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보물(14)
옛날이야기 가운데는 그런 것들이 가끔 존재한다. 한쪽 팔이 잘린 외팔의 검사가 반대쪽 손으로 검술을 연마하여 복수하는 그런 이야기.
대부분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또한 사람의 신체라는 것은 실로 오묘하여 한쪽이 비면 그만큼 균형이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외팔의 무인은 양팔이 모두 멀쩡한 무인에 비해 그 성장이 현저하게 느리다.
하물며 처음부터 외팔이 아니라 평생 동안 검을 연마한 팔을 잘렸다?
또한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
물론 훈련에 따라 어느 정도 극복은 가능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선천적인 영역에 있다. 아무리 훈련을 잘 받는다고 해도 주로 쓰는 팔의 숙련도를 따라가기 힘든 것이 보통이다.
그렇기에 팔이 잘린 검사는 십 년을 고련 한다고 해도 이전의 5할을 장담할 수 없다.
-망할······. 검을 쥔 팔을 잘라놨는데도 경지에 올랐다고?
굳이 파검의 중얼거림이 아니더라도 운호 역시 명현의 기도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 이것은 마치 태을검선의 그것과 흡사했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강렬함이 전해진다. 이것이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과 불가에서 말하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차이일까?
아니, 어쩌면 단순히 태을검선과 명현 신니 개개인의 차이일지도.
운호가 자신도 모르게 검병을 꾹 움켜쥐었다. 오늘 낮의 싸움으로 박살난 검을 미처 교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머리를 스친다. 멍청하기는. 잠깐의 자책.
하지만 아니다. 이것은 그저 천지를 두루 비추는 달빛조차 감히 범접하지 못한 초고수의 기도가 그의 이성을 잠시 마비시킨 탓이다.
운호의 긴장을 느껴서일까?
다가오던 명현 신니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소시주,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소시주를 해치려 함이 아닙니다. 그저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입니다.”
“······.”
“그보다 소시주. 멀리서 볼 때는 정확하지 않았는데. 이상한 걸 달고 다니는군요.”
!?
명현 신니의 시선이 아무것도 없는 운호의 옆을 향했다.
-뭐지? 이 계집? 설마 나를 보는 건가?
지금까지 그 어떤 초절정 고수도 운호의 곁에 붙어있던 백(魄)을 눈치챘던 이는 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경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운호가 크게 당황했다. 파검으로 말할 것 같으면 명현 신니에게는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다. 하지만 다행이랄까?
“그래도 크게 나빠 보이지는 않는군요. 생전에 상당히 커다란 공이나 덕을 쌓았던 이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합니다. 흩어지지 않고 지상에 남은 혼백들은 그 나름의 한(恨)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명현 신니도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는 것이 한계였는지 이내 운호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빈니가 소시주를 놀라게 한 것 같군요.”
“네······. 설마 초절정의 고수이실 줄이야······. 어째서 나서지 않으셨던 겁니까.”
명현이 답했다.
“무림의 원한(怨恨)이라는 것은 참으로 지독하여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는 너무나도 쉽게 잊히고 남는 것은 켜켜이 쌓인 원한뿐이지요. 설사 내가 그것을 갚는다하더라도 그 원한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저 상대에게 넘어갈 뿐이지요. 그리고 상대는 자신의 몫을 더하여 나에게 그것을 건네고 나는 또 그것을 상대에게 건넵니다. 마치 본문과 해룡방처럼요.”
“그 말씀은?”
“불가원이원 종이득휴식. 행인득식원 차명여래법(不可怨以怨 終以得休息. 行忍得息怨 此名如來法). 이 세상의 원한은 결코 원한에 의해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직 원한을 버릴때에만 사라지나니 이것은 변치 않을 진리다.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무림에 몸을 담은 이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구절이기도 하지요.”
“설마 신니께서는 이미 용서를 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들이 먼저 용서를 구하지 않았음에도요?”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제가 원한을 버린 것뿐이지요. 여인이 자식이 없어 슬퍼하는 남편을 위해 두 번째 부인을 권했지만 남편의 사랑이 두 번째 부인과 그 아들에게 향하자 그들을 질투하고 시기하여 그 질투와 시기가 두 번째 부인과 아들을 죽게 하고. 남편의 분노가 여인을 죽게 하니. 여기서 가장 슬픈 것은 누구겠습니까.”
장담컨대 지금까지 운호는 이와 같은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조실부모하여 거리를 떠돌던 시절에도. 화산에 올라 무공을 배우던 시절에도. 그리고 강호에 나와 이름을 떨친 지금까지도.
물론 협을 말하는 이들은 있었고, 그 가운데는 진정한 협객도 존재했다. 하지만 명현신니는 그런 이들과는 또 달랐다. 그녀에게서는 인세의 명리를 초탈하려는 수행자의 향기가 진하게 풍겨났다.
“그야 당연히 홀로 남은 남편······. 그렇군요. 신니께서는 홀로 남은 남편이 되지 않으신 거군요.”
운호의 답변에 명현신니가 빙그레 웃었다. 신기하게도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의 미소였음에도 그 미소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흥, 그거야 남편은 본래 첫 번째 부인을 사랑했었으니 그런 것이지. 아무 상관 없는 놈이 내 부인과 딸을 죽였다고 생각해봐라. 어떻게든 그놈을 육시를 내야 속이 후련한 법이다.
“아미타불. 나의 원한이 훗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상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접는 것이 어찌 용서겠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결정을 하셨습니다······.”
