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역대급 천재-124화 (124/288)

124화

보물(9)

적룡창은 북방에서 잔뼈가 굵은 무인이다.

그는 북방에서 낭인 생활을 하는 무인 대부분이 그렇듯 중소문파의 차남으로 스스로 일가를 이루겠다는 꿈을 품었다. 그리고 그 꿈은 이제 거의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모아둔 돈을 갖고 어디 구석진 곳에 낙향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선 곳이 달라지면 보는 것도 달라지기 마련이라서일까?

욕심이 생겼다. 이왕이면 더 좋은 곳에서 더 좋은 조건으로.

한 지역의 호족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무력? 물론 필수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바로 ‘돈’이다.

적룡창이 평생에 걸쳐 모은 돈은 막대했다. 과장을 조금 보태 삼대가 놀고먹어도 괜찮을 정도의 거금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개인이 기준이다. 어디 변방에야 적당한 장원을 구입해서 정착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북방에서 무려 30년을 넘게 구르며 꿈꿨던 그의 화려한 미래와는 조금 달랐다.

그러나 중원의 요처는 이미 기존의 문파들로 가득하다. 물론 그 가운데는 문파에 절정 하나 없는 곳도 많았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겠는가. 땅값은 상상을 초월한다. 절정 고수가 목숨을 걸고 벌어들인 돈도 중원 요지의 비옥한 땅값에는 감히 비할 바가 못 된다.

북병에 백인장으로라도 들어가 5년 정도 복무하고 천인장으로 전역하여 장군 직위를 갖고 낙향을 해볼까? 그러면 토지의 취득세가 면제되니 꽤 큰 이득 아닐까?

그렇게 이런저런 고민들을 하던 그에게 어느 날 멀끔한 사내 하나가 찾아왔다.

“적룡창 배규. 오십삼 세. 호북 경문현 출신. 무공 수위 절정.”

“누구냐!!”

“창에서 나왔다.”

“창? 창이라면······. 동창? 아니, 동창에서 나를 대체 왜?”

“배규, 금의환향 하고 싶지 않나?”

“금의환향?”

“그래, 금의환향.”

불알 없는 내시 놈의 그 말을 듣는 바로 그 순간.

적룡창 배규는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래, 금의환향이다. 쫓겨나듯 뛰쳐나온 고향 땅으로 화려하게 돌아간다. 아마 자신을 괄시했던 어른들은 모두 죽고 없겠지만 또래의 친구 놈들은 여전히 그 시골에서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겠지.

“모아둔 돈은 제법 되겠지만 경문현에 장원을 살 정도는 아니겠지. 최근 무한삼부가 워낙에 커지는 바람에 인근의 현들이 죄다 호황이니 말이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 그리고 해줄 수 있는 일은 무엇이고.”

땅, 집. 그리고 벼슬까지.

그는 적룡창 배규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겠다 약속했다. 그저 해룡방의 해랑검 혹은 혈운검을 사로잡아오는 것만으로.

“아차차. 그분께서는 자신의 것을 나누기 싫어하시니 해룡방의 졸자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도 잊지 말고.”

소신검.

듣기로는 이제 고작 열일곱이라던가? 이제는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지만 적룡창 배규 자신이 북방으로 향했던 것이 아마 저 나이 즈음이었던 것 같다.

참으로 부럽기 짝이 없다. 본인의 재능은 무림사에 전무할 만큼 압도적이며 그 배경은 강호 최강의 문파인 화산이다. 아마 저대로 성장한다면 30년 후 천하제일인 자리는 따논 당상이리라.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북방의 달자 수백, 아니 어쩌면 수천을 꿰뚫은 배규의 창이 운호의 몸을 노렸다.

하나의 점이 벼락처럼 쏟아진다. 어려운 점은 이 점이 언제 어떻게 어디로 휘어질지 모른다는 점. 그리고 그렇게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주제에 일격 일격에 실린 무게감이 무겁기 짝이 없다는 점이었다.

강하고 빠르며 현란하다.

하지만 익숙했다.

-챙!!

날아드는 창을 강하게 쳐냈다. 적룡창의 전완이 꿈틀거렸다. 이전의 그 수법이다. 비껴나간 창대가 낭창하게 휘어들어왔다. 대체 무슨 합금을 사용한 것인지 저토록 두터운 금속 병기가 연검 만큼은 아니어도 참으로 잘 휘어진다. 물론 그만한 요령과 어마어마한 신력이 바탕이 됐기에 가능한 기예겠지만 말이다.

