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보물(12)
-저 삶은 문어 대가리를 보니 이제 좀 생각이 나는구나.
파검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삶은 문어 대가리라니. 늙은 비구니에게 사용하기에는 너무 상스러운 말이기는 했지만 반박하기 힘들 만큼 어울린다.
명정이 운호의 웃음을 조금 다르게 해석했다.
보타암의 최고수는 대대로 검후라는 칭호를 받아왔다. 반면 그녀는 검을 전혀 사용하지 못한다. 그녀가 그렇게 반쪽짜리 보타암 무공을 익힌 것은 결국 그녀의 부족한 오성 때분이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자신의 오성이 부족함을 잘 알고 있었다.
헌데 감히 자신을 돌머리라 놀린 것으로 부족하여 비웃기까지 한다고?
물론 운호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은 조금 전의 한 수로 증명했다. 터무니 없는 일이었다. 근거리에서 무작위로 흩뿌려지는 그 수많은 돌멩이를 모조리 피해내다니.
물론 초절정의 고수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고수라면 그것을 피하는데 기력을 소모하느니 내공의 방패로 모조리 날려버리지 않았을까? 즉 운호가 지금 보여준 기예는 보통 필요한 사람이라면 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비효율적이라 하지 않는 그런 행동이었다.
그야말로 보통을 넘어서는 오성, 혹은 재능. 그런 아이가 자신에게 돌대가리라는 조롱을 보냈다. 바보가 아닌 이에게 바보라 이야기해봐야 별다른 타격이 없다. 진짜 바보에게 바보라고 이야기 했을 때. 자신의 약점을 정확하게 찔렸을 때 사람은 분노하기 마련이다.
분노는 일시적으로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지금 명정 신니의 몸 역시 그러했다. 동공이 확대되고 심박수가 증가했다. 혈류가 빨라지고 일시적으로 몸에 강한 반응이 발생한다. 물론 그 반작용으로 신체의 다른 여러 가지 기능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명정 신니에게 그것들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당초 그녀의 수법들에 중요한 것은 정교함이 아닌 강력한 힘이었으니까.
-부웅!!
거대한 석장이 운호의 가슴 근처를 스쳤다.
석장에서 밀려 나오는 경력을 계산하여 움직였음에도 옷깃이 찢겨 나풀댄다.
-그래, 그때도 뭐 몸에 좋은 걸 주워 먹었는지 저렇게 무식하게 힘만 좋은 계집이었다. 내외공 모두 상당한 경지였었지. 반면 초식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고. 뭐, 하는 짓을 보니 용량만 더 늘었지 도무지 바뀐 게 없구나.
‘그래서 그땐 어떻게 이기셨던 겁니까?’
혹시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 있을까? 운호가 물었다.
그 질문에 파검이 당당하게 답했다.
-쉬웠다.
‘쉬웠다고요?’
-그래, 내가 더 빠르고 강했으니까. 거의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수준이었지. 차라리 저 계집의 사저라던 그 비구니가 조금 까다로운 부분이 있었달까? 으음, 그 계집은 운호 너와 결이 조금 비슷했었지. 어찌나 짜증 나게 굴던지 나도 모르게 검을 든 팔을 잘라버렸지 뭐냐.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저 늙은 비구니가 왜 저렇게 원한을 품었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은 마음이 생길 지경이다.
-아, 그래서 그런건가?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아니, 이 늙은 비구니가 이상하게 너와 상극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다. 그 사저라는 계집과 부대끼며 살았으니 자기 나름대로 너 같은 유형을 상대하는 법을 익힌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저 같은 유형이요?’
-그래, 내공은 부족해서 허덕대는 주제에 기교 하나는 쓸데없이 좋아서 쥐새끼처럼 얄밉게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유형 말이다.
요 몇 달간 운호에게 쌓인 것이 어지간히 많았는지 파검의 말이 신랄하다.
‘결국 정교한 초식을 단순한 힘의 크기로 누르는 형태라는 거군요.’
