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역대급 천재-128화 (128/288)

128화

보물(13)

범인과 천재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파검은 그것을 속도의 차이라고 말했다.

천재의 일 년은 범부의 십 년, 이십 년. 아니 어쩌면 백 년과도 같다. 그들은 범인이 하나를 생각할 때 이미 열을 헤아린다. 창의성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많은 사고(思考)가 겹친 우연의 결과물이다. 남들보다 수십, 수백 배 빠르게 움직이는 그들의 사고능력이 그러한 창의를 만들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절정의 경지는 평범한 사람을 수재로, 수재들을 천재에 근접하게 해준다. 많은 문파에서는 그것을 상단전이 개화하기 시작했다. 혹은 진기가 뇌력을 자극했다. 라고 표현하는데, 덕분에 절정의 고수들이 갖는 사고의 속도는 천재들의 그것에 버금간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어린 나이에 절정에 오르는 것이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명정 신니는 본래 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절정의 경지에 오르는 것으로 범인보다 약간 나은 수준의 사고 속도를 갖게 됐다. 물론 타고 나서 수십 년을 몸에 밴 습성이라는 것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닌지라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운호는 달랐다.

그는 애초에 태어나기를 영민하게 타고났다. 그런 그가 어린 나이에 절정의 경지에 오른 것은 마치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달아준 것과 같았다. 물론 지금까지 날개가 없던 호랑이는 그것을 쓰는 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마치 명정 신니처럼.

하지만 명정 신니와의 싸움이 그것을 일깨웠다. 무아지경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한계에까지 몰아붙였다.

또한, 운호는 본래 내공이 부족했다. 절정의 경지에 이르러 제대로 무공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부족한 내공을 최대한 쥐어짜 동작을 만들어내는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운호가 집중하는 것은 오직 난풍검의 오묘한 검리 뿐이었다.

유능제강(柔能制剛)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

그의 모든 진기가 오직 그 상단전의 뇌력을 사용하는데 집중됐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검이 명정신니의 본원지기를 담은 석장을 마주할 때, 운호는 본래 자신이 보던 것보다 더 깊숙한 세상을 엿볼 수 있었다.

명정신니의 석장이 다가왔다.

그 운동력, 중심축, 회전이 읽힌다.

그것은 본래 검종지보(劍宗至寶)라 일컬어지던 터무니 없던 재능. 운호가 몽원경에서 천중일검 목원평을 만나 가장 처음 깨달은 ‘요령’이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운호의 두 눈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명정신니의 석장을 타고 약동하는 거대한 기운의 흐름이 보인다.

아니, 기(氣)란 본디 무형이다. 그것이 보일 리 만무하다. 이것은 그저 그가 탐색한 명정신니라는 사람의 힘과 수법. 그리고 그 초식의 구조가 샅샅이 분해되어 마침내 그 궁극적인 결과물이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뿐이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재능.

세상의 모든 동작에는 그 힘의 중심축이 존재하고, 균형점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운호의 검이 명정신니의 석장을 인도했다. 명정신니의 석장에 존재하던 어마어마한 경력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운호의 검을 따라 움직였다.

그녀의 얼굴에 당혹감이 깃들었다.

종전과는 또 달랐다. 단순히 균형을 깨트리는 것이 아니다. 그녀 자신의 힘을 스스로가 제어할 수 없다.

“사, 사술!!”

명정신니가 자신도 모르게 정파의 고리타분한 작자들이 내뱉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내뱉었다.

운호의 검이 움직였다.

어느 순간 명정신니의 석장을 타고 움직이던 경력이 운호의 검으로 옮겨갔다.

난풍검(亂風劍)

그야말로 차력미기(借力彌氣)의 극치가 펼쳐졌다.

명정신니가 다시 한 번 이를 악물고 자신의 진원을 풀어냈다. 최소 일년,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을 요양한다고 해도 회복을 장담하기 힘들 만큼 막대한 손해다. 그녀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실상 무인으로의 성장을 포기하는 것을 넘어 퇴보를 선택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쾅!!!