-흥, 어리석기는. 이미 한차례 보여준 것을 또 사용하다니.

파검이 운호를 대신하여 코웃음쳤다. 그는 이미 몽원경에서 백 번도 넘게 운호와 목숨을 걸고 칼을 섞었다. 그렇기에 운호의 재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부한다.

애당초 같은 내공과 육체조건이라고 해도 초절정, 아니 그 너머의 경지를 개척한 고수를 상대로 6할에 가까운 승리, 아니 그러니까 무승부를 기록한다는 것은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운호가 가진 비정상적인 수준의 초식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

운호가 손에서 검을 놓았다.

단단하게 버티던 운호의 검을 축으로 휘어져 들어오던 적룡창의 창대가 축을 잃어버렸다. 물론 그 대신 그 휘둘러지는 속도는 한층 더 빨라졌다. 적룡창 본인도 한순간 균형을 잃어버릴 만큼.

‘이런 미친?’

자신의 무기를 버리다니.

제정신인가? 아니, 혹시 뭔가 숨겨둔 무기가? 아니면 더 접근하여 맨손박투를 벌이려는 것인가?

당연하게도 적룡창의 시선이 운호에게 못 박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쾅!!

가슴에서 느껴지는 막대한 통증.

적룡창이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이기어검(以氣馭劍)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적룡창이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경험해보지 못한 무공이었다. 당연하다. 이기어검은 단순히 검술을 연마한다고 익힐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초절정에 이르렀다고 해도 허공섭물로 이기어검의 흉내만 낼뿐, 진정한 의미의 이기어검을 펼치지 못하는 이도 태반이다. 저것은 그야말로 저기 산골짜기에 귀신 씻나락 까먹는 개똥철학을 현실로 가져오는 미친 짓이다.

가슴팍에 핏물이 번져나왔다.

그래도 다행이다.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한 쇄자갑이 제몫을 했다. 몸을 추스를 시간따윈 없었다. 승기를 잡은 운호가 돌진해왔다.

적룡창의 쇄자갑을 깨트리고 가슴팍에 상처까지 만든 검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로 이어진 것 같다.

순식간에 네 걸음.

그 와중에 빠르게 창을 휘저어 접근을 막아봤지만 소용없었다.

-부웅

머리끝조차 스치지 못했다. 소신검!! 마치 그 궤도를 미리 읽기라도 한 것처럼 신묘하게 접근해온다.

-당황하니 수법이 참으로 뻔해지는구나. 쯧, 요즘은 북방도 참 많이 죽었단 말이지. 나 때만 하더라도 달자들도 아직 전조(前朝)의 유산이 좀 남아있어서 흉험했는데 말이야. 저렇게 어설픈 놈들은 살아 남지도 못했어.

파검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적룡창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그의 근육, 철창의 움직임. 생소함은 잠시다. 이미 저 창의 길이와 무게, 탄성까지 모두 머릿속에 입력됐다.

‘뻔해.’

빠르고 강하고 현란하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그런 것만으로 최강이 될 수 있었다면 납매검을 완성하는 것으로 충분했으리라.

한 걸음.

드디어 배규가 운호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지금까지 운호가 그의 공격을 모조리 비껴낸 것이 그의 초식을 읽은 것이라고 치자. 하지만 상대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소신검만이 아니다. 배규 역시 운호의 동작을 읽을 수 있다.

정확하게 예측한 곳으로 창을 찔러 나갔다.

실로 합리적이다.

그리고 운호의 몸이 움직였다. 미리 정해둔 그대로. 하지만 배규가 감지하고 예측한 것과는 다르게. 배규의 창술은 납매검을 극도로 연마하여 절정에 오른 무인을 연상케 했다. 약간의 속임수로 동작을 유도했는데 그것이 정확히 통했다.

물론 운호 역시 손해가 상당하다. 미리 대비했다고는 하지만 배규만한 무사를 속여넘기는 일이다. 순간적인 역동작으로 근육들이 파열되고 인근 모세혈관이 파괴된다. 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 부위에 붉은 점들이 피어올랐다.