-그래. 뭐 어느 정도 통할만 한 힘이라면 쉽게 처리할 수 있겠다만 지금 네 녀석의 상태라면······. 뭐 무리를 해서 그 광음검이라는 것을 펼친다면 유효한 타격을 줄 수는 있을 것 같구나. 다만······.
‘다만?’
-그 빌어먹을 괴물 새끼와 싸울 때 보여줬던 그 수준이 아니라면 한 방에 보내기는 어려울 것같다.
파검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괴물 새끼. 마교의 대제사장이다. 당시 운호는 천중일검 목운평이 자신의 몸으로 펼쳤던 광음검을 재현했었다. 사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어쩌면 목운평이 잠시 타통시켰던 생사현관이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았었기에 가능했던 기적일수도 있다. 어쨌거나 당시 운호는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서야 펼칠 수 있을만한 위력의 검격을 펼쳐냈다.
즉, 지금 파검의 말은 초절정의 경지가 아니라면 일격에 명정 신니를 어찌 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역시 해랑검이 합류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하나?
운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운호가 굳이 화산을 내려온 것은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맞닥뜨리기 위해서였다. 검종의 무공은, 운호 자신의 무공은 심신 산골에서 좋은 공기를 마셔가며 그저 수련을 쌓는다고 강해지지 않는다.
치열한 실전. 무학에 대한 궁구.
오직 그것만이 운호를 더 높은 경지로 이끌 수 있다.
이십 년.
지금 옆에서 속삭이는 파검의 백(魄)이 아닌 저 높은 차원으로 도약한 고차원의 파검의 영혼(靈魂)이 이십 년을 말했다.
최소 초절정. 아니, 어쩌면 죽기 직전 무신의 경지까지.
안전한 길을 생각하며 지체할 시간따윈 없었다. 그러기에 이십 년은 너무 짧았으니까.
운호의 검이 명정신니의 석장을 받아냈다.
검면으로 부드럽게 받아 흘려낸다. 무당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유능제강(柔能制剛)의 원리다. 그리고 그대로 진행하던 방향에 서푼의 힘을 더한다. 그 유명한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의 기교가 발휘됐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성취가 깊지 못하다. 명정 신니의 몸이 그저 조금 휘청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운호가 보여주던 검술과는 사뭇 다른 그것은 임기응변에 능하지 못한 명정 신니를 당황케 하기 충분했다.
운호의 검이 명정신니의 오른쪽 어깨 관절을 강타했다.
-깡!!
여전히 강철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하지만 지금까지 근육이 두터운 부위만을 허용하던 것과 달리 관절은 외공으로 단련하기 쉽지 않은 부위다. 물론 그 거죽은 단단하지만 아무래도 그 안을 감싸는 근육이 없다는 점은 치명적이다. 물론 뼈와 뼈사이의 힘줄과 연골에도 진기는 충만하지만 아무래도 그 강도는 근육만 못했다.
명정 신니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딱 그만큼이다. 마치 아무렇지 않다는 듯 명정 신니가 거세게 공격을 이어갔다. 그 공격은 여전히 빠르고 강력했다.
운호의 검이 그 공격을 받아냈다.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는다. 더 거세게 몰아 붙였다. 운호의 검이 흔들린다. 무슨 생각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 나름대로 지금 상황을 돌파할 심산이었겠지. 하지만 멍청한 선택. 악수다.
유능제강(柔能制剛) 그래 좋다.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 사량의 힘으로 천근을 다스린다? 그래 그것 역시 좋다. 하지만 장삼봉이 말했던 사량발천근의 원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다. 먼저 천근을 다스릴 힘을 얻고 나면 사량의 힘으로 천근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 본래의 의미다. 기교를 사용하여 사량의 힘으로 천근의 힘을 다스리겠다? 그깟 얄팍한 기교따위 찰나의 균형을 깨트릴 힘이면 언제든 깨지기 마련이다.
바로 이렇게!!
명정신니의 팔뚝에 힘줄이 불뚝 섰다.