능력이 없는 이가 용서를 논하기란 쉽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공허하다. 힘을 가진 이가 용서하는 것은 어렵다. 그야말로 대인의 풍모를 갖춰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명현신니는 그것을 넘어 힘을 가지고도 스스로 원한을 잊겠노라 선언했다.
“아닙니다. 그저 나의 마음만을 추스렸을 뿐. 사매를 돕지 못했으니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지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허면?”
“네, 괜히 저의 경지를 밝혀봤자 사매는 더 크게 원한에 집착했을 겁니다. 그렇기에 그저 조용히 따라왔습니다. 혹여라도 원한이 커지고 사람이 크게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요. 여차하면 복면이라도 쓰고 사매를 막아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소협 덕분에 일이 참으로 잘 해결됐습니다. 감사합니다.”
-흥, 위선 떨기는. 낭인들이 죽는 것은 사람이 상하는 것이 아니었단 말이더냐.
파검은 그런 명현신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연신 투덜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닙니다. 허면 하실 말씀은 이제 다 끝나신 것인지?”
“아차차. 노납이 쓸데없는 이야기로 소시주를 너무 오래 잡아두었군요. 늙은이가 나이를 먹으니 그저 잔소리만 늘어서 그렇습니다.”
명현 신니가 한 걸음을 더 다가왔다.
“소시주가 제 사매와 싸우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이제 열일곱이라고 했던가요? 참으로 믿기 힘든 성취였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알기 힘들고, 언제나 지나간 다음에야 아!! 하고 깨닫기는 합니다만, 하늘의 뜻이란 참으로 오묘한 법이지요. 모든 일에는 이유라는 것이 존재하는 법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노납이 소협에게 줄 작은 선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운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부처께서는 불살생을 승려의 첫 번째 덕목으로 말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남해의 거친 바다라는 것이 불살생을 지키기에는 너무 가혹한 환경이었던 탓일 겁니다. 본래 보타암에는 하나의 검술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불살생계를 지켜야 할 불자에게 검술이라니 참으로 재밌는 일이지요.”
운호가 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 설마 보타암에 대대로 내려오는 검술을 전수해주겠노라 말씀하시는 것인가? 대대로 검후를 배출했던 보타암의 검술은 그야말로 강호에서 손에 꼽을만한 검술 절기라고 부를만하다.
명현신니가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쪽 팔이 이렇게 돼버리니 그것을 익히기에 참으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작금에 이르러 노납의 검술은 더 이상 보타암의 검술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달라져 버렸어요. 워낙에 특이하여 이 검술을 보타암에 남겨봤자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대로 사장 시키자니 아쉬움이 들더군요.”
“설마, 저에게 그 검술을?”
“네, 소시주의 몸놀림이 참으로 범상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재밌게도 그 동작 안에 저의 검술과 통하는 부분이 적잖이 많더군요. 소협만 괜찮으시다면 저의 심득을 전하고자 하는데 어떻습니까?”
명현신니가 호의 가득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운호가 잠시 망설였다.
-뭘 망설이느냐. 물론 이 몸의 검술이 저 늙은 비구니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하긴 하다만 지금 내가 제대로 된 상태도 아니고. 초절정 고수의 심득을 전해받을 수 있다면 이것 역시 기연 축에 드는 일이다.
‘하지만······.’
운호는 지금까지 화산의 팔대검술이라는 천중일검 목운평이 깔아둔 길을 차근차근 걸어왔다. 이미 지난 경험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이 길은 절대 평범하지 않으며 결국 초절정을 넘어 지금 바로 옆에서 쫑알대는 파검 좌부원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헌데 지금 명현신니의 무공을 익혀도 괜찮은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당장에는 효과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목운평이 깔아둔 길을 벗어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운호의 그런 불안함을 읽은 파검이 그를 향해 일갈했다.
-멍청하기는. 나는 천중일검 목운평이라는 작자가 얼마나 대단한 작자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뭐, 이런 요상한 세상을 만들어 둔 걸 보면 어지간히 잘나긴 잘난 것 같구나. 하지만 그게 대체 뭐가 어떻단 말이더냐.
‘하지만······.’
-답답하다. 참으로 답답해. 절정에 이르렀다 함은 각자가 그 높이는 다를지라도 어쨌거나 일가를 이룬 것이다. 단순히 누군가가 가르치는 것을 배우는 것은 거기까지다. 결국 그 너머는 깨달음의 영역이고 그것은 아무도 가르칠 수 없다. 너의 재능이 너무 뛰어나고, 기연이 겹겹이 쌓여 너무 어린 나이에 절정에 이른 것이 지금은 오히려 독이 되는 것 같구나.
파검이 말했다.
-네 목표는 마교의 그 대제사장이라고 하였다. 아쉽지만 나 파검 좌부원은 그 자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파검 좌부원의 무공을 극성으로 익힌 다른 사람이라면 그자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아니다. 그렇지 않다. 목운평 역시 마찬가지다. 그자 역시 대제사장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 작자가 깔아둔 대로를 따라 걷는다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천중일검 목운평이 남긴 가르침은 실로 거대하며 난해했다. 그렇기에 그것을 익히고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며, 그것만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대단한 성취를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이 꼭 올바른 길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운호가 생각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운호야, 너는 너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 길이 조금 더 어렵고 험난할지라도 그것이 옳다. 저기 저 남궁벽 잡놈과 나를 보아라. 그리고 네 눈앞에 있는 보타암의 검술이 아닌 스스로의 검술을 익혔다 말하는 늙은 비구니를 보아라.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그토록 믿는 그 천중일검 목운평이라는 작자가 걸었던 길을 생각해보아라. 어느 길이 정도인지를 말이다.
마침내 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