덜어주었다.
“종장군. 웃기지도 않는군요. 이미 남궁 세가의 소가주에게 살인멸구를 운운하며 협박을 하셨으면서 무사히 보내주시겠다고요? 최 태감님이야 어쩔 수 없지만 오 소감 정도는 얼마든지 끝장낼 수 있는 가문이 남궁 세가입니다. 앞뒤가 안 맞는 말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스르릉
“종장군?”
“하여간 이래서 역시 입씨름은 영 체질이 아니라니까.”
조금 전까지 얌전히 대화를 나누던 사람과 정녕 같은 사람일까? 검을 뽑아든 종자명의 얼굴에 살기가 가득했다.
서장의 라마들이 칭하기를
벽안검마(碧眼劍魔).
황실은 중원의 문파들과는 다르다.
진단국(震旦國)에서 달마가 최초의 진기도인법을 중원에 전파한 이후 중원의 문파들은 크게 불가와 도가. 그리고 속가로 나뉜 채 그것을 발전시켰다.
현재의 무공은 달마가 전했던 불가의 진기도인과는 크게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그 근간에 존재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초월에 대한 열망이다.
하지만 마공(魔功)은 다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 자체를 저열한 감정들의 집합으로 본다. 그렇기에 그들이 말하는 초월의 방식은 이성을 통한 성찰이 아닌 본능의 극대화다.
중원의 뭇 문파들은 그것을 마땅히 경계했지만, 황실은 달랐다. 그들은 그 마공조차도 자신들의 힘으로 삼는다.
청해의 대장군부가 그러하다.
천살(擅殺). 혹은 천살(天殺).
그 시작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른다. 천살(擅殺)을 일삼았기에 천살(天殺)이 된 것인지. 본래 천살(天殺)을 타고 났기에 천살(擅殺)을 일삼은 것인지.
하지만 지금 이 땅에 천살이라는 이름이 가장 어울리는 이가 있다면 그는 아마도 벽안검마 종자명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청해대장군 영보가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종자명을 막내 제자로 받아들인 이유다.
종자명이 몸을 박찼다.
조충에게 달려들던 박태감이라는 자에 감히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만만치 않게 위협적이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 신호로 종자명의 뒤를 지키던 무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슉
종자명이 내뻗는 검의 형태가 매우 특이했다.
마치 송곳과도 같은 형태다. 듣기로는 운남 점창파의 사일검이 오직 찌르기에 특화되어 저와 흡사한 형태의 검을 사용한다고 했는데 종자명의 검은 그보다 더 극단적이다.
저것이 검이기는 한 것일까? 검날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조심!!
파검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운호의 검두가 그 공격을 정확하게 막아냈다.
-챙!!
종자명이 내지른 송곳과도 같은 검이 아니었다. 어느새 종자명의 왼손에는 휘어진 작은 단도가 하나 들려있었다.
쌍검술.
그것도 두 개의 검 모두가 기병이다.
종자명이 잇몸을 드러내고 웃었다. 사람이 저토록 극단적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일까? 검을 뽑기 전과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더러운 짐승이로구나.
파검의 경멸과 함께 종자명의 공격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