천근 거암이라도 단박에 깨트릴 막대한 파괴력. 운호의 검이 나약하게 휘청였다. 하지만 깨지지 않는다. 완전히 구부러지지도 않는다. 아주 조금의 힘만 더한다면 박살날 것 같은 그것이 그 조금의 힘이 더해질 때마다 근근이 아주 근근이 아슬아슬하게 버텨낸다.
이제는 명정신니 본인도 오기가 생겼다.
그래, 과연 어디까지 버티나 한번 보자!!
운호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내공의 소모? 그래, 물론 막대하다. 하지만 그보다 심력의 소모가 더하다. 아슬아슬한 줄타기. 물론 자신 있다. 상대의 공격은 단순하며, 그 나름대로 변주를 준다고 해도 너무 뻔하게 읽힌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오성의 차이다.
하지만 바닥에 그어진 선을 눈감고 똑바로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천장 단애를 똑같게 걸어가기는 어렵다. 단 한 번의 실수가 목숨을 좌우한다. 어찌 쉬운 일일까.
하지만 칠할 가량의 해석이 끝난 난풍검은 그런 검술이었다.
-크크크, 미쳤군. 아주 미쳤어. 하지만 마땅히 그래야지. 이 파검 좌부원이 고른 녀석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고말고.
파검이 신나게 웃었다.
제대로 수련은커녕 아직 해석조차 온전히 끝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을 시험해볼 기회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것도 목숨을 건 실전에서 그것을 시험해보는 과감함. 용기가 아니다. 만용이며 미친 짓이다.
하지만 용기로는 부족하다. 이 넓은 중원 땅.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인들 가운데 용기 있는 자가 어찌 적을까. 하지만 상승의 고수는 한 줌이며 천하를 노리는 고수는 한 세대에 하나도 나오기 힘들다.
이러한 만용과 미친 짓의 줄타기를 수도 없이 행하고 또 행한다. 낭인으로 떠돌던 시절의 파검 자신이 그러했다. 죽는다면 그것으로 그만. 그저 이름 없이 사라진 수많은 무인 가운데 하나로 남을 뿐. 하지만 파검 좌부원은 살아남았고 마침내 무림사에 불멸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물론 여전히 아쉬움은 있었지만.
막고 흘려내고 약점을 찌르고 다시 막고 흘려내고 피했으며 다시 흘려내기를 수십차례. 공방이 길어졌다. 하지만 얼마나 길어지는지 느끼지 못했다. 그래, 그것은 무아지경이라는 표현이 적절했다.
명정신니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익숙했다.
그의 대사저인 명현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장차 보타암을 이끌어갈 것이라 기대받았던 천재 중의 천재. 그 쳐죽일 파검이 잔혹하게 꺾어버린 대사저.
지금 운호는 발전하고 있었다.
그녀의 석장을 받아내는 검에 점점 원숙함이 깃든다. 휘청거리던 검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간다.
-탁!!
방금도 그러했다. 이 강맹한 일격을 저리 안정적으로 받아내 흘리다니. 게다가 저 얼굴. 저 표정을 보라. 자신이 무엇을 해냈는지. 의기양양함 따윈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검에 대한 궁구.
저 표정이 대사저를 떠올리게 했고, 이윽고 그 대사저를 꺾어버린 파검을 떠올리게 했다.
-우드득
명정신니가 이를 악물었다.
파검. 그 빌어먹을 이름. 그래, 이 아이는 파검이 아니다. 하지만 파검을 향한 징치를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사량발천근을 비웃었었다. 하지만 이제 인정한다. 이 아이의 재능은 감히 기교로 사량발천근을 논할 만큼 대단하다.
적어도 나를 상대로는.
하지만 천근이 아니라 이천근, 삼천근의 힘이라면 어떨까? 과연 그 알량한 검으로 이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까?
육십 년의 세월이 담긴 단단하기 짝이 없는 기해혈을 흔들었다.
영물이 내단을 쌓아오듯 쌓아 올린 진기의 덩어리다. 진원의 손실을 감수하고 풀어낸 한 올의 진기가 명정신니의 석장에 상상하기 힘든 막대한 힘을 실어냈다.
그리고 정확히 그 순간.
운호의 두 눈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