명정신니가 내뿜었던 경력을 두른 운호의 난풍검이 명정신니의 석장을 깨트렸다.

어마어마한 경력.

명정신니가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신공으로 완성된 강철과 같은 육체도 그 한계를 넘어선 힘의 충돌 앞에서는 소용 없었다.

반면 운호는 달랐다. 분명 비슷한 힘의 충돌이었다. 그렇기에 운호가 받은 충격 역시 비슷해야했다. 하지만 난풍검의 묘리가 또 한번 운호를 보호했다. 어마어마한 충격량이 운호의 검을 타고 흘러갔다.

-쿠과광!!!

운호의 등 뒤로 바닥에 한 장이 넘는 길이의 고랑이 생겨났다. 물론 운호도 완전히 그 모든 경력을 해소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싸움을 잘 버텨냈던 검이 완벽하게 망가졌다. 곳곳에 간 실금은 물론이거니와 검의 중심 자체가 완전히 틀어졌다. 게다가 내부의 장기 역시 크게 흔들려 적어도 며칠은 요양해야 할 것 같았다.

“맙소사······.”

“사고님께서 저런 새파랗게 어린 녀석에게······.”

하지만 이 자리의 승리자는 누가봐도 명확했다.

보타암의 비구니들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결과를 바라봤다. 은근슬쩍 끼어들었던 낭인들은 이미 진즉에 무기를 버리고 그 자리에 꿇어앉았다.

그렇게 어느새 장내의 싸움이 멎었다.

운호가 망가진 검을 움켜쥐었다.

비록 지금 승리한 것은 운호 자신이지만 상대는 내외공이 거의 완성의 경지에 이른 고수다. 이미 지난 마교 대제사장과의 싸움에서 무신 모용경과 대력금강 공조대사를 통해 외공을 완성한 고수가 얼마나 끈질긴지를 목격했다. 회복의 속도가 범인의 상상력을 초월한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운호의 착각이었다. 명정 신니는 이미 진원을 사용했고 그런 만큼 그 회복은 요원했다. 하지만 운호로써는 그런 사실까지 모두 알아챌 수는 없었다.

운호가 명정 신니를 향하여 발걸음을 뗐다.

-아미타불. 소시주께서는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운호의 귓가에 누군가의 전음이 들려왔다.

아미타불? 설마 보타암의 지원군인가?

-무림의 얽히고설킨 은원의 소용돌이. 그것도 소시주의 것이 아닌 일이 어찌 굳이 발을 들이십니까. 내 소시주가 염려하는 바는 잘 알고 있으니, 그런 일이 없으리라 약속하겠습니다.

운호가 입을 앙다물었다.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전음을 받고 있음에도 어느 방향에서 전음을 보내는 지조차 알 수 없다.

고수다. 지금으로서는, 아니 어쩌면 몸이 온전하다고 해도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는 고수.

운호가 한숨을 내쉬고 검을 납검했다.

“그대들의 사고를 데리고 떠나시오.”

운호가 보타암의 비구니들을 향하여 소리쳤다.

해룡방의 밤송이처럼 빽빽하게 수염이 난 사내가 볼멘소리로 운호에게 대꾸했다.

“지금 이 자들을 그냥 이렇게 보내주란 말이오?”

굳이 운호가 그 말에 대꾸할 필요도 없었다. 남궁철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너는 참을성만 부족한 것이 아니라 경우도 부족하구나. 지금 네가 내 동생에게 해야 하는 것은 불평이 아니라 감사 인사다. 동생이 아니었다면 여기서 살아남은 이는 나 하나였을 테니까. 무엇보다 나의 동생은 해룡방과 보타암의 은원에 끼어들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 못난 우형 때문에 싸움에 끼게 만들어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지. 보타암의 스님들은 어서 신니를 모시고 물러나시오. 나의 동생이 못난 우형을 위하여 검을 들었으나 그대들을 해치지 않았으니 그대들은 이것이 원한이 아닌 은혜임을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요.”