-후읍

한 번의 큰 호흡.

포원공의 진기가 빠르게 치솟았다. 거의 생각의 속도만큼 빠르게.

이미 배규가 무언가 갑주를 입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자신의 공격이 빗나가는 순간 배규는 직감했다.

피할 수 없다!!

적룡창 배규가 빠르게 자신의 얼굴을 보호했다. 투구를 쓰는 전장이었다면 이 방어 역시 더 수월했을 터인데. 가벼운 머리가 어쩐지 아쉽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기어검은 신묘하지만 그 위력은 직접 검을 휘두르는 것만 못하다.

전신의 내공을 일으켜 근육을 단단히 조였다. 아마도 쇄자갑을 꿰뚫고 약해진 공격 정도는 막아낼 수 있으리라.

-푸욱

운호의 검이 배규의 몸을 관통했다.

-크헉. 배규의 입에서 주르륵 핏물이 흘러내렸다. 내부를 관통한 진기가 이미 그의 내장을 헤집었다. 적룡창 배규 역시 절정의 고수였던 만큼 즉사는 면했지만 죽음은 기정사실. 그의 온몸에서 힘이 쭉 풀려나갔다.

“이런 개 같은······. 어떻게 정확히 이곳을······. 노린 건가?”

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 정확히 검 하나가 들어갈 공간을 노렸다니······. 대단하다. 과, 과연. 천하제일을 논할 재능이로구나.”

적룡창 배규의 입에서 또 한 번 핏물이 터져 나왔다. 평생을 고련하여 쌓아 올린 진기가 그 핏물을 따라 흩어진다. 마치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했던, 그렇기에 마음껏 손을 쫙 펼 수 있었던 그 시절처럼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열일곱. 천하제일을 논할 저 어린 재능을 보고 있자니 문득 청운의 꿈을 품고 북방으로 향했던 홍안의 젊은이가 떠올랐다.

“하지만 조심해라······. 상대는······.”

“압니다.”

운호의 대답에 배규가 믿기 힘들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현음명 최염. 제국 최고의 권력자지요.”

“······.”

사상(四象)의 일좌.

천하제일에 가장 가까운 인간. 황제를 제외하고, 아니 어쩌면 황제보다 더 강력한 권력의 소유자.

그런 이를 거론하는 운호의 어린 얼굴이 너무나도 평온했다.

“아쉽다. 내 손에 쥐어진 것이 적룡이었더라······면······.”

운호의 시선이 배규의 시체에서 멀어졌다.

-몸 상태는?

‘적어도 반 각은 필요합니다.’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애당초 그들을 찾아온 고수 가운데 절정의 고수는 명정 신니와 적룡창 배규가 전부였다. 남해 보타암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너무나도 빈약한 구성이다. 하지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파검이 보타암을 올랐던 당시 문파를 대표하던 고수 가운데 여섯을 완전히 폐인으로 만들고 가장 강력한 고수의 한쪽 팔을 베어냈다고 했다.

그 정도로 알차게 문파를 박살 냈는데 외부로 투사할 전력이 온전하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겠지.

게다가 낭인들 역시 제법 제 몫을 다해주고 있었다. 적룡창 배규와 마찬가지로 보타암 측에 합류한 낭인들의 숫자도 제법 됐지만, 그들 가운데 남궁철이나 강아현에게 위협이 될만한 고수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명정 신니.

그녀는 남해 보타암의 무공을 제대로 연마한 절정의 고수란 이런 것이다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비록 부상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해랑검 공조와 혈운검 좌하랑. 두 명의 절정 고수를 상대로 오히려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괜히 강호 명망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밟을 때 확실히 밟았어야 했어. 어설프게 온정을 베푼 것이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붕대로 칭칭 감아둔 좌하랑의 옆구리가 다시 붉게 물들었다.

저대로 버텨봤자 승산은 없다. 명정 신니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굳이 무리를 하지 않고 상처 없이 싸움을 끝내려 했다. 무엇보다 해랑검과 혈운검은 생포를 해야만 했다.

“멍청한 놈 같으니. 역시 길바닥을 굴러 먹던 놈은 믿을 수가 없구나.”

하지만 적룡창 배규와 운호의 싸움이 저렇게 끝난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석장을 쥔 명정 신니의 팔뚝에 힘줄이 불뚝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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