해랑검이 잠시 피를 토하며 쓰러진 명정신니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지만 남궁철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비록 해랑검이 정파의 인물처럼 항상 대의명분을 따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염치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앞으로 그들은 남궁세가의 지붕 아래 의탁을 해야 할 것인데 소가주인 남궁철의 말을 반박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보타암의 비구니들이 쭈뻣쭈뻣 자기들끼리 부상당한 자를 부축한 채 물러났다.

그리고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운호는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그들을 바라봤다.

“운호야, 괜찮아?”

강아현이 그런 운호에게 다가왔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몸에는 스친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래도 보타암의 비구니들을 상대하는 것은 껄끄러워 낭인들만을 상대했었는데 그들 가운데 가장 수준 높던 고수들을 운호가 제거한 덕분에 딱히 위협적인 상대가 없었다.

“어. 내상을 약간 입긴 했는데, 그냥 며칠 쉬면 될 것 같아.”

“다행이다. 아, 맞다!! 내가 준비해온 요상단이 있으니까 그걸 먹으면 도움이 될거야. 기다려봐. 아마 그걸 내 짐 어디에 뒀는데.”

강아현이 날 듯 달려갔다.

운호의 시선이 강아현이 아닌 비구니들이 사라진 쪽을 향했다.

-아미타불. 고맙습니다. 참으로 고마워요. 오늘 밤, 머무는 곳에서 동쪽으로 나오세요. 빈니가 꼭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의문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뱉고 간 이야기가 귓가를 맴돌았다.

은혜?

정말 그녀가 갚으려는 것이 은혜일까? 아니면······.

-흥, 보타암 중년들 말을 어떻게 믿고. 아마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 듯하니 그냥 나가지 말아라.

‘이유요?’

-뭐, 별 건 아닐거다. 꼴에 체면치레한다고 나서지 못하는 것 아니겠느냐.

파검이 말을 이어갔다.

-정파 놈들이야 뻔하지. 불러놓고 보타암의 무공은 사실 이렇지 않다. 우리 무공은 이만큼 강하다. 이러면서 굳이 너와 싸우려 들게 뻔하다. 물론 싸움이야 마다할 이유는 없지만 지금 몸도 온전치 않은데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또 없지.

* * *

늦은 밤.

희미한 초승달 빛을 뚫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 마을의 동쪽으로 운호가 몸을 날렸다.

-거, 나가지 말라니까 그러네.

파검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운호는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귓가에 울렸던 그 전음의 목소리는 파검의 말처럼 옹졸하게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만약 그 자리에 그만한 고수가 합류했더라면 아마 보타암은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미타불.”

마을의 동쪽의 자그마한 공터.

파스라니 머리 깎은 늙은 비구니 하나가 서 있었다.

-저년이?

파검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흔들리는 가사 자락 사이 오른팔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중요치 않았다.

흐릿한 달빛 사이로도 그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보타암의 미래라 평가받던 후기지수. 하지만 보타산을 오른 파검에 의하여 오른팔이 꺾여버린 비운의 검객.

명현.

그녀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 미소가 또렷하다.

“소시주, 왔군요.”

-꿀꺽

운호가 크게 침을 삼켰다.

잘못 생각했다.

만약 그 자리에 그만한 고수가 합류했더라면 보타암이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할 수 있었을 거라고?

천만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저 보타암은 자신들에게 이만한 고수가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파검이 없는 해룡방 따위가 어떻게 감히 저항할 수 있었을까.

남궁세가의 비호?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가.

한쪽 어깨가 비어있는 늙은 비구니가 달빛을 부수며 운호에게 다가왔다.

-망할······. 검을 쥔 팔을 잘라놨는데도 경지에 올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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